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태국출장 (2)
태국이라는 나라는 1930년대까지도 전제군주정을 채택한 나라였다.
아니 채택이라는 말보다는 그저 그렇게 존재해온 나라였다고 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로 치면 고대로 분류되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왕즉불 사상이 계속해서 그들의 군주정을 용인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태국 왕실의 몰락과 민주정의 시작은 1932년 대중들에게는 송크람이라 잘 알려진, 쁠랙 피분송크람의 쿠데타에 의해 시작되었다.
타이 민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민주주의를 들고 나타난 송크람의 쿠데타는 왕당파의 거센 반격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송크람의 주도하에 태국 최초의 헌법이 만들어지며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나 말이 입헌군주제 민주국가일 뿐.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애시당초 왕정에 대한 반발로 이뤄진 쿠데타였기에 송크람은 왕의 자리를 본인이 대신하길 원했고,
왕은 그저 그런 허수아비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켜줄 수단으로서만 존재하길 원했다.
그랬기에 당시 라마 7세(현 라마 9세의 아버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 떠밀리다시피 퇴위를 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송크람이 장악한 의회에서는 라마 7세의 장남 아난다를 라마 8세 (현 라마 9세의 형)로 추대하여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스위스에 박아두고는 제 멋대로 나라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왕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태국은 일본과 손을 잡고 추축국 대열에 합류,
나치 독일이 그러했듯 타이 민족의 생활권 운운하며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고 중국계 이주민들을 나치에서 유대인 다루듯 엄격하게 차별하며 국정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만 본다면 태국의 왕실은 말 그대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해야 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
라마 8세의 비극적인 죽음,
미국으로 배를 갈아탄 송크람의 재집권과 실각,
뒤이어 집권한 새로운 독재개발영웅 사릿 타나랏의 등장이라는 역사의 흐름은
형의 뒤를 이어 태국 국왕의 자리에 오른 라마 9세에게 엄청난 기회가 되었고,
라마 9세는 태국의 헌법상의 유명한 조문인 제 6조.
-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국왕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를 기반으로 다시금 정치계의 막후 실력자로 자리매김 하며 왕권을 되찾아 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현지 사정을 잘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한국 재벌들은 그저...
"태국 왕가가 돈이 많다고는 하는데... 그래 봐야 왕실이라 딱히 쓸데도 없는데 차라리 잘되었네. 김태준 회장같은 애송이가 상대하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 일만 보면 되겠어."
"왕가와 거래를 트는게 좋다고는 하던데... 그래 봐야 입헌군주제 왕가에서 뭐 할 수 있는게 있겠어?"
태준과 라마 9세의 독대에 대한 것을 폄하하기 바빴다.
물론.
그들의 그런 폄하는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서오게. 김태준 회장."
"이렇게 독대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지. 나야 말로 타이를 지켜준 영웅을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네. 그리 엎드려 있지말고 앉지."
그렇게 태준에게 자리를 권한 라마 9세는 황금으로 치장된 탁자에 놓인 밀크티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자네 쪽에서 우리 총리에게 제안한 선물은 잘 받아보았네."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족했지. 만족했고 말고. 철도 노선을 활용한 초고속 인터넷 망 부설이라니.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라 생각했네."
"겸사겸사 궤간도 협궤에서 표준궤고 개궤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궤간을 유지하면 지속적으로 일본의 철도 기업에 돈을 뜯기지만, 전 세계 표준인 표준궤로 개궤를 한다면 한국은 물론이고 다른 국가들의 철도 기업들로 선택지가 늘어나는 만큼 태국에도 큰 이득이 될겁니다."
"거기다 공장까지 짓겠다고?"
"예. PC, 핸드폰 조립공장입니다. 여기서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으로 수출할 물량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 말에 라마 9세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부지들을 지방 왕실 사유지가 있는 곳으로 하겠다고 했다지?"
"예. 태국에서 사업하려면 왕실과 파트너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니까요."
"좋은 발상이야.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그렇게 치하의 말을 들은 태준은 조심스럽게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돌려 달작지근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는 제가 제 모국... 그러니까 대한민국을 통해 드리는 선물이고... 지금부터는 제 개인적인 선물을 대왕께 드리고자 합니다."
"자네의 개인적인 선물...?"
그 말에 라마 9세가 흥미롭다는 듯 태준을 바라보며 묻자 태준이 씩 웃으며 품에서 세개의 종이봉투를 꺼내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라마 9세에게 바치듯 넘기며 말을 이었다.
"여기 왕실과 함께하고 싶은 사업을 몇 종류 추려와 봤습니다."
그 봉투를 받아든 라마 9세는 찬찬히 하나씩 봉투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흐음... 유니버스넷의 쇼핑플래닛이 뭔가?"
"제가 가진 인터넷 업체에서 서비스하는 쇼핑서비스 입니다."
"이를 통해 내가 가진 쇼핑몰을 입점시킨다?"
"예. 그리고 그를 통해 태국 전역으로 판매 범위를 확대하는 겁니다. 현재는 대도시 중심으로만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를 인터넷이라는 통신기술로 극복하는 것이지요."
태준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다음 봉투를 열어 제안서를 확인한 라마 9세는 다시 한 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건 또 뭔가? 영상물 거래라니?"
