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쓸어담는 재벌가 서자-90화 (90/200)

090. 남방정책 (2)

태준이 말한 동남아시아 진출은 말 그대로 '선의'에 의한 것 만은 아니었다.

물론 선의의 영역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태준 스스로가 거대 기업의 수장이었기에,

그리고 미래를 살다온 미래인이었기에,

그 어떤 계산도 없이 순수한 선의만으로 동남아시아 진출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태준을 둘러싼 상황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의만 가지고 동남아시아에 진출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 그렇겠죠."

"우선... 동남아시아에 대한 시장 선점.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만 합쳐도 96년 기준 1억 6천만명 정도입니다. 거기에 필리핀까지 더해지면 2억이 넘는 인구죠."

태준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첫번째 이유는 가장 뻔하면서도 핵심적인 이유인 시장선점에 있었다.

동남아지역의 인구는 태준이 알고 있던 미래 기준으로 5억까지 성장하는 대규모 시장인 만큼 그 지역을 먼저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동남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대규모 화교자본과 일본 자본이 이번 전쟁에서 피난을 떠났으니 우리로서는 지금이 기회인거죠."

"참 알뜰히도 써먹네요. 전쟁 후 폐허가 된 땅을...."

"이미 결과가 확정되어 버린 일이니, 확실하게 써먹어야죠. 그리고 두 번째 이유라면 역시 싼 인건비와 글로벌 밸류 체인 확보가 있겠죠?"

"글로벌 밸류 체인요? 그게 뭔가요?"

"원료는 미중일 삼국에서 들여오고, 핵심 부품인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계열은 한국에서 생산하고,

그 부품으로 만드는 최종 생산품은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생산한다고 생각하면 편해요. 생산 단계에서부터 무역이 들어가는 셈이죠."

두 번째 이유로는 글로벌 밸류 체인. 소위 GVC의 구축을 이유로 든 태준은 가볍게 펜을 꺼내 개요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경우에는 QULAB이 연구개발과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죠. 특허 홀딩스이기도 하고."

"그렇죠?"

"그럼 QULAB이 위치한 한국과 미국이 기술 공급을 하는 첫번째 체인이 되겠죠. 거기에 두 번째. 반도체나 핵심 부품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원자재가 필요하겠군요."

"예. 그 원자재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주요 개도국에게서 받아옵니다. 아, 호주도 포함될 수 있겠군요."

"그게 두번째 체인인가요?"

"예. 이렇게 1번 체인과 2번 체인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 기술과 원자재는... 중간재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등의 핵심 기술로 전환이 되고..."

"그게 세번째 체인이군요."

"예. 그 핵심부품들을 들고 그대로 다시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로 가서 최종 생산품을 생산해서 각 소비시장에 내다팔면?"

"생산 단가가 내려간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오프쇼어링을 통한 인건비 절감효과가 크니까요. 국가단위의 아웃소싱인 셈이죠."

그렇게 태준의 계획을 듣던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 좋은데... 한국이 좋아라 하겠어요? 자국 시장 지킨다고 아직 대중문화 개방도 안하고 버티고 있는데...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불이익이나 안주면 다행일거 같은데요.

러스트 벨트(미국 오대호 인근의 제조업 공업지대 였던 곳)가 어떻게 망했는지 빤히 본 한국이 퍽이나 그걸 승인해주겠네요."

그 말에 태준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옮길 건 또 아니니까요. 한국 시장, 그리고 일본 시장에 팔릴 하이엔드급 물건들 정도는 부울경 인근 공업지대에서 생산할 예정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중간재 생산은 그대로 한국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앤은 고개를 끄덕이다 갸웃 고개를 외로 살짝 꺽어보이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음...? 그런데 중국에는 진출 안해요?"

"예. 중국은 안됩니다."

"반공...은 베트남엔 가신다고 했으니 아닐거고... 따로 이유가 있나요? 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어마어마 하지 않나요?"

앤의 의문에 태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죠. 일본은 백년의 적이면 중국은 천년의 적이다.

아무리 데탕트니 뭐니 하면서 미중간 분위기가 좋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족속들이 아니거든요. 중국은."

