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플랫폼 (4)
"제안... 말씀이십니까?"
"예."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구신환에게 말하자 구신환이 잠시 움찔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하. 예. 저도 그 제안을 들어보고 싶군요. 제가 한 제안만이 옳은 것은 아니니까요."
약간은 억지스러운 태도로 답하는 구신환을 보며 나는 속으로...
'억지로라도 참는게 용하네. 확실히 그 수성 구씨는 다르다 이건가. 태균 쪽 후계자들이 구신환의 반만 닮았어도...'
구신환이 보여준 재벌 2세 답지 않은 억지 인내에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수성은 가전분야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요."
"하하.. 압도까지는 아니지요. 사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업계 1위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그쪽 특허와 저희쪽 통신특허와 거래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
"특허 동맹을 맺자는 겁니다."
내 말에 구신환이 슬쩍 인상을 쓰더니 말을 이었다.
"... 특허를 공유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나는 구신환이 뭘 걱정하는지를 눈치채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QULAB을 키워온 방식... 그러니까 특허 얼라이언스를 맺고, 그 얼라이언스를 기반으로 자회사를 만든 다음 타고 들어가서 먹어치우는 방식으로 성장해서 걱정이신 모양인데... "
내 말에 구신환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요. 저희 수성은 그렇게 먹힐 만큼 작지 않습니다."
"예. 수성을 제가 먹어 치울만큼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특허 교환을... 혹시 가전 쪽에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내 계획을 떠올렸다.
내가 생각하는 현생의 미래상.
그것은 내가 살다온 전생 속 미래의 사회상을 좀 더 빨리 당겨오는 것이었다.
이미 벌써 (한국 한정이긴 하지만) 초고속 인터넷 망 보급도 빠르게 진행중이었고,
그에 맞춰 포털, 검색, 쇼핑, 멀티미디어 등과 연계되는 인터넷 사업도 시작했으니,
다음은....
'유비쿼터스. IoT(사물인터넷)를 대비해야겠지.'
사물인터넷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2세대 통신 칩 기술을 넘겨주고 업계 1위인 수성전자의 가전 특허 일체를 받아올 수 있다면,
그걸 기반으로 사물인터넷 시대를 빠르게 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거기다 이미 QULAB에서 유럽 GSM측과 기술교류 및 통합절차에 들어가기도 했고 말이지...
이것만 성공하면 사실상 QULAB과 GSM재단의 전지구적 기술 독점이 완성되니 구태여 구세대 기술에 목을 맬 필요도 없기도 하고.'
그러나 이런 계획을 굳이 구신환에게 말할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사하는데 구색은 갖추고 싶어서요."
머저리 같은 대답으로 구신환을 속이는 말로 넘겼다.
그러자 구신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장사에서 구색을 갖추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지요. 보는 이미지가 달라지니까요."
"예. 전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만드는게 핸드폰이라면 그건 핸드폰 제조사이지 전자회사가 아니니까요."
그 말에 구신환이 공감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예... 사실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저희 수성전자 역시 반도체가 없다는 이유로 은근히 시장에서 저평가를 받고 있는지라... 그 마음 이해 합니다."
"태균도 가지고 있던 반도체인데.. 수성이 없었다니 그건 의외군요."
"... 정부 승인 때문이지요. 중복투자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반도체 사업 여명기에 반도체회사 설립 인가를 받지 못해 벌어진 일입니다. 저희로서는 꽤 씁쓸한 일이지요."
"통신칩 사용특허를 받아가시면 그걸 기반으로 반도체 사업에 반쪽짜리나마 진출하실 수 있겠군요."
"예?"
"뭘 그리 놀라십니까. CDMA 모뎀칩도 반도체인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은근히 구신환의 아쉬운 부분을 긁어준 나는 슬쩍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떠십니까? 유니버스의 하청으로 전락하는 것 보다는 나은 제안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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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과의 전화를 마친 오오와다는 슬쩍 황금색 수첩을 꺼내 들고는 파르륵 소리를 내며 특정 페이지를 펼쳐보고는 씩 웃어보였다.
<회장님의 예측>이라는 제목을 달고 쭉 나열된 문장들은 태준이 일본 버블을 무너뜨리고 오오와다에게 흘리듯 한 말을 적어둔 것이었다.
