101. 대중문화개방 (1)
결혼식 이후 이어진 피로연.
축하를 빌미로 이뤄지는 비즈니스 사교의 장 덕분이었을까.
민영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도 잊은채 한참이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대화의 안개 속에서 나는 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는 있는 법.
결국 파티는 끝나기 마련이었고,
그 끝에서 나는 어색한 공기를 마시며 홀로 미리 잡아둔 스위트 룸에 들어왔다.
"후...."
그간 고여있던 미묘한 한숨이 불현듯 흘러나왔다.
"거 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도.
일에 미쳐있는 삶을 살아온 내게 사람사이 인연이라는 것은 일종의 거래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생에는 정략결혼의 일부였던 내 처가 그러했고,
태균그룹에게 봉사하기 위해 희생되었던 내 부하들이 그러했고,
현생에는 타케미치, 오오와다, 앤이 그러했으며,
민영 역시 이 틀 안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차라리 거래를 요구했다면. 이렇게 고민하진 않았을텐데."
오오와다와 앤의 결합처럼.
대를 이어 집안의 이름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오브라이언가의 필요와
신분 상승을 꿈꾸던 오오와다의 욕망을
교환하는 매개수단으로서의 사랑과 결혼이라면.
차라리 선택이 쉬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래라는 깊은 이해관계 속에서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전생의 나와 내 처와의 관계도 그랬고.'
그러나 민영처럼.
순진하고 우직하게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을 들이미는 상황은
일전에도 겪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기에 나로서는 그 어떤 거래보다도 어려운 것이었다.
"어렵다면... 쉬운 길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나는 비인간적이지만.
내게 익숙한 쉬운 길을 택했다.
계산.
과연 민영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혹은 받아들였다 가장하기라도 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인가.
지극히 비인간적이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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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태준이 '이득'이라는 관점에서 민영과의 관계를 계산하고 있던 그 시각.
민영은 '설득'이라는 관점에서 태준과의 관계를 계산하고 있었다.
"잘 한 짓인지 모르겠네."
자존감이 높은 민영으로서는 태준이 본인을 싫어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외모도 출중하고.
그 사이 태준을 보필하며 실력 역시 (오오와다나 앤에는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KOTEC이라는 구멍가게 수준의 경비업체를 운영하던 때에 비하면 상당한 성장을 이룬데다,
나름대로 태준의 옆자리를 보좌하는 역할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태준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은 없었던 민영은 그런 자신의 외적인 매력요소들을 애써 저 멀리 밀어두며 자신의 마음이 잘 전달 되기만을 바랐다.
"괜찮아. 차이면 차이는대로 어색해지겠지만... 잘 지내면 되는거니까. 거기다..."
그렇게 민영은 무의미한 자기 최면에 가까운 혼잣말을 되뇌이며 탁자 위에 올려진 우편물을 멍하니 보았다.
<제 40회 사법시험 3차(최종) 면접 안내>
"차이든... 잘 되든 3차에만 붙으면 2년간은 연수원에 들어가있게 될테니까."
태준의 강도 높은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법 공부를 놓치 않았던 민영이 거둬낸 또 다른 노력의 결과물을 앞에 둔 민영은 문득 자신의 비겁함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도 진짜 치사하다니까. 도망갈 구석 하나 만들어두고 고백이나 하고."
그렇게 멍하니 사법시험 면접 안내서를 보던 민영은 조심스럽게 사법시험 면접 안내서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고는 늘 가지고 다니던 서류가방에 넣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어쩔 수..."
그렇게 고백의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과 초조를 견뎌내던 민영은...
-따르르릉
순간 울려퍼진 호텔 인터폰에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그렇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받은 민영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차츰 표정이 굳더니 이내....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다시 한 번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절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망했다... 회장님 얼굴 어떻게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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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고민하며 잠들지 못한채 한적한 한 밤의 서울 시청앞 도로를 보고 있던 그 때.
스위트 룸 전체를 울리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룸 서비스는 시킨적이..."
그렇게 문을 열자.
민영이 잘 갖춰진 정장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민영...씨?"