태준이 미래 북한의 3대 수령인 김성은의 말을 인용하자 앤이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을 이었다.

"뭐... 개인적인 반중감정이 있다면이야 어쩔 수 없죠."

"개인적인 반중감정도 감정이지만, 중국 시장에는 하나의 큰 결점이 있는것도 문제지요.

무조건 중국 자본과 합작해서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합작을 하는 순간 그대로 기술만 뜯기고 빼앗길 겁니다.

역사시간에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구 소련 역시 서방세계와 합자공장을 세운 후 압류해서 자신들의 공장으로 제 멋대로 썼으니까요. 공산주의자들의 유구한 전통이죠.

그치들에게는 그저 물건만 파는게 속 편하죠. 베트남이야... 도이 머이 정책으로 사실상 완전 개방이니 상관 없고요."

그렇게 태준으로부터 4-5년 뒤에나 나올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GSC) 매니지먼트 강의를 들은 앤은 이내 한가지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동남아 진출 전에 빨리 태준의 KTJC 지분을 받아내야겠어... 여기서 더 커지면 우리 가문의 입지는 더 작아질게 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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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오와다와 대화를 나누던 손의정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일본 KTJC를 맡게 되는 겁니까?"

"예. 사실상 일본 KTJC는 소프트방코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으니 손의정 사장님이야 말로 적임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손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KTJC에서 일을 해보도록 하죠."

"당분간... 말씀이신가요?"

"제 성격에 차분히 붙어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또 방랑벽이 도지면 뛰쳐나올지도 모르니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말에 오오와다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없으실 겁니다."

"예?"

"회장님의 직속이 되면 그럴 틈도 없거든요. 바빠서."

"하하.... 그렇습니까?"

"물론 그 시간과 고생만큼 보상도 확실하고요."

그 말에 손의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 참 기대가 되는 군요."

그렇게 손의정이 오오와다를 통해 KTJC-J의 사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고,

이번 동아시아 금융전쟁의 정산을 하던 오오와다는 태준으로 부터 걸려온 한통의 전화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건너오신다고요?"

"예. 슬슬 회수할 것들이 좀 있어서요. 물론 그 전에 오오와다 사장은 이번에 새로 생길 KTJC-V와 KTJC-T의 사장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아 물론 V와 T의 지분도 좀 정리를 해주시고요."

태준의 말에 당혹스러워 할 법도 했지만, 오오와다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오오와다의 대답에 태준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늘 선봉으로만 내세워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늘 중히 써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오와다의 말에 태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KTJC-V, KTJC-T 설립하고 지분구조까지 정리하고 나면 바로 베트남으로 가지 마시고, 잠시 대기하고 계세요. 선물이 있으니까."

"선물... 이라면 어떤...."

"그건 그때 가서 직접 보시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오오와다는 그제야 씩 웃으며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왕이면 큰 요트가 좋겠는데요."

"요트보다 더 좋을 겁니다."

그렇게 태준이 전화를 끊자 오오와다는 빠르게 태준이 지시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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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빠르게 태준이라는 거대한 배에 타기 위한 앤의 행보 역시 거침이 없었다.

"우리 가문이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 싹 정리해서 가져와요."

"모든.... 이라면 보스께서 취미로 운영하시는 버번 위스키 공장까지도 말씀이십니까?"

"예. 우리 가문 소유라면 작은 구멍가게 하나도 전부 빼지 말고 전부 정리해서 가져오세요. 땅까지도 전부."

한국에서 통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며 자신의 개인 비서를 통해 미국과 유럽에 산재해있는 모든 가문의 자산을 확인한 앤은 자산 명부를 밤새 확인하며 제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엔터 쪽 레이블이 마흔 다섯... 이건 확실히 시너지가 나는 사업부문이고...

경호업체.... 이건 KOTEC과 합치면 나름 볼만 하겠고....

패션업체는... 뭐 사실상 이건 연예인들이 이름 걸고 하는거 도와주는거고...

주류 업체가 다섯?! 아니 와이너리는 언제 인수하신거지? 거 참.... 이것도 아예 끼워 넣지 뭐.

