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동아시아 금융위기 (5)
퀀텀펀드도.
대한민국의 정부도.
그리고 대부분의 대중들도
인터넷 세계에선 초짜나 다름이 없었다.
그랬기에 태준이 던지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고, 태준이 근거로 제시하는 그래프 역시 철썩같이 믿어버렸다.
태준의 용의주도함은.
자신이 의도를 숨기기 위해 사용한 모든 메시지가 진실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태준이 공개한 자신의 바트화 매입그래프.
그리고 실시간으로 바뀌는 바트화 차트.
거기에 자신이 설파한 이론.
거기에 순순한 실패인정까지.
모든 것이 '표면적으로는' 사실이었고,
이론 역시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확실히 태준이 말하는 대로만 된다면 수익이 보장될 것이라는 것 또한 태준의 의도를 숨겨주는 사실로서 작동했으며,
실패를 수긍하는 자세 또한 '겉보기에는' 솔직하기 그지 없었기에
사람들은 아무도 태준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정부는 태준의 의도를 애국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퀀텀펀드는 태준의 의도를 일종의 타협 내지는 거래 제안으로 해석했고.
대중들은 순진하게 태준이 말한대로 '잘 해보려다 안된 것'으로 생각하며 동정했다.
그러나.
태준이 숨겨온 의도는 이들이 태준이 보여준 '사실'을 통해 내놓은 '해석'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그래서. 이제 니 어쩔끼가. 니 덕에 은행들이야 태국에서 채권회수도 했고, 일본 차관 연장도 같이 했는데.. 정작 니가 빠져나오기 애매해졌는데?"
"누가 그럽니까? 빠져나오기 애매해졌다고."
"응?"
그리고 태준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이뤄진 지금.
태준은 자신의 계획을 숨김없이 김응삼 대통령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바트화는 원화를 팔아서 마련했습니다. 지난 정권에서 태국 군부와 직접 거래를 위해 맺은 통화 협정이 아직 안 끝나있더군요.
만기일이 도래했고 연장 의사를 서로 밝히지 않았으니 조만간 끝나겠지만요."
"원화? 달러가 아니라?"
"달러도 맞는 말이긴 하죠. 달러를 팔아 원화를 산 뒤 원화를 팔아 바트화를 샀으니까요."
"잠깐? 그럼 달러는...?"
"예. 지금 한국에 들어와있습니다."
태준의 말에 김응삼 대통령이 눈을 밝히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당장 우리 외환 보유고가...."
"산출된 금액에 70억 달러 정도 추가하면 됩니다."
"... 그럼 약 300억 달러가 넘겠군."
"예."
"부족해."
김응삼 대통령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300억이 넘는 다는 것도 시중은행이 가진 외환 보유고에 대한 것까지 포함하는 일종의 꼼수를 통해 부풀린 수치였으니 더더욱 그랬다.
정부의 순수 외환 보유고만 놓고보면 10억 달러정도 수준.
이 상태에서 공격이 들어온다면 결코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을 알기에 김응삼 대통령은 침울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김응삼 대통령의 침울한 표정을 한방에 날려버릴 말이 태준의 입에서 나왔다.
"부족하지요.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 뭔가?"
"태국을 털어먹는 겁니다."
그 말에 김응삼 대통령이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태국을 향한 공격에 편승해서 그 수익을 우리쪽으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 방법은...?"
"지금 태국을 공격하고 있는 퀀텀펀드와 똑같습니다. 한순간에 바트를 팔고, 달러로 바꾸고, 다시 그 달러를 담보로 바트를 사서 파는 방식이죠.
어차피 한국 입장에선 바트화나 달러나 전부 외환이니 한국 입장에서는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우리가 가진 채무도... 아니, 그 전에 자네가 산 바트에 대한 손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건 괜찮습니다. 애초에 바트를 사들인 방법도 원화를 담보로 빌리고 하는 방식으로 사들였던 거니까요.
한단계 더 꼬아놓았을 뿐이니 여기서 포지션을 바꾼다고 해도 크게 손해날 일은 없죠. 원화가 버퍼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근원이 되는 원도 달러를 담보로 빌린 것이었고요.
