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브루나이 (2)
태준이 아세안 순방을 다니는 사이.
퀀텀펀드에서는 드러켄밀러를 중심으로 다음 투자전략을 짜는데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자네 말은 러시아에 투자하라 이 말인가?"
그렇게 전력투구하는 와중에 드러켄밀러가 러시아 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소로스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채권 차익거래로 재미를 보고 있는 롱텀캐피탈이 최근 러시아 채권을 슬슬 사들이고 있다는 소식, 들으셨을 겁니다."
"그야 들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롱텀캐피탈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대부분의 펀드들은 그런 거래 방식은 불가능하지 않나? 우리가 그걸 할려고 하면 필요한 수학자가 얼마나 될지... 채권 간 상대가치를 추정해 낸다는 것 부터가...
아니 그 전에 그 놈들이 자랑하는 공식을 구할 수나 있나?"
드러켄밀러의 말에 소로스가 난색을 표하자 드러켄밀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못 구하니 우리가 직접 채권 투자에 뛰어들기는 애매하죠.
눈 감고 뛰어들게 아닌 이상엔 말이죠.
채권 투자를 하려면 직접하지 말고 LTCM에 맡기라는 말을 우리들조차 공공연히 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왜...?"
소로스의 의문에 드러켄밀러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왜 러시아는 채권을 발행하는가. LTCM은 왜 러시아의 채권을 사주는가.
골드만 삭스는 왜 뜬금 없이 LTCM의 회사채를 사들이는가?"
"그야 소련붕괴 이후 개판이 된 경제를 회복할 돈이 필요해서가 아닌가.
LTCM은 그저 자기들 공식에 따라 투자를 하는 것 뿐이고.... 골드만은... 뭐 그 치들이 하는 별난 짓이 어디 한 둘인가?"
"그렇죠. 그리고 러시아에는...?"
소로스와 질답을 주고받으며 너스레를 떨던 드러켄밀러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름이 있죠. 가스도 있고. 나무도 있고. 말 그대로 아직 캐지도 않은 자원이 수두룩 하다는 겁니다.
러시아는 사실상 자원들을 담보로 계속해서 채권을 찍어내는 것이고... LTCM 역시 러시아의 이런 배경을 믿고, 정확히는 이를 계산에 넣고, 찍어내는 채권들을 사들이는 것이죠.
원자재를 가진 이상 망할 일이 없을테니까요."
그 말에 소로스가 슬쩍 제안서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 말 뜻은 알았어.
국가 차원에서 돈을 풀며 경기부양을 꾸준히 하고 있고,
그 돈을 뿌리기 위한 채권 역시 상당히 안정적인 기반을 가졌다는 것도... 이해했네.
거기다 LTCM이 계속 러시아에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도 알겠고.
자연히 러시아가 나름 미래가 있는 시장이라는 것도 알겠네. 하지만 러시아는 아직 국영기업이 주류라 투자할 기업이 딱히 없는데... 어쩔 생각이지?
뭐 가스프롬에 아는 간부라도 있나?"
소로스의 질문에 드러켄밀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요. 우리는 롱텀캐피탈의 고객이 되는 것으로 러시아에 발을 걸치려고 합니다."
그 말에 소로스는 보고서를 팔랑이던 손을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고작 그게 자네가 들고 온 대책이라면 실망인데?
롱텀캐피탈을 따라하자는 것도 아닌 그들의 고객이 되자니.
그 따위 말을 하려고 그렇게 장황하게 러시아 이야기를 한 건가?"
소로스의 날 선 말에 드러켄밀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대우 잘 해준대서 왔더니만 내 월급만 늘었지
실제로 굴리는 돈은 반토막으로 줄어..
밑에 직원들은 세 토막 나...
이렇게 완전히 초토화 된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나 불만은 어디까지나 속에서만 부글거릴 뿐 입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불만 대신 던져 줄 떡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권 운용 인원을 아껴서 다음 전략에 쓰기 위한겁니다. LTCM을 운용사로 지정하는 건."
드러켄밀러가 소로스를 달래며 던진 떡밥에 소로스가 흥미롭다는 듯 빤히 보자 드러켄밀러는 말을 이었다.
"다음 전략? 채권 굴리던 애들까지 데려가 뭘 할 생각인데?"
"IT버블을 일으킬겁니다."
"음..? 그건 이미..."
"정리 되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거든요."
드러켄밀러의 짧은 대답에 소로스가 이내 놀란 눈으로 말을 이었다.
"태준이 또 나서는 건가?"
"예. KTJC에서 나오기 전 동남아 지역 통신사 진출계획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나오기 직전에는 북미 AT&T 와도 MOU를 계획하고 있었죠...
