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쓸어담는 재벌가 서자-95화 (95/200)

095. 태국출장 (1)

앤과 오오와다의 보고.

아니, 고민을 다 들은 태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별 것 아니네요."

손의정의 노조설립 소식부터, 드러켄밀러의 이직소식.

거기에 태국에서의 답답한 상황을 들었음에도 태준은 여전히 별다른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답할 뿐이었다.

"회장님.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동남아 전반의 경제 여건이 그렇지만... 태국은 다른 국가보다 더욱 특수한 상황인지라..."

"맞아요, 태준. 사실상 국가의 경제를 왕실이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예요.

공식 통계에서 국가 경제의 10%를 장악하고 있다는건...

밝혀지지 않은 음성적인 경제규모까지 고려하면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국가구요. 태국 왕실이 군부 쿠데타에도 무사할 수 있는 기반에는 돈의 힘이 있을테니까요.

그 뿐만이면 어떻게든 뚫어볼 여지가 있는데 태국은 말 그대로 왕실과 군부가 한 몸인데다, 언론사까지도 태국 왕실이 장악하고 있어요.

우리가 하려는 산업중 엔터쪽은 특히 더 태국 왕실에게 있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 말에 태준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앤과 오오와다가 그간 만들어둔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어째서죠?"

앤이 참지 못하고 여유롭게 서류를 뒤적거리는 태준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되묻자 태준이 슬쩍 앤을 보며 말을 이었다.

"태국 왕실에게 우리만이 줄 수 있는게 있으니까요."

"예?"

"태국은 지리적으로도 상당히 길쭉한 나라죠. 국토 자체가 균형발전을 할 수 없는 구조라는 겁니다. 산지도 어마어마하게 많구요.

자연히 최악의 빈부격차는 물론이고 기반 시설 역시 주요 대도시에만 집중되어 있지요.

그건 태국 왕실의 사업 영역과 시노 타이(중국계 태국인) 계열의 대표적인 대기업 중 하나인 CP(Charoen Pokphand)그룹의 사업 영역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전부 대도시 중심의 산업. 그나마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산업은 CP쪽의 뿌리인 종묘사업 뿐이예요.

우리는 이 틈을 파고들면 됩니다.

CP쪽에서도 통신사업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으니 망도 얼마 깔리지 않았을 거고

인터넷도 아직 몇몇 기관에만 동축으로 깔려있는 수준이니 설득은 쉬울 겁니다."

태준의 말에 오오와다가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손을 들고 물어왔다.

"하지만 왕실이 이익을 나누려 하지 않을텐데요. 자신들이 직접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오오와다의 질문에 태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왕실은 직접 할 마음이 없을 겁니다. 통신망을 깔고, 산업단지를 조성해서 왕실의 비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너무 느리니까요."

"그게 무슨..."

"생각해보세요. 통신 사업이라는 것이 흑자전환을 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우리야 유니버스넷이 있으니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를 깔아서 판도 자체를 우리쪽으로 가져오려 하는것이지만,

태국왕실은 그런 유인이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태국 왕실이 가진 기업들을 보면..."

태준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앤은 자신이 발로 뛰며 조사한 내용들을 떠올리며 혼잣말에 가까운 맞장구를 쳤다.

"시암커머스뱅크, 시암 시멘트 그룹, 타이의료원...등이 주요 기업들이죠."

"예. 전부 단기투자에 유리하거나 근대화 과정에 필수적인 산업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료원만 보더라도 외국인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의료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지요. 이 돈이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간판이야 타이의료원으로 달고 있지만, 전부 영리병원인데다 타이의료원이 들어선 부지들을 보면 전부..."

"국왕 사유지..."

"예. 실제로 태국이 공영으로 운영하는 국공립의료원의 경우 타이의료원이라는 같은 간판을 달았어도 전혀 운영 양상이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인데 거액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데다, 장기간에 걸친 유지보수비용을 감당하고 난 뒤, 간신히 흑자 전환할 통신사업이나 공단에 투자를 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왕정의 평화는 태국 국민들의 밑도 끝도 없는 존경과 정치권에 살포하는 돈으로 만들어진 것인데요.

당장 나갈 돈이 많은 태국 왕실에서 그걸 감당하려 할까요?"

태준의 해설에 그제야 태국의 경제지형을 이해한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서... CP그룹이 나섰던 거군요."

