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플랫폼 (5)
그렇게 방치된 채 한참을 서있던 정현민은 식사를 위해 나오는 태준 일행을 보고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다가가 말했다.
"김태준 회장님!"
그러자 민영이 순간적으로 태준에게 다가오는 정현민의 앞을 가로막고는 순식간에 정현민의 한쪽 팔을 잡아채 꺾어버리고는 땅에 내리꽂아버렸다.
파스스.. 모래 끌리는 소리와 함께 정현민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악....! 미친년이! 내가 누군줄 알아?!"
그 비명섞인 폭언에 민영이 그대로 정현민의 팔과 등을 겹쳐 무릎으로 누르고는 말을 이었다.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저희 회장님께 다가가시는지?"
그러자 그 질문에 답한 것은 함께 차를 타고 온 정현민의 운전기사였다.
"저... 면담 신청한 대현전자의 정현민 사장님이십니다."
다급히 차 밖으로 나와 해명을 하는 운전기사의 목소리에는 난감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운전기사의 해명에 민영은 슬쩍 정현민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는 일부러 무릎에 힘을 주며 일어나며 짐짓 몰랐다는 표정으로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 저희와 소송 중인 그 회사의 사장님이시군요."
"이...이... 미친 년이!"
그렇게 정현민이 분에 차 민영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그 때,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앤이 인상을 쓰며 정현민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 미친 놈은 대체.... 너 누구야?"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백인 여성의 영어소리에 정현민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멈춰서자, 태준이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말을 이었다.
"아, 대현전자 사장이라네요."
"대현전자 사장...? 거기 뭐 하는데인데요?"
"그냥 전자제품 떼와서 파는 곳입니다."
태준의 말에 한국특유의 벙어리 영어교육으로 단련된 정현민이 태준의 말을 알아듣고는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말씀이 심하시군요.... 저희도 제품 개발은 하고 있습니다."
"닌텐도에서 게임기 수입해서 팔고, 파나소닉에서 라디오 떼와서 팔고, 모토로라랑 사성에서 부품사다가 조립만 하고 케이스만 바꾸면 그게 개발입니까?"
태준의 말에 정현민이 인상을 쓰자 태준은 후 하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크흠... 저희 회장님이 김회장님을 뵙고싶어 하십니다."
"... 대현의 회장님이라면... 정영주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예."
그 말에 태준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재계의 어르신이 찾으시니 가기야 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전해주세요."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 말에 태준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민영과 앤을 이끌고는 쓱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정민현은 자신의 아버지 정영주 회장에게 보고하고 나서야 태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미친 놈아...!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상대에게 겨눈 총구부터 치워야 할게 아니냐! 한 손에 칼 들고 다른 손으로 악수하자면 너같으면 악수할테냐!"
그렇게 정영주 회장의 불호령을 듣고 나서야 정민현은 부랴부랴 소송을 취하하고 대화에 나설 준비를 했지만....
- 수성전자, QULAB과 특허동맹 체결.
이미 한발 늦어버린 뒤였다.
-----
그렇게 대현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태준은 곧이어 오오와다가 올린 기획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걸 QULAB 프로그램 개발팀에 전해주세요."
QULAB에 정식으로 오더를 내려 새로운 메신저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메신저 프로그램을 기본으로 화상회의 기능을 얹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라고 하셨다고?"
"그렇다더라. 독립형 하나, 웹 브라우저형 하나. 이렇게. 아, 물론 프로토콜은 별도로 만들어야 하고. IRC 프로토콜 차용 금지."
"죽겠네.... 그럼 요구상세 정리하면... 메신저니까 일대일 대화...
거기에 회의 가능해야하니까 다대다 대화 기능이 들어가야하고, 실시간 화상, 음성 전송까지 되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거기다 회의 기능이니까 목적별로 별도의 룸을 만들 수 있게 해야하고,
문서자료 정도는 서로 교환이 되어야 하겠지. 영상도 보낼 수 있으면 좋은데 그건 일단 나중에."
"..... 만들 수나 있대? 그래 만든다고 쳐도 독립형 프로그램은 그러려니 하는데,
웹 브라우저에 이 기능까지 넣으면 웹 브라우저 무거워서 쓸 수 있겠어?"
