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남방정책 (6)
"생산성 혁신과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기업인을 대상으로 작년부터 개편되어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한 신경영혁신대상은..."
국무총리의 인사와 함께 시작된 태준의 금탑산업훈장 수여식은 미국의 MB(Malcolm Baldrige)상과 일본의 JQA(Japan Quality Assurance)을 모티브로 개편된 신경영혁신 대상에서 이뤄졌다.
각 계 각 층의 기업인들이 자리한 행사.... 여야 했지만,
얼마전 있었던 금융전쟁의 후폭풍으로 많은 대기업들이 참가하지 않은데다,
그 연혁마저 개편 이후 확 짧아진 덕에 일부 중소기업들과 금탑산업훈장의 당사자인 태준외에는 이렇다할 관객이 없었다.
"... 이번에는 사장단 조차 보내지 않다니... 전경련에서 회장님을 진짜 곱게 보진 않는 모양이네요."
"다른 사람 상 받는데 들러리 설 마음은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많지만 화려하진 않은 시상식을 본 민영이 슬쩍 불만을 제기했지만, 태준은 그저 희미하게 웃어보이며 가볍게 넘기듯 말할 뿐이었다.
"어차피 객들이 있던 없던 제가 상을 받는 것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거기다...."
말을 흘리며 슬쩍 뒤를 돌아본 태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관객은 아니어도 나팔수들은 이미 많이 깔아 뒀으니까요."
"경제지 기자들 말씀인가요?"
"그들도 그들이지만... 이번에는 연예부 기자들이 열심히 일해줄 겁니다."
그렇게 태준과 민영이 속닥거리는 사이 행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드디어 태준의 차례가 왔다.
"마지막으로 금탑산업훈장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김태준 유니버스 회장께서는 단상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태준이 단상위에 올라서자....
"음?"
"저게 뭐야?"
행사에 참여한 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훈장을 하나 달고 있잖아?"
"아니지, 주머니 위에 약장도 두개나 달고 있잖아. 김태준 회장 군 출신이었나?"
"그건 아닌 듯 싶은데..."
그렇게 술렁거림과 함께 포장증과 함께 대수로 된 금탑 산업훈장을 단 태준은 단상위 마이크에 서 연설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최고의 혁신을 지향하며 유니버스를 세운지 햇수로 8년차에 영광스러운 금탑산업훈장을 받게되어 감회가 새롭기 그지 없습니다.
QULAB을 처음 세우고, CDMA기술 개발의 공로로 과학기술훈장 진보장을 받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군요."
그렇게 태준의 딱딱한 연설 속에 참석자들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 풀리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곤소곤 태준의 연설을 배경음 삼아 저들끼리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 저제 과학기술훈장 진보장이구만."
"부장으로 달고 나온걸 보니 급은 좀 낮은 거겠어."
"급이 중요한가. 남들은 평생 하나 타기도 힘든 훈장을 두 개씩이나 탄게 대단한거지."
"그리치면 김태준 회장이 벌어들인 돈이 더 대단한 것 아닌가? 그나저나... 저 위에 약장 두 개는 그럼 뭐지...?"
그렇게 대중들의 반응을 즐기며 연설을 마친 태준은 이어진 포토타임에서도 훈장과 관련된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달고 계신 약장에 대해서 질문드리겠습니다."
"아, 약장은 적십자사에서 받은 헌혈유공장과 회원유공장입니다."
"그럼 훈장이 아닌데 어째서 이번 행사에 차고 오셨는지..."
"명예로운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만큼 이 자리를 빌어 헌혈에 대한 관심제고를 위해 차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전에 기획된 질문들과 함께 태준의 기행, 거기에 더해 연예부 기자들에 의해 화려하게 찍힌 태준의 사진은 고스란히 '기사'라는 이름으로 일간지를 비롯한 각 경제지, 심지어 스포츠 신문에 이르기 까지 각종 매체를 타고 퍼져나갔고,
이들 신문의 기사를 서비스하는 유니버스넷에도 대대적으로 올라오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유니버스 김태준 회장. 금탑산업훈장 수훈.