"예. CP그룹은 그 투자를 버틸만 한 체력이 되는데다 국가에 필요한 사업이니 태국에서 먹고 살려면 손해를 보더라도 들어갈 필요가 있으니 하는 것이지요.

그 마저도 대기업 답게 대도시 중심으로만 하면서 생색이나 내는 수준이니. 우리 제안을 받으면 외려 태국 측, 정확히는 왕실에서 좋아라 할 겁니다.

정치적으로 써먹기도 좋은 소재니까요."

그리고 그런 태준의 설명이 끝이 나자, 오오와다와 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바로 기안대로 시행하면 될까요?"

"예. 일단 가볍게 오브라이언 사장이 담당하는 엔터분야부터 인수에 들어가세요. 상대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게 아니라면 다 들어주는 방식으로 해서 인수하면 됩니다.

아 그리고 마인드믹스. 거기 꽤 괜찮은 광고를 많이 찍더군요. 잘 찾아냈어요. 앤.

거기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인수하시고요."

이어진 태준의 지시에 앤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리랄 게 있을까요? 회장님 지갑에 쌓인 돈이 얼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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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이 태국에 간 사이 손의정은 노조와 관련된 계략을 꾸미는 와중에도 책잡히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 이번 유니버스 PC 판매량 집계는 나왔습니까?"

"예. 여전히 판매량에서는 도시바가 압도적이지만, 일부 연구 기관 및 외자계 기업측에서 일본 자체 규격 PC가 아닌 국제 표준 PC를 도입하기 위해 사들인 물량이 만만치 않게 많아서 유의미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작년에 발매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95가 시장의 평가가 좋았던 지라 표준이 그 쪽으로 옮겨가는 모양새이니 조금 더 지켜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손의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트워크 관련 서비스는 잘 되고 있는데... 문제는 역시 기기 보급이군요."

"예. 아무래도 관동과 관서의 전기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기기 없이 이에 대응하는 도시바쪽 제품들이 PC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이엔드 제품군에서 우리 쪽 제품으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지만... 일반 소비층까지의 확대는 아직은 요원한게 현실이라...."

"하이엔드급은 돈이 안되죠."

"예. 아시다시피 소위 명품급이라 불리는 고성능, 고가격대 제품군은 일부 계층에서만 소비되고 끝이 나서 규모의 경제를 일으키기 쉽지 않은게 문제입니다."

그 말에 손의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핸드폰은 어떻습니까?"

"핸드폰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QULAB에서 일본 전용 커스텀을 만들어줘서 그나마 5%대로 늘어났지만, 그 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일단은 유니버스넷 자체 이메일과 도쿄디지털셀 이메일이 연동되게 하고 이를 기반으로한 커스텀 제품을 출시해 금융권 사람들 사이에서 쓰기 시작한게 전부인 수준입니다."

"SMS 관련 협상은 여전히 난항입니까?"

"예. 국제 표준규격임에도 받아들이려는 통신사가 없어서... 현재로서는 SMS를 지원하는 통신사도 우리 뿐인지라..."

손의정은 이어진 보고에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메일 프로토콜도 다르고, SMS는 지원을 안하고... 거 참. 이 모양 이 꼴인데도 어찌저찌 유니버스넷이 안착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군요."

"유니버스넷은 메일이 무료니까요. 이메일을 SMS처럼 쓰는 일본 사람들로서는 무료로 SMS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QULAB 내부의 쪽지 시스템을 개편해서 미니메일이라는 이름으로 커스텀 한 것이지 않습니까?"

"예. 그 마저도 안했다면, 유니버스넷은 아마 일본 내에선 그저 그런 검색사이트로만 남았겠지요."

그 말에 손의정은 한숨을 내쉬며 적어 내린 노트를 보고한 비서에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작성해서 QULAB측에 발주하세요."

"QULAB측이 받아줄지 모르겠네요. 지난 번에도 독자규격을 일일히 지원하는게 무리라며 QULAB소장이 더는 받기 힘들다고 말했었는데요."

"회장님 허가 받았다고 하면 받아 줄겁니다."

그렇게 비서가 손의정이 적어준 노트를 들고 나가자 손의정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일본 시장에서 점유율 20%이상이라.... 실적은 실적대로 필요하고, 정치력은 정치력대로 필요하고.... 갑갑하구만."

그렇게 손의정의 혼잣말이 방안을 울리자,

손의정의 눈 앞에 미소짓는 오오와다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장님의 직속이 되면 그럴 틈도 없거든요. 바빠서."