즉, 바트화가 떨어지면 떨어질 수록 저는 빌린 돈을 더 낮은 값에 갚을 수 있게 되니 손해가 날 일은 없습니다."
그 말에 김응삼 대통령이 놀란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군. 그러면 태국의 달러를 전부 한국에서 빨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군."
"예. 그렇게 태국 경제가 무너지면, 스왑을 체결한 다른 동남아 국가들도 연쇄적으로 빨아먹을 수 있을테니, 그 근방 국가의 경제는 전부 무너진다고 봐야겠지요.
그 때 한국 정부에서는 어차피 받지도 못할 부채를 탕감해주면서 이권을 받아와 이득을 볼 수도 있겠죠."
그 말에 김응삼 대통령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알겠네. 그럼 태준이 자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 최대한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부디... 성공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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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이 김응삼 대통령에게 진실을 밝히고 있던 그 때, 금융시장에선 대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태국 바트화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속도를 올립니다. 퀀텀펀드가 발표하기 전에 우리가 더 빨리 많이 공격해서 최대한 달러를 모아야 합니다."
민영을 중심으로 한국으로부터 무지막지하게 풀려나가는 바트화를 시작으로 바트화가 미친듯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에 더해...
"지금 원달러 환율이 얼마야?"
"지금 막 900원대에 진입했습니다."
"더 빨리 움직여. 최대한 빠르게."
원화 역시 퀀텀펀드의 공격에 의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아시아 금융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었다.
이 금융전쟁에서 기본적인 돈의 흐름은 이러했다.
태준이 미친듯이 풀기 시작한 바트화가 시장에 풀리면서 순식간에 달러로 바뀌어 태준의 손에 들어왔고,
퀀텀펀드가 미친듯이 풀기 시작한 원화가 시장에 풀리면서 달러로 바뀌어 퀀텀펀드의 손에 들어갔다.
"1200원대입니다!"
"좋았어...! 더 밀어 붙여...!"
겉 모양새만 놓고 보면, 각국의 달러가 특정 헤지펀드들에 빨려들어가는 모양새였지만...
"아직도 1200원인가?"
"예."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으니...
태국은 달러가 나가기만 할 뿐 들어올 구멍이 없었다는 것이고,
한국은 달러가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왜 천이백 원에서 계속 머물고 있는거야...!"
"원화가 풀리는 양은 계속 유지중입니다."
"원화가 늘어나는데도 그대로라는 건... 달러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건가?"
"예."
"젠장... 레버리지 한계도 오고 있는데... 이대로 가다간 수수료만 뜯기고 끝나게 생겼는데?
한국에 빚내준 채권국들은 돈을 회수 할 생각이 없는건가?"
"최대 채권국이 일본인데, 일본은 최근에 단기 채권 관련해서 만기 연장에 동의를 해줬다고 합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태국에서는 바로 발 빼던 놈들이 왜 한국에선 만기를 연장해줘!"
그렇게 태준의 계략에 넘어간 퀀텀펀드가 힘을 못쓰고 무너지는 듯 보였지만... 이건 태준과 퀀텀펀드의 구도에서나 그런 것이었고,
이 두 거대 자본의 충돌 사이에 낀 한국은...
"재계 서열 30위 보현 그룹이 그룹해체를 선언했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경제위기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보현그룹을 시작으로,
한국의 재벌들이 작게는 그룹해체,
크게는 부도를 연이어 맞으며 무너진 것이었다.
원 역사에서는 이 이상의 충격이 연이어 터졌지만, 원 역사를 모르는 현재의 한국입장에서는 한순간에 '단군 이래 최대 호황'에서 '최악의 불황'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태준은 냉정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바트 전부 청산하고, 달러 팔아서 원화 사들입니다."
"태국처럼 하면 될까요?"
"아뇨. 말 그대로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들입니다. 원화 사들여서 지금 무너진 기업들 중 괜찮은 기업들 사들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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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 간 벌어진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980원... 이거 완전 푼돈이군. 수수료 제하면 남는게 하나도 없겠어. 원금 그대로 들고갈 판이야."