"일본 이외에도 앞으로도 버블과 위기는 전세계적으로 계속 있을 겁니다. 그 원인이 환율이 되었든... 기술이 되었든.. 아니면 일본의 사례처럼 부동산이 되었든. 그 시기를 놓치지 않는게 중요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슬쩍 그럴듯한 이유와 함께 태준이 미리 알려준 각종 버블 유형은 여느 예언들 처럼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었으나,
- 유럽 급변 사태로 인한 환율 위기 > 파운드화 공격으로 실현
- 한국, 미국, 독일 등의 기술 기반 국가의 정보통신버블
- 데탕트 기조의 장기화로 인한 미중관계 회복에 따른 미국의 부동산 버블
- 미중관계 회복과 중국의 시장개방에 따른 중국의 주식 버블
"파운드화.... 다음은 정보통신 쪽 버블이겠지. 애초에 손의정이 붙어먹었다는 것 부터가..."
오오와다에게는 확실한 근거를 갖춘 예측이자,
신처럼 떠받드는 태준이 내려준 계시이며,
일본, 그리고 오오와다가 머무는 미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공명의 주머니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마치 성경을 보듯 경건한 자세로 한참동안이나 황금빛 수첩을 들여다보던 오오와다는 씩 웃으며 수첩을 품에 넣고는 조용히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어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종이와 펜이 서로 몸을 부비며 나는 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채워나가고,
그 결과물이 오오와다 앞에 놓였다.
이라는 제목의 문서.
그 문서를 보며 희미하게 웃는 오오와다의 얼굴은... 태준의 모습과 판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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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의 제안을 받아든 구신환은 '그룹차원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말미를 주시지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빠르게 태준의 사무실을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구신환은 자신이 건넸던 제안.
그리고 태준이 건넨 제안.
이 둘을 비교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청으로 전락한다....? 애초에 김태준 회장쯤 되는 인물이 내가 말한 말의 표면적 의미만 읽었다고 생각해선 안되겠지...
내 속내까지 읽었다고 가정해야 해. 그렇다면... 사실상 우리가 특허 사용권만 얻어서 브랜드 파워를 늘리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는 걸 알아챘다는 건데....
그런 제안을 듣고도 우리한테 이렇게 유리한 제안을 해온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나라면 그 자리에서 거절하던가, 아니면 받아 주는 척 하면서 뒤통수를 크게 쳤을텐데.... 이걸 거절하고 역으로 제안을 걸었다고....?
너무 유리해서 거절할 수 조차 없는 완벽한 제안인데... 이걸 무슨 생각으로 한 거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며 제안 두 개를 놓고 저울질을 하던 구신환은 결국 서울에 도착해 그룹 본사에 도착할 때까지, 그 어떤 답도 내놓지 못한채 자신의 아버지 앞에 섰다.
"그러니까... 김 회장이 우리쪽 사과를 받아주고,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예. 특허에 강점이 있는 회사인지라 당연히 특허 비용이 핵심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인지... 특허 사용권을 교환하자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신환의 아버지 구정득 회장의 질문에 구신환은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 솔직히 말하면 거절하는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제안입니다.
통신모뎀칩이 확실히 마이너 하긴 해도 분명 반도체인 것은 사실이고, 그 반도체 특허 사용권과 개나 소나 다 가지고 있는... 물론 저희만이 가진 특수한 가전 특허도 있습니다만...
개나 소나 가진 가전관련 특허를 교환한다는 것은 분명 이득입니다."
"그러냐?"
"거기다 그 협약 기한을 10년으로 잡게 된다면, 자체적인 통신칩 개발도 가능할테니... 경험을 쌓는다 생각하고 계약을 맺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그 말에 구정득 수성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업을 아는 친구로군 그 친구."
"... 예. 확실히 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번 일로 배운게 많을 거라 생각하마."
"...예."
"김회장하고 거래는 네가 마무리 지어봐라. 네 판단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구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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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퀀텀 펀드와 손을 잡고 자신의 남은 돈 절반을 털어넣은 손의정은 퀀텀펀드 측으로부터 퀀텀펀드의 전략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 기본 골자는 파운드화 공격때와 같군요."
"그렇소. 워낙 범용성이 높은 전략인지라 안쓰고 넘기기엔 아깝더군."
소로스의 말에 손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면 분명 큰 돈을 만질 수 있겠군요."
"잘 보았소. 물론 당장 들어가선 큰 이득은 없고.... 우리 계산으로는 적당히 3년 뒤 쯤이 최적기로 보고 있소."
