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남방정책 (1)
그렇게 앤이 아무 소득 없이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본 것은 공항에 설치된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였다.
"뉴스 내용 누가 좀 해석 좀 해줄래요?"
그 말에 앤의 비서가 옆에서 앵커 브리핑을 한 템포 늦게 그대로 영어로 말해주기 시작했다.
"김태준 회장이 이번에 대규모의 인수합병을 동시에 해냈다는 소식이네요."
"네? 그게 무슨..."
"자세한 사항은 TV에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에 앤이 황급히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차로 가려는 찰나.
- 즈즈즈...
품 속에서 유니버스에서 제작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렇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는 그때, UEP 소속 직원이 공항 입국장 앞에 서있는 앤을 발견하곤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장님!!!"
한국어로 외친 소리였지만, 그 직원의 손에 쥐어진 스케치북에 크게 앤 오브라이언이라고 쓰여진 것을 보고는 바로 본인을 부른 것을 알아챈 앤은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아들며 캐리어를 비서에게 넘기고는 직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예. 아버지."
"UEP와 합병하는 방식 어떻게 할 생각이냐?"
"한 달 내내 설득할 때에는 생각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하는 말이지."
그 말에 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한국에 설치된 오엔터는 아예 UEP에 흡수합병할 생각이고요, 괜찮으시다면, UEP와 우리 가문이 가진 레이블 전체를 아예 UEP아래 둘 생각입니다."
"지분은?"
"일단 태준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레이블들이 전부 굵직하니까 5:5로 제안해볼 생각이예요. 물론 그렇게 제안해도 아마 합의점은 6:4정도에서 머물겠지만요."
"우리가 6이냐?"
"그럴리가요. 태준 쪽이 6이겠죠. 사실 제일 좋은건 태준이 가진 KTJC 3개 사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받는 게 여러모로 우리 가문에도 좋겠지만...
그건 태준에게 있어 '어부의 반지'(교황을 상징하는 인장반지) 같은 거니까요. 받아들일리가 없죠."
"그렇군... 일단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KTJC의 지분을 받는 것도 제안을 해 봐. 필요하다면 우리 가문이 가진 다른 재산도 처분해서 투자할 용의도 있으니까."
그 말에 앤이 피식 웃으며 스케치북을 들고 서있던 직원에게 눈인사를 한 뒤 직원들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태준은 철인이예요. 말 그대로 플라톤이 주창한 철인 지도자죠. 이데아를 볼 줄 아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태준이 하는 일은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예요. 말 그대로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철인같은 남자죠.
물론... 돈에는 살짝 미쳐있긴 한데. 그것도 활동 자금을 모으려고 한다고 보면 크게 이상하진 않구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방해를 받고 싶겠어요? 구태여 지분까지 줘가면서 말이예요."
"하하.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예?"
"플라톤 말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국가에는 통치자만 있는게 아니거든. 수호자도 있어야하고 생산자도 있어야 하지.
우리는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면 되는 게야. 생산자야... 뭐 태준도 우리도 잔뜩 가지고 있으니 논외로 치고 말이지."
"수호자...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는 뿌리부터가 갱단이지. 물론 지금이야 접은지 꽤 되었지만, 뿌리를 뽑아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런 면에서 봤을때 타고난 무력집단인 우리야 말로 태준, 그 친구의 수호자 역할로 딱이지. 안 그러냐?"
그 말에 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은 의결권을 포기한 지분만 받아도 된다... 그 소리죠? 말씀 참 어렵게 하시네요."
"네가 머리 든 거 자랑하는 거 같아서 나도 자랑이나 좀 해봤다."
"일단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진행해보는 걸로 할게요."
그렇게 앤이 전화를 끊자 앤을 마중하러 온 직원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어요. 안 그래도 태준을 볼 일이 생겼는데. 바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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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손의정은 돈을 정산받자마자 바로 태준의 심복이자 KTJC의 실질적 수장격인 오오와다에게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손 사장님."
