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브루나이 (1)
플랫폼의 본질은 독점에 있다.
소위 생태계니 락 온(lock on) 효과니 하며 그럴 듯 하게 검은 의도를 숨기며 장사하지만,
실상은 대체 불가능한 독점적 지위를 활용하여 고객 소비의 배경을 모조리 자신의 제품으로 채워 넣는 것이 플랫폼 기업의 본질인 것이었다.
그리고 태준이 말한 '태국의 모든 재산, 사람을 장악하겠다'라는 일견 허황되어 보이는 주장은.
태준이 추구하는 플랫폼 기업으로서의 유니버스를 생각해본다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유니버스넷이라는 가상공간을 장악하고,
해당 가상공간을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인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네트워크라는 길목을 이용할 수 있는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장악하고,
그 하드웨어에 들어가는 부품까지도 장악한다는 기본 계획에 더해,
현실에 있는
신문, 라디오, TV방송으로 대표되는 언론,
음악, 만화, 소설등의 대중문화산업,
날씨와 같은 생활정보,
그에 더해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할 수 밖에 없는 소비까지 가상공간 내로 집어넣겠다는 태준의 계획은
태준이 살다온 미래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지만,
태준이 살고있는 현재에는 너무나 기묘한 발상들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런 기묘한 발상의 한 가운데에서,
그 기묘한 발상의 괴상하고 폭력적인 시작을 본 앤은 태준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태국에 투자하는 만큼 태준의 영향력도 커지겠죠. 하지만 함께 일하는 태국 왕실의 영향력도 덩달아 커지겠죠.
그럼 태국 국민들이 소위 '착취'당한 만큼 투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이건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인가요?"
오브라이언가 출신 엘리트 다운 날카로운 지적.
그 지적에 태준은 차분히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다시 또 역사 공부를 해야겠네요 우리."
"예?"
"소위 시민혁명이라 불리는 혁명들이 어떻게 일어났죠?"
"프랑스 대혁명 말인가요? 그야 구체제의...."
"그런 정치 외교학적 분석 말고 경제사회학적인 분석을 해보면?"
"... 잘 모르겠는데요? 불만이 쌓여서 그런거잖아요?"
앤의 말에 태준이 슬쩍 오오와다를 돌아봤지만 오오와다 역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일본인이라 더 잘 모르겠네요. 안보투쟁때나 전공투때나 저는 그 치들과는 안어울려서요."
그 말에 태준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설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산층의 수가 일정 수준 이상 늘어나면 시민 혁명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
"1688년 명예혁명. 귀족과 젠트리 계급의 이권이 커지며 이를 침해하는 제임스 2세를 몰아낸 사건.
1775년 미국 독립혁명. 미국에 정착한 신흥 사업가들이 영국의 부당한 과세에 저항한 사건.
1700년대 후반 프랑스 혁명. 소위 부르주아라 불리는 신흥 자본가들이 등장하면서 자신들 위에 있는 귀족을 친 사건.
전부 당시의 중간 계층의 권력과 힘, 그리고 절대적 머릿수가 늘어나며 일어났죠."
그 말에 앤이 반발하며 말했다.
"하지만 현대에는...!"
"프랑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60-80년대의 전 세계적 신좌파운동도 여기 들어갑니다.
아버지 세대가 1,2차 세계대전 내지는 각 국의 내전의 후유증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산업을 발전시켰고.
그렇게 중산층이 된 국가들에서 이런 혁명들이 일어났죠. 학생들을 중심으로.
왜 그런걸까요?"
".... 배가 불러서 그랬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아뇨. 중산층의 특성 때문입니다. 중산층에 올라선 스스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죠.
스스로 일해서 스스로 신분 상승을 이뤄냈으니, 당연히 사회의 급진적 변화보다는 평등한 기회 보장, 자유권 보장에 더 관심이 많죠.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타고 날 때부터 중산층에 속해 있었고, 중산층으로서 아버지 세대가 쥐어주는 온갖 혜택을 받으며 자라나죠.
그리고 그중 하나가 교육입니다. 특히 대학교육이죠. 현대에 들어선 이후 60-70년대의 신좌파 운동의 시작이 대학가였던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육을 받으며 철학적 사유와 이상론을 배운 사람들이 본인들이 선대의 희생으로 누린 것 보다 본인들이 누리지 못한 것에 관심을 가지며 사회 불만을 품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죠.