"최적화는 일단 출시부터 한 뒤에 하는 것 같더라. 개발 계획 보면...."
기획자들은 요구 상세 조건을 정리해 곧바로 개발팀과 UI디자인팀에 넘겼고,
개발팀은 그 요구 상세 조건을 보고 당장 구현이 가능 한 것들 부터 차례로 구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개발진이 갈려나가는 지옥의 시간이 흐르고, 유니버스넷의 신작 프로그램이자, 한국과 미국의 닷컴 버블을 불러올 희대의 프로그램이 서울시청 앞 조선호텔에서 거창하게 발표가 되었다.
"소개합니다. 유니버스넷의 신작. 앤서블입니다."
앤서블.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해인 연대기에 등장하는 아티펙트의 이름을 따온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이었다.
"앤서블은 저희 유니버스가 만든 새로운 통신 서비스이자, 범우주적 통신 표준을 지향하는 서비스입니다."
그리고 유니버스라는 사명, 앤서블이라는 제품명에 퍽 어울리는 '범우주적 통신 표준'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나오자 참지 못한 한 기자가 손을 들어 태준에게 질문했다.
"통신 표준이라면... QULAB이 개발한 새로운 이동통신 서비스라는 말입니까?"
그 질문에 태준은 매력적인 웃음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그 박수 소리와 함께 등장한 컴퓨터 한대가 프로젝터와 연결되며 회장의 실버스크린을 비추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유니버스 미국 지사장 어윈 제이콥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유니버스 일본 지사장 오오와다 타이조입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얼굴이 차례대로 앤서블 프로그램 상에 (물론 화질은 형편 없었다.) 비춰지자 회장에 모인 기자들이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실시간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까?"
그러자 오오와다 사장이 웃으며 어색한 한국어로 말을 이었다.
"예. 웹 캠이 낮게 설치가 되어 있어 어느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실시간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앤서블이 일으킨 파장은...
일전 손의정이 인수전에서 이슈를 일으켰던,
이제는 태준의 것이 된 먼슬리PC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됨과 동시에...
- 범우주적 통신 표준, 앤서블! 지금 무료로 사용해보세요!
라는 배너 광고가 유니버스넷에 깔리며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갔다.
앤서블을 위해 마련된 유니버스넷의 이벤트 페이지는
컴퓨터와 웹캠, 마이크만으로 할 수 있는 화상회의,
대학생들의 조별 과제,
학교 수업을 집에서 들을 수 있는 홈 스쿨링 등등
여러가지 사용례를 제시하며 '이것이 곧 미래다'를 온 몸으로 외쳤다.
그리고 그 결과.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틀렸다. 1995년에 등장한 '무료' 화상통신 앤서블!
- 유니버스넷이 꿈꾸는 미래!
- 한국은 무료로 화상통신에 채팅까지 하는데 일본은?
태준이 원하던 대로 온 세상이 앤서블을 중심으로 인터넷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멍석이 깔린 것이었다.
-----
그리고 그 멍석 위에서 춤을 추는 KTJC-A의 오오와다를 본 퀀텀펀드의 관계자들은 부랴부랴 긴급회의에 들어가 있었다.
"태준, 그 자가 작정하고 불을 질렀어요. 이번 유니버스의 새로운 메신저 프로그램 공개와 거의 동시에 KTJC에서 미국, 일본, 한국 이 세 나라에 펀드를 만들고 돈을 쏟아붓고 있단 말입니다."
"...."
"뭐라 말 좀 해보세요. 미스터 손. 당신 전문 분야 아니오?"
소로스의 재촉에 손의정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한 발 늦었습니다. 애초에 미국에서 적당히 돈을 굴리자는 계획에 실리콘밸리가 들어있던 건 새롭게 떠오르는 www를 보고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www에서 포털 사이트라는 이름으로 이메일부터 검색, 심지어 쇼핑까지 전부 하는 김태준 회장이 작정하고 불을 질러버렸으니 이제 우리는 따라가는 수 밖엔 없습니다."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 이 말이오?"
"예. 일단은."
그 말에 안도한 소로스의 한숨이 터져나오자,
손의정은 그 한숨을 도로 소로스의 입 속으로 밀어 넣는 말을 꺼냈다.