"이 역시 유니버스넷을 통한 서비스입니다. 태국 국민들을 위한 영상물을 제작하고 이를 유니버스 넷에 올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잇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편하게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는 서비스지요.
마침 대왕께선 방송사도 가지고 계시니, 이들 방송사들이 제작한 각종 영상물들의 판권을 저희에게 파시면 저희가 이를 가지고 서비스를 해보고자 합니다."
"흐음... 한 번 찍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걸 팔아 다시 돈을 마련한다.... 이건 꽤 마음에 드는 군."
그렇게 호감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은 라마 9세는 마지막 남은 봉투를 열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제 회심의 역작입니다."
"진짜로 이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물론 정확히는 태국 내에서만 서비스가 가능한 것이지만요."
"CP그룹에서도 이런 제안은 한 적이 없는데 말이지...."
그 말에 태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투자 비용 대비 채산성이 낮은 사업이니까요. 얼핏 보면 손해만 보는 사업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왕실로서는 매우 좋은 제안이지."
"그렇습니다. 지금도 대왕의 치세를 칭송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만... 민심이라는 것이 워낙 변덕스러운 것이지 않습니까.
이를 관리하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지요. 억지로 통제하기 보다 아예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게 최선 아니겠습니까?"
태준의 말에 라마 9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네. 이 세가지 전부 다 함께하지. 특히 마지막은 정말 마음에 드는 군. 사실상 모든 돈을 다 왕실이 다시 관리할 수 있게 되겠어.... 어떻게 합자기업을 하나 내주면 되겠나?"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성심을 다해 일을 해보겠습니다. 규제도 좀 치워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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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9세와의 거래를 마치고 온 내가 해당 사항을 실무자들은 앤과 오오와다에게 전하자,
"... 세번째 걸 진짜 라마 9세가 받았다구요?"
"예. 덥석 잘만 물더군요."
"거 참... 아무리 돈이 좋다고는 하지만... 내 나라 왕이 아닌게 천만 다행이네요."
앤은 질색한 듯 말을 이었고,
오오와다는...
"그래도 이걸로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요. 왕실과 동업관계가 되었으니 사실상 태국 쪽은 걱정 없이 장악이 가능할테니까요."
"예. 태국만 잡으면 동남아 전역은... 다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죠. 동남아에서는 달러 다음 바트니까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앤이 슬쩍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문제는 이미지네요. 특히 선진국들에서 분명 태클을 걸고 넘어질텐데... 이걸 어떻게 봐야 할지."
"태클 걸 일은 없을 겁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상품권업이고, 그 상품권의 발행 주체는 왕실이니까요. 우리는 그저 운영을 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것에 지나지 않죠."
내가 제안한 세번째 사업.
그것은 상품권 사업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그 상품권이라는게 사실상 왕실이 소유한 모든 기업체는 물론이고 태국 유니버스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돈 같은 개념이잖아요.
심지어 그 돈으로 결제를 하면 할인도 해준다면서요.
그 말인 즉, 태국의 실질적인 돈을 태준이 발행하기로 한 상품권으로 대체하겠다는 말과 같은 말인데... 이걸 가만히 두고 볼리가 있나요?
사실상의 경제적 침략이잖아요!"
하지만 태국의 현실에서.
왕실이 보유한 기업이 태국 국민 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사실상의 왕실 중심의 화폐개혁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왕실을 등에 업고 이런 험한 일을 해주는 나는....
태국 바트화를 한 방에 대량으로 당겨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쁘게만 볼 건 또 아니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은행업이니까요. 변칙적인 수단을 동원하긴 했지만. 상품권도 사실상 예금증서라고 생각하면...."
"말이 좋아 은행업이죠.
이건 사실상 돈을 미리 잔뜩 받아두고 돈 놀이를 하겠다는 생각인거잖아요?
너무 잔인한 방법이라고요."
앤의 반발에 나는 속으로 미래의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부터 시작해서,
각종 플랫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업들이 자사의 제품을 이자로 지급하며 돈을 자사의 포인트로 바꿔주는 사업을 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이는 당연한 것이지 부도덕한 것이 아니었다.
'플랫폼 기업이라는게 원래 그런 법이니까.'
그런 미래를 살다 온 나와 아직 그런 미래를 경험하지 못한 앤의 보여주는 인식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앤의 반발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결코 일반 국민이 손해보는 일은 없을거예요."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요?"
"제대로만 돌아가면 그렇게 번 돈이 다시 태국 시장에 재투자 될테니까요. 그렇게 규모가 커지면 커질 수록, 태국 사람들도 더 나은 삶을 살게 될테니까요."
"태국 왕실이 그럴리가 없잖아요! 지금도 매해 지니계수는 증가하는 시장인데... 여기에 태준까지 맞장구를 쳐주면 태국 국민들은..."
앤의 지적은 온당했다.
태국 왕실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는 태국 왕실이 아니죠. 기업인이지."
"기업인이니까..."
이어지는 앤의 반발에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업인이니까. 돈보다 사람을 벌어야죠. 돈은 사람을 버는 수단일 뿐이니까요. 저는 태국 시장을 완전히 제 손에 넣을 생각이예요. 재산부터 사람까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