그 말에 손의정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 3년 동안 자금은 어떻게 굴릴 생각입니까?"
"다른 쪽 투자로 굴려야겠지."
"투자?"
손의정의 되물음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저스가 슬쩍 윙크하며 손의정에게 양손의 검지로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 우리 일본의 천재 투자자 손의정 사장의 도움이 필요한게지. 무려 그 김태준에게 거액으로 회사를 팔아치운 당신의 수완이 필요하다... 그거요."
그 말에 손의정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그럼 3년간의 공백을 메울 아무런 전략도 세우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손의정의 불만 섞인 말에 소로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대전략을 계산하는데만 수학자 수십명을 갈아 넣고 있는데, 인플레 정도나 메울 소전략에 신경쓰고 있을 틈이 있겠소?
애초에 우린 분명히 말했을 텐데? 미스터 손. 고객으로 모시는 것이 아닌 동료로 한 배에 태우고 싶다고. 그 제안에 좋다고 한 건 미스터 손. 당신 아닌가?"
그 말에 손의정이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텃세...? 아니.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냐. 이들이 바라는 건 날 이용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대대적인 홍보까지 친거지....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을 마친 손의정이 후 하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결국 끼고 싶으면 일본에서 돈 털어오라는 소리군."
혼잣 말인지, 아니면 불만성 발언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손의정의 말에 로저스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답. 일본이 아무리 망했어도 아직 털어 먹을 곳은 많지 않나?"
"일본 보다는 미국쪽이 더 많지요."
"미국...? 미국에 투자할 만한 곳이 있던가? 지금은 다 거기서 거기일텐데."
그 말에 손의정은 무의식적으로 태준을 떠올렸다.
태준이 돈을 벌어들였던 방식.
그것을 떠올린 손의정은 질끈 눈을 한번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말을 이었다.
"실리콘밸리. 그리고 미국의 주택들이 있지요."
태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퀀텀펀드와 손을 잡은 손의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태준이 일본에서 행했던 전략과 현재 하고 있는 전략을 그대로 섞어놓은 듯한 전략을 내밀며 퀀텀펀드에 제대로 입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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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신환을 보내고, 한참이 지난 저녁.
"오늘 저녁은 뭐예요?"
신이난 표정으로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앤을 보며 나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은 뭘 드시고 싶으십니까?"
"별 생각 안해봤는데요? 어지간 한 건 다 먹어본 것 같은데.... 흐음..."
그렇게 앤이 저녁메뉴를 생각하던 그 때,
"말씀중에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대현전자 정현민 사장이 회장님을 뵙고싶다며 찾아왔답니다."
민영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앤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지금이 몇 신데....! 매너 없는 남자네요!"
"...저도 공감합니다만, 그래도 사람이 사람인 만큼...."
그렇게 민영이 난감한 얼굴로 서 있자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대현전자에선 소를 취하 했습니까?"
"아직입니다."
"그러면 만날 이유가 없지요. 대화할 자세가 안되어있는데. 그냥 두죠."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축객령을 내린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제가 별도로 알아야 하는 것은 없습니까?"
"곧 오오와다 사장쪽에서 이메일을 보내오기로 했습니다."
"이메일...?"
그리고 그 순간.
-You've got mail.
켜둔 컴퓨터에서 알림이 울렸다.
"오오와다 사장도 앙반은 못되겠군요. 이것만 읽고 바로 저녁 먹으러 갑시다."
그렇게 메일을 열어 확인한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오와다 사장이 적시에 잘 움직여주고 있네요. 오늘 메뉴는 소고기 어떻습니까?"
"오오...! 한우로 사는 건가요?"
"언제는 한우가 아니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럼 늘 가시는 가든에 전화넣겠습니다."
그렇게 저녁 외식을 위해 흩어지는 민영와 앤을 본 나는 슬쩍 시선을 이메일로 옮겼다가 컴퓨터를 끄며 씩 웃어보였다.
"메이저 IT기업들에 더해 IT관련 페니스톡(동전주)까지 전부 사들이면서 고의로 버블을 일으킨다라...
역사가 바뀌어서 IT버블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오와다 사장이 꽤 좋은 생각을 해줬네.
그럼... 나도 여기 한 손 거들어야겠군. 메신저 프로그램과 화상통화 프로그램을 개발하라고 해야겠어.
업계에 황금빛 전망을 보여줘야 헛 꿈 꾸는 사람들도 늘어날테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