물론 그들이 누리지 못한 것들 역시 실은 마땅히 그들이 누려야 했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볼 수 있겠죠."
태준의 말에 앤이 벙찐 표정으로 멍하니 있자, 태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를 태국에 대입해 본다면? 지금의 태국 중산층들은 당연히 불만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경제력이 커지고, 그들이 누리는 교육수준 문화 수준이 지금 태국을 장악하고 있는 시노 타이 계의 하이쏘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면.
과연 이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쟤나 나나 지적 수준도 가진바 능력도 비슷한데, 왜 쟤는 부모 잘만나 잘 살고, 나는 왜 이모양 이 꼴인가. 이게 다 사회가 썩었기 때문이다.'라며 들고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앤이 말을 이었다.
"들고 일어난다고 해도 그 불길이 왕가로는 향하지 않을텐데요. 들어오시면서 보셨겠지만, 태국의 왕실 우상화 전략이 상당해서..."
"하지만 왕가도 압력을 받죠. 지금 라마 9세의 나이가 70을 바라보는데다
그 후임이 될 왕세자 와치랄롱꼰 역시 젊은 나이가 아닌데다 망나니로 유명하신 분이니 어떻게든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가진 것을 내놓을 수 밖에 없게 되겠죠.
그것이 권력이든... 혹은 돈이든."
태준의 말에 오오와다가 아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와치랄롱꼰... 그 사람이 전에 일본에 대놓고 자기 내연녀를 국빈대우해달라고 억지쓰다가 행패 부리고 갔던 사람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더더욱 회장님 뜻대로 되지 않을텐데요."
"제 예상대로 되지 않으면 더 좋지요. 억지쓰다가 전부 빼앗기고 해외로 쫒겨나면 남아있는 사업들은 전부 우리가 독식하게 될 테니까요."
태준의 말에 앤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우리까지 휘말리지 않아야 할텐데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사람을 버는 일을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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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준이 다음 순방지인 말레이시아, 싱가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돌며 태국에서와 비슷한 거래를 맺고 돌아다니는 동안 앤과 오오와다는 태준이 가는 곳마다 벌이는 사업들에 대한 백업을 하느라 갈려나갔다.
"말레이시아에도 공장 하나가 들어서네요?"
"문제는 말레이 정부의 요청에 따라 태국과의 분쟁지역에 입주를 해달라고 요청해온 모양이예요."
"다행히 그 쪽 부근에 태국 왕실 소유의 토지가 있으니까, 그 땅 임차하고 그 주변까지 싹 사들여서 대규모 단지로 조성하면 되겠어요. 캐란탄과 나라티왓 사이 국경지대에 조성하는 것으로...
동남아 평화를 명분으로 해당 지역의 다국적 공단 건설이라고 하면 양 국 정치인들도 좋다고 받아들이겠죠."
그렇게 오오와다가 해결책을 내놓고 다음 프로젝트 문서를 펼치자 앤이 슬쩍 오오와다가 밀어둔 서류를 가져가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출하국이 모호해지는데요?"
"반반씩 출하국 세팅해서 내보내면 되지요. 그 보다는 노동자 고용 문제가 더 걱정일 겁니다.
반반씩 한다고 해도 한 공장에 사이가 나쁜 두 나라 사람이 모여있는 셈이니까요."
"일단 오오와다씨가 여기 써 둔대로 캠퍼스는 하나로 쓰더라도 생산공장은 둘로 나눠 두면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이러면 내세운 명분이 좀 퇴색되겠지만... 운영상 편의 문제도 있으니."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은 뒤이어 기다리는 서류들을 뒤적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싱가폴 쪽은... 통신사만 들어가는 거니 걱정 없고... 베트남은 아예 공단 부지에 세제혜택도 준다고 했으니 패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 문제네요. 여긴 치안도 최악인데다, 섬이 너무 많아서 수도권에서 벗어나는 지역에서는 정착도 힘들겠어요."
"문제는 필리핀에서는 딸락을 인니정부에선 동칼리만탄을 밀고 있어서... 회장님도 그걸 받아주신 것도 문제고요."
앤의 지적에 오오와다는 이제는 본인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태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받아 주신 건 아닐겁니다."