- 금탑산업훈장의 주인공 김태준 회장의 기행, '헌혈에 대한 관심 부탁해'
- 모델 포스 넘치는 회장님, 훈장 차고 있는 모습도 멋있네
- [신경영혁신대상] 김태준 회장이 차고나온 훈장과 약장. 무엇이 있을까?
- 유니버스 김태준 회장을 통해 알아보는 올바른 훈장 패용 방법
- 헌혈로도 훈장을 받을 수 있다? 김태준 회장이 차고 나온 헌혈유공장이란?
- 대한적십자사, 적십자 회원 김태준 유니버스 회장의 봉사에 감사. 봉사장 추가 수여 방안 검토중.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획한 태준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올라온 신문 기사들을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때요? 이 정도면 안 온 대기업 총수들이 약 오를만 한가요?"
"확실히.. 연예부 기자들이 제목 뽑는 실력이 상당하네요."
"그도 그렇지만, 초장부터 유니버스넷에 올릴 걸 감안해서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가 늘어서 더 그럴거예요.
클릭 수가 곧 돈이 되니까요. 여기 '[포토] 모델 출신 회장님의 화려한 자태'라는 제목으로 사진만 올려놓은 기자들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오죠."
"약간 경박스럽기는 한데... 이 정도면 회장님 목표는 초과달성한 셈이네요."
민영의 말에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슈몰이에는 성공했으니 이제 이 이슈를 그대로 동남아 순방까지 끌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기엔 텀이 좀 긴편인데요."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둔게 있죠."
그렇게 태준이 씩 웃으며 내민 것은 다름 아닌....
"광고... 모델 계약서? 모델 김태준? 설마..."
"예. 유니버스 전 제품은 물론이고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 까지 전부 이미 다 잡아놓은 상태입니다. 거기에 카이스트 학내 홍보대사도 맡았구요."
"이러면 너무... 격의 없어 보일텐데요."
민영의 말에 태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라디오의 발명 이후 왕도 광대가 되는 세상인데... 기업인인 제가 광대짓을 못할 건 또 어디있겠어요.
일단 유명해져서 지지자들을 만드는 것. 그게 인터넷 세상의 새로운 문법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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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태준이 소위 팬덤 장사를 위해 밑밥을 깔며 자신의 유명세를 공고히 하는 동안,
타케미치의 부추김과 본인의 욕망에 휘말리듯 KTJC의 주주가 된 손의정은 내부에서 태준의 영향력을 지우기 위해 온갖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 노조가 없군요."
그 첫번째 방법이 바로 자신의 말을 들어줄 친위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일본의 기업은 전통적으로 노조가 없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노조가 없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는데,
손의정은 이 부분을 파고 들어 자신의 스피커가 되어줄 '어용 노조'를 세우고 사주인 태준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한 것이었다.
"무노조 경영은 글로벌 스탠다드와 한참이나 동 떨어져 있는 한심한 경영방침입니다.
이에 저희 KTJC-J에서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노조설립을 지원하고 우리 사원분들의 노동권 향상에 기여하는....."
그렇게 번지르르한 말과 함께 어용노조를 세운 손의정은 서서히 노조 가입자를 늘리며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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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태준에게 크게 당한 것도 모자라 손의정마저 빠져버린 퀀텀펀드에서도 상황을 역전시킬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 지금 받는 연봉의 두 배. 거기에 직급 역시 PM으로. 어떤가? 미스터 드러켄밀러. 아, 거기에 퀀텀펀드의 주식까지 스톡옵션으로 주지."
그 카드의 정체는 바로 태준이 자신들에게서 뺏어간 '스탠리 드러켄밀러'였다.
원 역사에서도, 그리고 태준이 뒤죽박죽 바꿔놓은 현 역사에서도 소위 '파운드화 공격'이라는 환 투기 전략을 세운 최초의 펀드 매니저인 그를 되찾아 와 다시 역습을 가할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이를 위해 퀀텀펀드 측에서는 스탠리에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본급과 함께 투자업계의 꽃이자 모든 펀드 매니저들이 선망해 마지 않는 PM(포트폴리오 매니저) 직급을 제안함과 동시에 스톡옵션으로 퀀텀펀드의 주식까지 주겠다는 대출혈을 감수했다.
그렇게 흘러나온 퀀텀펀드의 피는 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들어진 꿀과 같은 것이었기에...