그 말은 태준이 버블을 일으킬 의도가 없더라도...."
"태준이 그 정도로 계속 인터넷 관련 산업을 밀어붙이면 또 다시 버블이 생길 여지가 있다?"
"그렇습니다. 아니 거의 확실하게 일어난다고 봐야겠지요. 단지 그 시작을 우리가 하자는 겁니다.
태준의 MOU소식이 공식화 되는 것을 신호로 우리가 선제적으로 IT관련 기업에 자금을 투하하는 거죠.
지난번 IT버블이 꺼진 건 누가 태준이 단독으로 버블을 일으키고 꺼뜨린 일종의 주가조작 같은 것이었지만...
이렇게 배경이 깔리면서 일어나는 버블은 대중의 광기에 의한 것이니 전처럼 쉽게 빠지진 않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그간의 손해를 모두 메우고 남을 겁니다."
드러켄밀러의 말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살짝 한숨을 쉬어보인 소로스는....
"뭐... 어차피 PM은 자네니까. 믿고 맡기겠네."
설명이 다 끝나고 난 뒤에야 평정을 가장하며 드러켄밀러를 믿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속보이는 행동에 드러켄밀러는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슬쩍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태준이라는 말에 바로 수긍하는 거 보면... 거참. 이는 갈아도 능력만은 인정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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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야 왕이라고 하면 워낙에 신권(臣權)이 발달한 조선 시대를 떠올리기에 왕이라는 존재 역시 타협을 통한 정치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왕조국가에서 왕이라는 존재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성군의 치세라 할 지라도,
그 왕이 정국을 주도하는 것이라면 기본적으로 독재의 성향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그 말인 즉 전제군주정을 유지하는 브루나이의 경우 구태여 다른 각료들과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브루나이의 국왕은 본인의 정식 직위인 술탄 외에도
국무총리, 재무장관, 외무장관 등의 내외정직은 물론
국방장관, 브루나이군 총사령관 등의 군사적 요직과
브루나이 다루쌀람 대학교 총장, 브루나이 공과대학교 총장, 술탄 샤리프 알리 이슬람 대학교 총장 등의 기타 직위까지 전부 독점하는 상태였다.
브루나이의 모든 것이 전부 국왕의 것이라는 뜻.
그런 브루나이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김응삼 대통령이 내민 카드는...
"석유는 언젠가 고갈이 되고 말지요. 설사 석유가 고갈이 되지 않더라도 석유의 시대는 곧 저물겁니다."
"자키 야마니(전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의 말이군.
그 말에는 나도 공감하오.
석유값이 올랐을 때에는 그럭저럭 버틸만 해서 국민들에게 돈을 뿌렸지만,
석유값이 떨어지니 늘어난 재정지출이 슬쩍 부담이 되더이다.
거기다... 얼마전이라기에는 조금 뭐하지만 인광석 캐다 팔던 나우루라던가 우리처럼 석유가 나는 베네수엘라가 그 꼴이 나는 것을 보면서 짐도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소.
벌어놓은 돈을 금융가에 풀어놓고 있지."
"그것 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금융으로 큰 돈을 번다고 해도 결국 기본적인 수입 자체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장기적으로는 침체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금융으로 성공적인 투자를 한다고 해보아야... 지속적인 재정 지출이 계속되는 한 그걸 넘어설 돈을 벌어들일 수 없을테니까요."
"허면 대한민국에서는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말씀이오?"
"우선 금융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으니 대한민국 차원에선 브루나이에 한국식 증권거래소를 설립하는 것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브루나이 신성장 정책의 일환으로 직항편 개설 등 관광산업 발전을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호오..."
"그에 더해. 민간에서는...
여기있는 김태준 회장이 브루나이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만큼 이 친구의 말을 들어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증권거래소 설립과 관광산업을 지원하는 것과 함께....
대기업 회장인 김태준, 즉 나였다.
그렇게 소개를 받아 브루나이 국왕과 직접 말을 나눌 수 있게 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엇다.
"소개받은 유니버스 회장 김태준입니다."
"그래 우리 브루나이에 진출을 해보고 싶다고."
"예."
"어째서지?"
"브루나이는 두뇌 유출이 심각한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내 뜬금없는 폭탄 발언에 김응삼 대통령이 순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브루나이 국왕 하사날 볼키아 역시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며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의 황당함과 적대감이 뒤섞인 표정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브루나이가 두뇌유출이 심각하다는 데에서 발전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술탄께서는 북유럽 이상의 복지를 국민들에게 배푸시죠.
의료비도 공짜.
교육비도 공짜.