"회장님. 청와대에서 긴급하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지금 바로 청와대로 들어오시랍니다."
그 말에 나는 그간의 고민을 털어버리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민영씨는 가서 차 준비하세요.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청와대에서 차를 직접 보내겠다고 하니 바로 준비하시면 됩니다."
민영의 말에 나는 빠르게 입고있던 가운을 벗어던지며 빠르게 스위트룸 안쪽으로 내실로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김태충 대통령이 부르는 이유가 뭐랍니까?"
그렇게 내가 내실 문을 열어둔채 옷을 갈아입으며 민영에게 묻자 민영이 말을 이었다.
"제안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UEP사장과 함께 들어오라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잘했습니다. 신혼 첫 날 밤을 보내는 사람한테 대뜸 나오라 할 수는 없죠. 귀뜸으로라도 그 쪽에서 알려준 제안은 없었습니까?"
"UEP 사장까지 들어오라 한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대중문화개방을 미끼로 뭔가를 요구할 작정인 모양입니다.
앤이 꾸준히 언론에 대중문화개방에 대한 칼럼을 개제하기도 했고, 실제로 김태충 대통령 역시 지금 막고 있는 일본과 나름의 인연이 있는 사람인지라..."
그렇게 민영의 이어진 추측이 끝남과 함께 옷을 갈아입고 넥타이를 집어는 나는 민영을 향해 물었다.
"정두황 정권 초기에 일본 덕에 구사일생한 일이 있지요. 김태충 대통령이.
확실히 정치감각은 좋네요. 일본에 입은 은혜를 갚는 것과 동시에 내게 빚을 지워 나와 함께 하겠다라....
판교땅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리는데도 안 갈 수가 없게 만드네요."
그렇게 넥타이를 매고 방 밖에 나오자 민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현 야권 출신 전대통령의 치적이 워낙 크게 지지받는 상황에서 단순히 민주화 거두로서 여소야대임에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인 만큼 김태충 대통령으로서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특단의 조치가 또 우리라면 김태충 대통령 입장에서는 굴러가기에 따라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네요."
"예. 하지만... 지금으로선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반 국민들에게 어필이 되는 사업군 중 규모가 큰 사업들은 전부 우리 그룹이 차지하고 있고,
다른 규모 있는 사업은 일반 국민들에게 어필이 안 되거나 잘 못 손잡았다가는 정경유착소리 듣기 좋은 사업들 뿐이니까요.
여러모로 대안이 없으니 독이라도 써보겠다는 심정일 겁니다."
그렇게 민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구두를 신은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불러 민영과 타며 말을 이었다.
"일단 늘 그랬듯 대통령과의 거래는 제가 주도하겠지만. 이번에는 요청 사안 중 UEP사장도 있는 만큼 민영씨는 최근 올라온 보고서 중에... KTJC-J에서 올라온 '일본 엔터산업 시장 전망' 관련 내용 숙지해두세요.
우리 차 뒷자리에 그 서류가 있을 겁니다. 아니, 아예 그걸 가져오는 것도 좋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민영이 답하고.
다시 이어진 침묵 속에 내던져진 나는 슬쩍 올라오는 어색한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엘리베이터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넥타이를 다듬었다.
그리고 그 때.
민영이 슬쩍 내 앞에 서더니 넥타이를 고쳐주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로비에서 내려서 지상주차장에서 말씀하신 서류 가져오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이 내 넥타이를 만져준 민영을 보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는 민영이 로비층에서 내려
내리자마자 지상주차장으로 달려가는 뒷 모습을 보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쉴 수 밖에 없었다.
"거 참. 민영씨도 대단하네. 대형 사고 쳐놓고 저렇게 멀쩡한 것 보면."
그렇게 내가 지하층에 내려와 주차장 출입구에 서있던 그때.
지하 주차장으로 검은 색 세단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그 중간에서 현 정권의 비서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태준 회장?"
"맞습니다만."
"차에 타시오. 대통령님께서 기다리시오."
그 말에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일행이 도착하지 않아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무례하군."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만. 한 밤중에 그것도 행사 마치자마자 대뜸 보자고 연락해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청와대로 들어오라 명령한다니.