"회사도 없는데 사장님이라니 신기하군요."
"하하. 그도 그렇군요."
그렇게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눈 손의정과 오오와다는 일본풍의 응접실로 향했다.
일전 응접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손의정으로서는 마뜩찮은 자리선정이었지만, 마뜩찮고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객이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응접실에 도착한 두사람은 한 동안 아무말이 없었다.
그렇게 응접실에서 다시금 말차를 내린 오오와다가 손의정에게 말차를 내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외유는 즐거우셨습니까?"
"예?"
"회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돈을 벌고, 외유를 즐기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왔으니 잘 맞이해 주라고요."
"벌써 회장님께 보고 드린겁니까?"
"아까 로비에서 연락 받자마자 바로 보고드렸죠. 손 사장님 일이니까요."
그 말에 손의정이 유화되어 거품이 가득한 말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완전히 부처님 손바닥 위였군요."
"손바닥 위였다기 보다는... 회장님께서 손 사장님을 높게 평가하고 계시기에 하시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게 어색하게 웃음지어 보이자 오오와다가 말을 이었다.
"저야... 소위 쇼군가의 가신으로서 지금껏 회장님을 제 주군으로 모셔왔습니다만... 회장님께 그런 관심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그야... 오오와다 사장은 늘 회장님 편이었으니까요."
"그런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미국에 와보니 왜 저는 늘 회장님의 지시를 완수하면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지,
손의정 사장께선 엇나가는데도 왜 그렇게 회장님의 관심을 받는지 알겠더군요."
오오와다의 말에 손의정이 잠시 멈칫하자, 오오와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전형적인 일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인종차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적 배경에 따른 이야기입니다.
'와(和)'를 중시하는 일본인인 제게 있어 혁신과 도전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어색한 것이니까요.
그런면에서 손 사장님은 일본의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오셨음에도 늘 혁신과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받는게 아닐까... 하고 제 나름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오와다의 말에 딱히 뭐라 답을 내려주기 힘들었던 손의정은 그저 말차를 마시며 오오와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스스로 바뀔 생각은 딱히 없습니다. 때 아닌 사무라이 놀음이나 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만...
제가 모시는 주군. 그러니까 회장님께서는 유래없이 인자하신 성군임과 동시에 유래없이 위대한 창업군주시니,
저는 옆에서 그저 제 자리를 지키며 회장님을 보필할 생각이거든요. 막하(幕下)에는 또 그런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렇습니까."
"예. 하지만 한편으로는 혁신적인 인물 또한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해서... 저는 손의정 사장께서 회장님의 옆을 지켜주셨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말에 손의정은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남은 말차를 다 마시고는 입가에 묻은 거품을 조심스럽게 냅킨으로 닦아낸 뒤 말을 이었다.
".... 이 역시 회장님의 지시겠지요."
"말을 꺼낸 것 까지는 그렇습니다만. 그 말을 꺼내는 방식과 내용은 제 진심을 담았습니다."
오오와다의 말에 손의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부처님 손바닥 안이군요. 좋습니다."
"그럼. 남은 이야기는 마저 제 사무실에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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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미국에 간게 미스터 루빈 때문이 아니라 미스터 오브라이언 때문이었습니까?"
"로버트는 저 버리고 백악관에 들어갔어요. 물론 주기적으로 연락은 주고 받지만... 뭐 그 뿐이죠. 이제는 그냥 인맥이랄까요....
진짜 목적은 미국에 간건 골드만 삭스에 사표내러 간 거였어요.
태준이 사장자리도 줬는데 애매하게 위치를 잡고 있기도 뭐했고..."
"무엇보다 골드만에서 좋게 보지 않았겠지요."
"예. 월급이나 축낸다고 사직 권고를 보내왔기에 바로 가서 신변정리를 했죠.