그리고... 로비회사에....음...?"

그렇게 제안서를 작성하며 가문의 재산을 일일히 확인하던 앤은 특이한 사업체를 하나 발견하고는 곧장 비서를 불러 이 사업체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 이건 PMC입니다."

"우리 PMC도 있었어요?"

"예. 양지로 나오면서 혈기 왕성한 조직 애들을 써먹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앤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설마 아버지가 말하는 수호자의 역할인건가? 로비회사랑 PMC가?'

그렇게 앤이 미간을 찌푸리자 비서가 연이어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지난 베트남 전 이후로는 개점 휴업 상태이긴 합니다. 지금은 사실상 전술컨설팅 업체죠."

"확실히 마피아 물은 다 빠진거죠?"

"물론입니다."

그 말에 앤은 안심하고 이 두 기업까지도 합병대상으로 넣고는 제안서에 요구 지분율을....

"KTJC-A, KTJC-K, KTJC-J의 지분...."

고민하던 끝에....

"8%를 요구한다."

8이라는 애매한 숫자를 써 넣고는 바로 제안서를 겉봉에 담아 비서에게 전달했다.

"이대로 아버지 보여드리고 허락 받아오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앤이 제안서를 보낸지 만 하루가 지난 저녁.

앤이 머무는 호텔 객실의 전화기가 거칠게 울렸다.

거칠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앤이 일어나 전화를 받자 잔뜩 성이 난 조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앤의 고막을 터뜨릴 듯이 거칠게 울려퍼졌다.

"8%!? 8%라니 제정신이냐?! 6:4로 나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성난 목소리에 앤은 후 하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건 엔터쪽만 그런거죠. KTJC쪽 지분을 원한건 아버지 아니셨어요?

우리 가문 전체 사업규모와 태준이 가진 규모를 생각하면 8%도 말이 안되는 거예요. 적정선의 1.5배라고요.

태준이 가진 그룹이 어디 우리가 하는 자잘한 사업인줄 아세요? IT전반은 물론이고 이젠 자동차까지 만드는 산업 왕국이라는 말이예요.

그 왕국에서 귀족작위 얻는게 어디 쉬운 줄 아세요? 그나마도 태준이 창업주고 주위에 공신들이 대부분 배경이 한미해서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8%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죠. 그건 일전에 전화로도 말씀 드렸을텐데요."

그 말에 조던이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왜냐니요. 당연하잖아요. 혁신에 올라타기 위해서죠. 그나마도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로비기업과 PMC가 아니었으면 KTJC 지분이 아니라 KTJC 산하의 UEP 지분이나 요구하는 수 밖엔 없었어요.

태준의 구미를 당길만한건 그것들 뿐이니까."

그렇게 앤이 반쯤 성질을 내며 말하자, 조던이 말을 이었다.

"후... 그래. 많이 배운 네 계산이 다 맞다고 치고, 지분에 대한 건 그렇다 치고, 그 지분에 걸맞는 대우는 보장 받아야 될게 아니냐."

"대우요?"

"예를 들면 이사회 멤버에 대한 추천권이라던가..."

"아버지! 그런 걸 넣었다가는...."

"그냥 제안이나 해 봐! 제안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 아니냐. 어차피 우리는 우호지분으로 계속 남아 있을 텐데 추천권 정도는 받을 수도 있는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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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끝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앤과 조던의 언쟁의 결과는....

".... 음... 그럼 이 사업 전부 넘겨 받고, KTJC 5개사의 지분 9%씩 드리는 걸로 하죠. 단, 1%씩 더 드린 만큼 이사회 멤버에 대한 추천권은 안드리는 것으로."

조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제안서를 태준이 받음으로서 시시하게 끝이 났다.

그렇게 횡재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앤을 보던 태준은 앤이 건넨 제안서의 리스트를 살피며 속으로....

'거저네 거저야. 주류 메이커도 뭐 하나 빠지는게 없고. 거기에 로비기업과 PMC까지.... 이 쯤 되면 거의 나라 하나는 세우고도 남겠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손해같은 이득을 알아챌 수 있는 것.

그것이야 말로 미래를 아는 자의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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