이게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민주주의입니까? 아니면,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허울 좋은 민주주의입니까?"
내 말에 비서실장이 인상을 확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돈 좀 벌었다고 젊은 사람이 막나가는 것 같은데..."
"지금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권위주의였군요. 이러면 더 힘들어지겠는데요?"
"이봐. 김회장.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지?"
"비서실장님이야 말로 뭐하시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김태충 대통령께서 제게 이러라고 직접 말씀하신 겁니까?
어떻게든 찍어 눌러서 데려오라고? 지금이 정두황 정권입니까? 노대호 정권입니까? 그 때도 이런 법은 없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지시하신 내용은 아니네. 하지만... 한참 아랫사람인데다 고작해야 기업이나 굴리는 자네를 나나 대통령님께서 구태여 배려해줄 필요가 있다고 보는가?
자네를 괴롭히려 든 것이라면, 이런 방법이 아니라 세무조사같은 걸로 탈탈 털어버릴 수도 있어."
"터시죠. 차라리. 그럼 제가 왜 이렇게 당당한지 알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비서실장과 말싸움을 하던 그 때.
내 뒤편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팅 소리를 내더니 민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딱 적당한 시간에 오셨습니다."
나와 민영의 대화에 비서실장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만 차에 타지."
그 말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민영에게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 있는 음성파일 따로 빼놓으시고.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
"예?"
"오늘은 안 갑니다. 이렇게 납치 수준으로 데려간다는데 뭘 믿고 간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내가 청천벽력같은 말을 던지자 비서실장이 확 인상을 쓰더니 말을 이었다.
"이봐! 김회장! 지금 자네가 우릴 길들이려는게야!?"
"길들인다? 말은 바로 하시죠.
세금도 다 내고, 정당하게 사업하는 이 나라의 주인 중 하나인 제가 정부의 이런 고압적인 행정력 행사에 응할 필요가 없으니 이러는 겁니다.
가서 대통령께 지금 일 바로 전하세요. 존중을 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부터 하라고.
만날 수 있는지, 시간은 언제가 좋은지.
실례를 하게 되었다면 왜 실례를 하게 되었고 얼마나 긴급한 사안인지.
그리고 왜 논의가 필요한지.
인간관계의 기본 아닙니까?"
그렇게 말을 남긴 나는 호텔 엘리베이터의 호출버튼을 누르고는 비서실장에게 들리게끔 작지 않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핸드폰에 방금전 대화 녹음이 되어있을겁니다. 그 음성파일 따다가 유니버스넷에 올려버리세요. 기왕이면... 보수 언론사 통해서 올리면 더 좋겠네요.
여소야대에도 멈추지 않는 갑질. 대통령제 이대로 괜찮은가?
민주정부의 어두운 뒷면. 기업인에게 까지 뻗는 갑질어린 손.
이렇게 헤드 따서 뿌려버리면 재미있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며 호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닫혀가는 문 틈 새로 비서실장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왠지모를 통쾌함을 느끼며 미소짓던 나는...
"그런데 진짜 녹음 하셨나요?"
"아뇨. 하도 고압적으로 나오길래 쇼 한 번 한겁니다."
민영의 질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답하고는...
"풋."
"하하핫..."
민영과 함께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파안대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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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준에게 거절당한 비서실장이 청와대로 복귀해 이를 보고하자...
"... 하. 아주 주도권을 제대로 넘겨줬네. 잘하는 짓이요. 어디가서도 내 이름 팔아가며 그렇게 하고 다니는 거 아니오?"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저는 김회장 기를 꺾어 놓으려고..."
"하여간...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더니... 젊다고 기 꺾고 들어가려는 그 발상 부터가 글러 먹은 거 아니오. 쯧.
나가서 차나 준비해놔요. 한 대만. 조용히."
김태충 대통령은 인상도 찌푸리지 않은채 혀를 차며 비서실장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핀잔 끝에 영문모를 오더가 김태충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비서실장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
"비서실장이 싸질러 놓은 똥 치우려면 내가 직접 가야지 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