그 미소짓는 오오와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린 손의정은

"난 오오와다 사장처럼 회장님의 노예로 살진 않겠어. 어떻게든 독립을 하고야 만다...."

굳은 표정으로 굳은 결의를 다지며 다시금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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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으로 건너와 앤과 오오와다에게 보고를 받고 해결책을 제시한 뒤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간 나는 경제인 모임을 기다리며 김응삼 대통령의 들러리를 서며 돌아다녔다.

"이쪽은 유니버스의 김태준 회장입니다."

"반갑소."

그렇게 태국 총리를 시작으로, 태국의 관료들을 만나며 김응삼의 액세서리로 활동하며 이사람 저사람 만나기를 수차례.

"라마 9세십니다. 모두 예를 갖춰주십시오."

드디어 김응삼이 억지를 쓰다시피 해서 간신히 마련한 한태경제인포럼 자리에서

태국의 국왕이자 태국 최고의 재벌이라 할 수 있는 라마 9세, 푸미폰 국왕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 주위의 모든 재벌 총수들이 자리에 일어나 박수를 치던 그때.

나는 곧장 다른 태국의 경제인들이 하는 것과 같이 무릎을 꿇고 슬쩍 라마 9세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 모습이 기행으로 비춰진 것인지 다른 재벌 총수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지켜보던 그 때,

사회자가 다시 한 번 안내멘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참석하신 모든 경제인 여러분은 라마 9세께 예를 갖춰주시기 바랍니다."

그 멘트에 그제야 내가 한 행동이 태국 전통의 예법이라는 것을 눈치챈 몇몇 기업 총수들이 무릎을 꿇었고, 이내 모두가 무릎을 꿇자 라마 9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외국친구들이라 그런지 예법을 아는 자가 드물구만. 동방예의지국이라 해서 기대했는데 말이지."

독일 억양과 태국 특유의 성조가 느껴지는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말한 국왕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옆에 무릎을 꿇은채 앉아있는(사실상 거의 엎드린 수준이었다.) 추밀원장에게 뭐라 말을 했다.

그러자 추밀원장이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은 채 움직여....

"대왕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내게 다가와 영어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은 주변 경제인들이 놀란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었지. 그 나라에 왔으면 일단은 존중하는 척이라도 해야지...뻣대고 있으니 그 모양이지. 쯧쯧.'

나는 이미 예상을 한 것이었기에 평정심을 유지한채 추밀원장을 따라 무릎을 꿇은 채 라마 9세를 알현하기 위해 움직였다.

밖에서 보기에는 꽤나 모양이 빠지는 모습으로 비춰지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이게 정상이었기에,

또 이 나라의 헌법에서조차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이렇게 하길 요구했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저 양반이 내게 줄게 많단 말이지.'

그렇게 속내를 감춘채 겸손을 가장하며

최대한 공손한 표정과 행동으로

라마 9세의 앞에 도착해 무릎을 꿇은채 앉게 된 나는 곧장 고개를 더 숙이며 국왕의 발 높이 정도에 내 머리를 위치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내 머리가 아래로 내려가자....

"하하. 그래도 여기 제대로 예법을 배운자가 있군 그래."

라마 9세가 만족스럽게 웃어보이고는...

"여기 이 친구 빼고 다른 친구들은 여기 앞에 불러 사진만 찍고 다 내보내지.

어차피 경제인포럼인데... 경제인들끼리 이야기 하면 되지 않은가?

안 그런가, 추밀원장?"

"예. 그럼 유니버스 회장만 따로 궁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그럼 나는 사진만 찍고 먼저 가있겠네. 자격이 있는 이 친구는... 추밀원장 자네 차에 태워 데려오고."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놀라 나자빠질 만한 파행적인 말을 던졌다.

일부러 영어를 쓰며 말한 것이 누가 봐도 일부러 들으라는 듯 한 태도였으나....

여기 모인 날고 긴다는 재벌총수들 중 그 누구도 불만 섞인 표정 하나 내보일 수 없었다.

그렇게 넋을 잃어버린 다른 한국 재벌 총수와 사장들이 우물쭈물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고 빠지는 동안.

'성공이군.'

나는 죽상이 된 재벌 총수들 사이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는...

"따라오시죠. 대왕께서 궁에서 기다리십니다. 궁까지는 차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추밀원장의 안내에 따라 곧장 궁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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