"그야 그렇겠죠. 태국 전체를 먹어 치우려는 사람이 다른 나라라고 가만히 내버려 둘까요.
태준이 도덕적인 사람이라 다행이지... 다른 기업 오너들처럼 최악의 싸이코패스였다면 저는 어떻게든 그만 두고 도망쳤을 거예요."
.
..
...
그렇게 두 사람이 태준이 던져주는 일거리들을 해결하며 착착 일을 진행하고 있을 때, 태준은 순방일정의 마지막.
브루나이에 도착해 있었다.
"그간 경제인포럼이니 뭐니 하면서 사업을 잘 했제?"
"예. 대통령님께서 배려해주신 덕에 잘 했습니다."
"다른데는 그래도 그나마 말이 통하는 나라라 쉬웠을긴데... 여긴 그래 쉽게 일이 해결되진 않을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여긴 아수운게 없거든. 기름 펑펑나지, 인구도 땅도 작지. 그러다 보니 기름 판 돈을 전부 왕이 쥐고서는 국민들한테 현금공세로 독재를 유지하는 희안한 국가데이."
그 말에 태준은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수록 더 파고들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고?"
"기름이 언제까지 고유가겠습니까? 지금이야 뭐 아껴쓰지 않으면 없어진다 어쩐다 하지만... 사실 석유란게 알고보면 흔한 것 아닙니까?"
태준의 말에 유래없는 고유가 시대를 거쳐온 김응삼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석유가 흔해?"
"그럼요. 미국쪽만 가도 모래층과 섞여있는 셰일 오일이 있고, 바다에도 틈만나면 채산성이 없던 유전이 갑자기 개발되고 하지 않습니까?"
"북해유전 말하는거냐?"
"예. 심해에 있다고 그림의 떡이네 어쩌네 하던 것도 결국 캐내는 세상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언젠가는 못쓰는 기름떡인 셰일 오일도 채산성이 있을 만큼의 기술을 확보할 수도 있겠죠."
태준의 말에 김응삼 대통령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기사. 최근에 기름값이 안정세로 돌아서긴 했지."
"우리 입장에서는 안정세지만... 여기 브루나이 입장에선 하락세겠지요.
여하튼, 기술의 발전과 정치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는게 유가인데...
거기에만 의존하는 경제라면 아무리 이곳 브루나이의 국왕이 돈이 많아 걱정없이 산다고 해도, 늘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일겁니다. 파고들 여지는 충분하죠."
"하지만 여긴 대부분이 고소득자들 뿐이라 공장을 지을 수도 없을텐데?"
"대신 IT사업은 진행할 수 있지요. 똑똑한 사람들만 어떻게든 잡아둘 수 있으면 벌일 수 있는 사업이니 브루나이 입장에서도 분명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게 해서 브루나이랑 좀 더 친해지면 우리도 이란에만 의존하는 석유 수입선을 다각화 할 수 있으니 좋지만...
정치인... 그것도 독재자의 특성상 그런 변화를 달가워 할지 모르겠네."
그렇게 김응삼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태준은 볼게 없다며 베트남에서 싹 다 돌아가버린 재벌들의 자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자리가 비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자네야 이번 순방이 처음이니까. 보통 이런 소국까지는 경제인들이 잘 안오지. 나우루 같은 조세피난처에는 시키지 않아도 잘만 가더만. 쯧."
그렇게 김응삼 대통령과 가벼운 이야기를 마친 태준은 곧장 안내에 따라 김응삼 대통령과 함께 (주요 인사들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브루나이의 술탄인 하사날 볼키아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소."
말레이와의 합병과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배를 끝낸 브루나이의 영웅이자
국민들에게 세뱃돈과 함께 복지라는 복지는 모조리 퍼주는 인자한 아버지,
62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미친 계엄령을 유지하는 군사 독재자이자
취미가 오토바이 모으기와 비행기 모으기인 석유 재벌,
하사날 볼키아의 미소는 왠지 모르게 섬뜩하기 그지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응삼이오. 이쪽은 경제협력을 위해 나와 함께온 유니버스의 총수 김태준 회장이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태준입니다."
그렇게 섬뜩한 미소에 당당한 미소로 화답한 태준은 두 정상의 대화를 지켜보며 하사날을 설득할 말들을 두 사람의 대화 속 에서 주워담으며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될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