심지어 새해에는 세배돈도 주시지요.
가난한 자든 부유한 자든 생활에는 문제가 없고, 직업은 사실상 취미 영역 내지는 명예 영역으로 브루나이를 운영해오셨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고 훌륭하신 일이지만... 국민들은 술탄의 훌륭한 치세를 순순히 받고만 있지 않았죠.
무한정 지원되는 교육비로 미국등지의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 아예 그 나라에서 정착해버리기 일쑤고,
몸이 아플때만 슬그머니 들어와 공짜에 가까운 의료비 혜택을 받아갑니다."
내 말에 브루나이 국왕의 표정이 슬쩍 풀리며 말을 이었다.
"... 내 걱정을 정확히 잘 짚어내는 군. 계속해보게."
"감사합니다. 그럼 계속 이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는 원인은 일하고 싶은 자들이 일할 일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작해야 왕실 전용 호텔 정도?
그 마저도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다닐 뿐이죠.
만약 유출되는 두뇌를 이용하여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석유에 치우친 경제 구조를 개선함과 동시에 브루나이라는 국가를 더욱 안정적인 궤도로 올려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해서 자네가 제안할 게 대체 뭔가?"
그렇게 체면을 떨어뜨렸다가, 올렸다가,
희망을 빼앗았다가 줬다가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해온 나는 슬쩍 내가 원하는 사업을 내뱉었다.
"우선 IT 벤처를 브루나이에서 육성해볼 생각입니다."
"육성한다?"
"예. IT산업에 기반이 되는 통신사를 설립하고 브루나이 전역에 통신망을 구축한 뒤,
컴퓨터를 보급하고, 프로그래밍 교육을 진행하여 자생적인 IT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술적인 도움은 물론이고 지분을 20%인수하는 조건으로 투자도 할 생각입니다."
내 말에 브루나이 국왕은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왕실은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지?"
"뭘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건 줄 사람이 정해야지 받을 사람이 정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브루나이 국왕의 말에 나는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브루나이에 세워질 통신사에 대한 지분 40%는 어떠십니까? 물론 지분의 절반정도는 술탄께서 투자하신다는 조건이지만요."
"60은 자네가 갖는다는 말인가?"
"예. 설비 부터 전부 제가 설치하고 운영하니까요."
"절묘한 제안이군. 혹시 쉘(네덜란드 정유 기업 로열 더치 쉘)에 아는 사람이 있나?"
"아뇨. 정유쪽에는 인연이 없어서..."
"그 자들이 내게 했던 제안과 딱 똑같은 제안을 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야."
그 말에 나는 희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 보다는 그래도 제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자들은 술탄의 소유인 석유를 받아가면서 추가 투자를 요구한 것이고,
저는 술탄께 기술과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투자를 요구한 것인데요."
내 너스레에 브루나이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군. 아주 좋아. 계획대로만 되면 석유 값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렇게 성공적인 설득이 끝나고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김응삼 대통령이 슬쩍 내게 윙크를 해보이며 다시 국왕과 이야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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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나이 국왕과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친 덕분일까.
나와 김응삼 대통령은 어느 순방국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대접을 받으며 남은 순방일정을 보냈다.
매 끼니 생전 처음 보는 식재료로 요리된 진귀한 음식들을 먹으며
국왕이 취미삼아 모았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비행기까지 구경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브루나이의 수도인 반다르스리브가완 시내를 국왕과 함께 오픈카로 한바퀴 도는 이벤트까지 치르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네 덕에 신기한 경험 잘했다. 고맙데이."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대통령님 덕분에 아세안 전역에 빠르게 진출할 수 있었는데요."
"나도 니 덕에 꽤 얻은게 많데이.
태국이나 다른 데는 미리 주고 받을 걸 생각해놔서 그리 감흥이 없었는데,
브루나이는 기대하지 않고 있던 기라 선물받은 느낌이다 아이가.
그냥 브루나이만 빼고 안 오기에 애매해서 왔던긴데.... 잘 되었지.
니가 왕을 만족시킨 덕에 석유와 천연가스 쿼터도 받고. 증권거래소 시스템도 은근슬쩍 팔아묵고. 애썼데이."
"감사합니다."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김응삼 대통령의 치하에 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창밖에 끊없이 펼쳐진 구름밭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로 동남아에 씨를 싹 뿌려놨으니 이젠 수확만 기다리면 되겠네. 한... 2년쯤 걸리려나 싹이 트려면?
그 사이 회수할 것 회수하고 다음을 준비해야겠지.'
내가 생각한 다음.
그것은 러시아로부터 불어닥칠 경제 한파.
러시아 모라토리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