소로스의 말에 내내 방관자 처럼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로저스가 분통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태준 그 자가 태국에서 우리 수법을 그대로 배껴서 달러를 조달했을 줄이야! 대체 어떻게 한거지?"
그렇게 로저스가 분통을 터뜨리자 애널리스트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알아보니 한국의 원을 기반으로 바트를 매입했었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바트를 팔아서 달러로 한국에 들여온 모양입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원화가 기축 통화도 아닌데 그게 어떻게 된다는 거야!"
"그게 전대 정부가 군사 정부여서 태국의 군부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태국 군부의 요청으로 원화와 바트화의 거래는 달러를 중간에 끼지 않고 직접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어있었던 모양입니다.
만기가 도래한 협정이었기에... 다들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는데. 이 틈을 김태준 회장이 파고든 모양입니다."
이어진 애널리스트의 보고에 침묵하던 소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달러를 쏟아붓겠다는 말은 뭐였던거지?"
"그게... 달러를 담보로 원화를 사들인 다음 원화를 담보로, 바트화를 계속 빌린 모양입니다."
"... 젠장 당했군. 그럼 우리 계산보다 한국에 더 많은 달러가 있었다는 거잖나!"
"예. 거기다 태국을 통해 추가로 들어온 달러까지하면... 아무래도 김태준 회장의 설계에 놀아났다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애널리스트의 말에 소로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 후. 여기서 피해를 최소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 그 와중에도 일단 한국 경제에 타격을 입혔고, 빚이 많았던 기업들은 그 타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도난 경우도 꽤 많습니다."
"그걸 사들이자?"
"예. 사들여서 정상화 한 뒤 판다면... 나름대로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문제는...?"
날이 잔뜩 선 소로스의 말에 애널리스트는 보고를 하다말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알짜 기업들은 전부 김태준 회장이 미리 채갔다는 겁니다. 환율이 1200원대에 닿았을 무렵,
김태준 회장이 갑자기 모든 돈을 원화로 바꾸면서 원화가 전부 김태준 회장의 손에 빨려 들어갔고, 매물로 나온 기업들을 잔뜩 사들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원화는 다시 급격하게 올라 900원대까지 내려왔..."
-쾅!
애널리스트의 보고에 인내심을 잃은 소로스가 성질을 내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애널리스트가 황급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소로스의 방 안을 빠져나가는 애널리스트와 교대하듯 들어온 손의정은 조용히 소로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 꽤 처참하게 졌군요."
"아직 진건 아니지. 손해는 안봤으니."
"시간을 날렸으니 손해를 보긴 본 것이지요."
손의정의 말에 소로스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제 몫의 투자분. 인출하겠습니다."
"뭐요?"
"아무래도 당신들 역시 김태준 회장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이 못되는 것 같으니까요."
그 말에 소로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배신하는건가?!"
"배신은 아니지요. 갈 길이 달라졌으니 배에서 내리는 것. 그 뿐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소로스가 뭐라 소리치려는 그 순간.
손의정을 데려온 로저스가 소로스의 앞을 가로막으며 점잖게 말을 이었다.
"알겠네. 내 금방 정산해 주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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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로 쌍호 자동차, 대현 전자, 대현 반도체 등 해서 인수를 모두 마쳤습니다."
민영의 보고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꽤 많은 기업들이 무너졌군요."
"예. 다들 빚내서 거래를 하다 보니 순간 1200원대까지 급등한 환율을 견디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 말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균은 전화위복이군요."
"예?"
"제가 공격해들어온 덕분에 빚도 전부 청산하고 무차입 경영으로 전환해서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으니까요."
"아.... 그렇게 보면 또 그렇네요."
그렇게 나는 전생 97년도에 벌어진 IMF와 지금을 비교하며 생각에 잠겼다.
'막는다고 막았는데... 그래도 피해는 어쩔 수 없네.'
그렇게 만족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정리를 하던 그때.
오오와다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손의정 사장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