"... 이직한지 얼마 안됬는데..."
"우리 세계에서 저니맨이 흠이던가? 차라리 훈장에 가까운 일이지."
"그건 그렇죠. 좋습니다."
그 달달한 돈의 향기에 취한 스탠리는 곧바로 태준의 품을 떠나 퀀텀펀드의 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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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준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뚫려나가기 시작한 구멍들을 뒤늦게 보고받은 태준은....
"음.. 잘됬네요. 안 그래도 드러켄밀러는 더 쓸 데도 없으니 사고치기 전에 슬슬 정리하려고 했는데.
손의정 사장 건은 또 다른 노조 설립으로 막아보죠. 사내 라인을 손의정 사장쪽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난감한 기색 하나 없이 싱긋 웃으며 가볍게 답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태준의 생각대로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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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의 오더를 잘 수행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와있던 태국팀은 의외의 복병에 난감해 하고 있었다.
"잘 되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일본하고는 전혀 달라서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네요."
그들이 마주한 복병.
그것은 다름 아닌 태국의 왕실이었다.
"한번도 침략을 당하지 않았다는 위상에 군부 쿠데타에서도 조율자로서 활동했다는 정치적 입지... 무엇보다 국왕자산관리국 소유의 기업들까지... 사실상 이건 태국이라는 나라가 일종의 기업국가라고 밖에는...."
"일본의 허수아비 왕실하고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라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거기다 화예(중국혈통을 가졌으나 중국의 정체성은 가지지 않은 중화권 이민자들)들이 쥐고 있는 경제권역까지 뚫어야 하는 판이니... 쉽지 않네요."
"말레이시아가 싱가폴을 강제 독립시킨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죠."
앤과 오오와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
태국의 왕실은 여타 다른 입헌 군주제 왕실과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헌법 아래 통제당해야 하는 왕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마 5세의 경우 미래 한국에서 유행할 '영구까임방지권'이라는 말에 걸맞은 '제국주의 침탈'을 막아낸 국민적 영웅이었고,
현직 라마 9세의 경우에는 태국 근대화 과정에서 사재를 털어 회사를 세우고 계획경제를 주도한 덕분에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위상을 가짐과 동시에
몇 번이고 반복된 쿠데타에서도 왕실의 위상을 지켜낸 정치계의 거두로서
태국에서 불가침의 성역을 보장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요 강대국과 선진국의 왕실보다 더 큰 힘과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힘과 입지로 태국 왕실은 태국의 경제력의 10%이상을 독점하고 있었고,
그 마저도 추산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불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었기에
이 틈을 외부인인 KTJC가 파고들기에는 역부족일 수 밖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단 회장님의 태국에서의 이미지가 딱히 나쁘진 않다는 겁니다.
공식적으로 태국을 공격한 것은 퀀텀펀드이고, 회장님은 이를 막아내기 위해 싸운 한국의 투사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한가지 희망은 있었다.
오오와다가 지적한 대로,
일전 금융전쟁에서 태준이 행한 언론 플레이 덕분에 태국 내에서 태준은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서구 금융자본의 침탈에 함께 싸워준 동지라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사실은 약간 다르지만.. 일단은 그렇게 알려져 있기는 하죠."
"이를 바탕으로 왕실과 접촉해서 합자기업으로 들어간다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랬다가는 외려 태준의 이미지가 망쳐질 수도 있어서...."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태국의 국왕 라마 9세의 경우 본인 스스로는 성군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안정과 발전을 위해 택했던 군부 쿠데타의 승인은
서구권을 중심으로 세워진 '민주주의'라는 국제 가치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태준이 여기서 국왕과 손 잡고 사업을 진행한다면,
그 자체로 군부독재와 전근대적인 왕정체제를 긍정하는 기업인으로 서구권 사회에 비춰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이들의 이런 걱정은 이미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다국적기업체를 완성한 업체들이 거쳐온 것이었지만,
이제 막 다국적기업 체제를 굳혀가는 KTJC의 멤버들에게는 무엇하나 결정하기 어려운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조사와 고민, 그리고 해결방안등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잘 들 지냈습니까?"
태준이 김응삼 대통령과 함께 태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