뭐 그 동네가 원래 그렇잖아요? 눈 앞에 숫자만 보는 머저리들 뿐이니까요."
"해서 정리는 다 끝내고 오신겁니까?"
"예. 그렇게 정리 끝내고 기왕 태평양 건넌 김에 아버지를 뵙고 온 거죠. 그래서 어떻게. 제안은 마음에 드시나요?"
앤과의 일상적인 대화의 끝에 달린 제안의 승낙 여부를 두고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KTJC의 지분을 달라... 대신 오브라이언 가문의 모든 사업을 넘겨주겠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한데.... 흐음.'
그렇게 내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앤이 말을 이었다.
"뭐 승낙이 어렵다면 일단 엔터쪽이라도 합병을 추진하는건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세요. 이번 M플래닛, D플래닛 반응이 좋아서 다른 기획사들도 플랫폼 관련 제안이 들어왔는데...
제가 오엔터에도 사장으로 겸직하고 있어서 공정성 시비가 붙을 것 같거든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건 좀 더 고민해 보도록 하죠. 아, 오브라이언 가문 사업 영역을 전부 공개해주시면 결정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그야 어렵지 않죠. 정식 제안서 써서 가져올게요."
그렇게 앤에게 정식 제안서를 받기로 한 나는 앤을 찾았던 이유를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합병을 하면 해결이 될 일이긴 한데... 그래도 기왕이면 속도를 좀 더 내고 싶어서요.
혹시 오엔터에서 유통 중인 미국 쪽 앨범들 뮤직비디오들을 아예 유니버스에 공개 가능합니까?"
"빠르면 빠를 수록 좋겠지요?"
"예.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젓고 싶어서요."
"알겠어요. 그건 그럼 원본 영상 항공우편으로 받아서 바로 유니버스에 올리도록 할게요. 수익은...."
"수익 배분은 다른 컨텐츠와 같습니다. 영상에 달린 광고 수익의 80%. 물론 아티스트들에게 배분은 오엔터가 알아서 할 몫이구요."
그렇게 앤에게 할 말을 다한 나는 이만 일어나서 저녁이라도 한 끼 하자고 말...
"그런데 대체 지난 한달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시끄러운 거예요?"
하기 위해 자리에서 반 쯤 일어났다가 앤의 질문을 받고는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을 이었다.
"정리하자면...퀀텀펀드가 태국을 공격했고, 저는 그걸 방어하기 위해 나섰을 뿐이죠. 인수.... 한 것들은 덤으로 얻은 것들이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꽤 긴 시간을 할애해 지난 한달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앤이 질린 표정을 하며 말을 이었다.
"... 골드만 삭스보다 더 대단한 악당이네요. 태준. 헤지펀드가 불쌍해질 지경이예요."
"불쌍할게 뭐있습니까. 그 치들도 수익을 얻어갔는데요."
"얻어간 수익은 쥐꼬리인데에 반해서 악명이 더 많이 쌓였잖아요. 태국도, 한국도 전부 퀀텀펀드가 해먹은 줄 알텐데."
그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해서 준비하고 있는게 있습니다."
"음...? 준비요? 퀀텀펀드에 미안한 마음에 무슨 선물이라도 주실건가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요. 저는 돈 많은 부자들 걱정은 안 합니다. 애초에 그 사람들 털어먹는 걸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죠. 정당한 방법이기도 했고.
다만, 이 싸움에 휩쓸린 무고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한국의 노동자들이나, 태국 동남아의 노동자들.
그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돈 있는 사람들끼리 돈으로 전쟁했는데 정작 생계가 막막해진 건 그 사람들이 된다면.... 그것보다 최악이 어디있겠습니까."
"태준이 사회주의자인줄은 몰랐는데요....? 어떻게...돈이라도 주시려구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동남아에 인프라를 깔아볼 생각입니다. 통신부터 각종 설비까지. 전부 깔고, 거기 공장을 세울 생각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