"문제는... 돈을 언제 빼느냐 일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 말에 손의정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일본 버블. 그걸 일으킨 사람이 김태준 회장입니다. 당시에도 땅을 엄청 사들이면서 동시에 그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회사를 세우고, 또 땅을 사고를 반복했죠."
"그야... 그 당시 일본은 다들 그런 분위기 아니었소?"
"예. 문제는... 김태준 회장은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MBS니, CDO니, CDS니 하는 이상한 파생상품들을 연달아 출시하면서 부풀어오르는 풍선에 LPG가스를 통째로 가져와 들이 부은 사람입니다."
"... 잠깐. 그럼..."
"예. 이번에도 의도적인 거품을 만들려고 한 걸 겁니다. 애초에 이 시점에 무료 메신저에 화상통화 기능을 넣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한국이라는 시장 내에서만 100%의 기능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그게 무슨 말이요?"
"한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회선 상의 문제로 쓸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은 김태준 회장의 주도 하에 대규모 광케이블 기반 인터넷 망을 구축하여 서비스에 들어갔지만...
여기 미국은 아직도 전화선 기반 인터넷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PC통신이 메인이기도 하고요.
한국은 PC통신은 이제 퇴출 수순입니다. 어차피 PC통신 사업 역시 김태준 회장이 하고 있던 사업이라, PC통신에서 김태준 회장의 유니버스 넷으로 고객들을 옮겨오기도 수월했겠지요."
그 말에 소로스는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김태준 회장이 만약 그 버블을 터뜨리고자 한다면...."
"예. 한방에 무너질 겁니다. 지금이야 다들 김태준 회장이 보여준 미래상에 취해,
그리고 그 미래상을 보고 헛소리나 해대는 대부분의 IT벤처들의 말에 혹해 다들 돈을 넣겠지만...
그것이 당장에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버블은 한 순간에 꺼지겠지요."
손의정의 말에 소로스는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 그럼 의정. 당신이 보기에는 언제 버블이 꺼질 거라고 보시오?"
"길어야 5년. 짧으면 3년입니다."
그 말에 소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겠소. 그럼 우리도 이 버블에 올라타는 것으로 합시다. 내릴 시점은... 보수적으로 잡는 것으로 하고."
-----
"음... 완벽하네. 이걸로 또 큰 돈을 만질 수 있겠어."
오오와다 사장으로부터 날아온 보고서를 받아본 나는 미래에도 건재할 몇 개의 기업을 정해 오오와다에게 보내고는 이메일 창을 닫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아직 구글, 야후는 안 나타난건가...? 하기사 유니버스넷이 완전히 선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오기는 힘들겠지."
그렇게 기지개를 키며 혼잣말을 하던 그 때,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민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QULAB 김성주 선임연구원, 손재겸 선임연구원이 회장님과 면담을 신청했는데...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빨리 들여보내라고 민영에게 지시하고는 슬쩍 인수한 두 기업, 게임프리크와 실리콘 앤 시냅스를 떠올렸다.
'손재겸한테 했던 공약을 지킬 때가 되었지....'
그렇게 김성주와 손재겸이 자리에 들어오자 나는 반가운 얼굴을 하고는 두 사람에게 말을 이었다.
"사표 내러 왔습니까?"
내 말에 김성주가 놀란 눈으로 손재겸을 보자 손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그리고 약속하셨던 공약도 지켜주십사 하고 찾아왔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는 두 사람의 발언에 나는 그저 빙긋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슬쩍 두 사람에게 게임프리크와 실리콘 앤 시냅스의 자료를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공약은 작년부터 지키려고 준비중이었습니다."
내 말에 김성주가 자료를 받아들고는 놀란 눈으로 말을 이었다.
"여...여긴?"
"게임프리크 말입니까? 닌텐도 세컨드 파티 업체입니다. 지분은 제가 100% 가지고 있지요.
실리콘 앤 시냅스도 꽤 괜찮은 게임업체입니다. 두 기업 중에서 원하는 기업체에 실무연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물론, 월급은 그대로 나올 거구요. 그렇게 실무 연수 마치고 오면, 제가 여러분이 세울 게임회사에 투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