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플랫폼 (3)
대현의 사장 정현민은 자신의 상사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정영주 회장의 말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정현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유니버스 측, 다시 말해 태준의 호의는 당연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지원 받아서 기술 개발해놓고, 유세떨고 앉아있는 놈한테 아버지가 굽히고 들어간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고작 언론 플레이에 불과한데 말이야....'
그러나 이런 정현민의 판단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판단이었다.
대현과 수성.
이 두 회사가 사다 쓰고 있는 CDMA 통신 모뎀칩의 경우 대한민국을 포함한 각국의 정부산하 연구소가 연구 협력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CDMA 기술 자체는 이미 QULAB의 전신격이라 할 수 있는 유니버스 연구소에서 이미 완성해 국제 특허까지 출원한 기술이었고,
각국의 정부 산하 연구소의 '연구 협력'이라는 타이틀은 어디까지나 각국 정부의 2세대 표준을 GSM이 아닌 CDMA로 하게 하기 위한 태준의 정치적 거래에 따른 부산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와 QULAB, 유니버스 사이에 맺어진 로열티 협약의 '최혜국대우' 조항을 보면 알 수 있는데,
- 이번 개발에 참여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 15개국의 정부출연연구기관 소속국의 내수용 제품의 CDMA 로열티는 최대 3%를 넘을 수 없다.
- 이번 개발에 참여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 15개국의 정부출연연구기관 소속국의 수출용 제품의 CDMA 로열티는 최대 7%를 넘을 수 없다.
정부에서 최대 로열티 제한만을 걸었다는 점과
이 마저도 내수용 제품에서만 이익을 볼 뿐 수출용에서의 이익은 사실상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정부 측에선 사용 승인 및 표준규격 채택으로 채택해준 것 외에는 기술적 도움을 준게 없음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그런 상황속에서 태준이 시장확대와 점유율 확보를 위해 수출 여부를 불문하고 CDMA제조사들로부터 로열티를 1.5%만 받아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태준은 내수용에서는 1.5%, 수출용에서는 무려 5.5% 인상이라는 카드를 쥘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항은 공개된 정부의 관보를 통해서도,
QULAB이 공개한 자료를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는 사항이었지만,
대현과 수성은 이에 대해 낙관적으로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오너가 출신 사장들이 분위기를 이끌었다.
"유니버스가 로열티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야. 미쳤다고 사기업 산하 연구소가 로열티를 일부러 적게 받겠어? 그게 다 정부한테 받은게 있어서 그런거라고."
그리고 그런 오너가 출신 사장들의 생각은 적어도 그들의 논리 내에서는 맞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직접 뭔가를 만들어서 기어올라온 1세대와는 달리,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만들어져있는 기업을 운영하는 2세대들의 입장에서,
유니버스의 이런 호의는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없다면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본 것이었다.
"...해서 날 더러 도와달라 찾아온게요?"
"예. 의원님. 건방지게 천지 분간 못하고 제 멋대로 날뛰는 김태준 회장을 의원님께서 좀 혼내주십사..."
"... 정사장이 아직 사업한지 얼마 안되서 경험이 부족한 모양인데.... 이번 사안은 전적으로 대현과 수성이 잘못 판단하고 움직인 사안이요.
내가 아무리 대현장학금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도와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이야기요."
"예?"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왜 뜬금없이 많고 많은 대기업을 두고 무명이나 다름 없던 QULAB... 아니 김태준 회장과 손을 잡았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금방 나올 것을.... 쯧쯧..."
"그게 무슨..."
그리고 자기에게만 '맞는' 판단을 한 정현민은 그 '맞는' 판단을 무기 삼아 국회 과학기술 소위원회 위원장을 맞고 있는 여당의 김상식 국회의원 (3선) 을 찾아가 통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사정에 김상식 의원은 혀를 차며 정현민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CDMA 기술은 전적으로 김태준 회장이 직접 쌓아올린 것이다.. 그 말이요. 우리는 그저 시장 개척에 도움을 주고 이득만 가져왔을 뿐.
국회 과학기술 소위에서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못한 이유도 그것이고. 김태준 회장이 우리, 그리고 각국 정부에 공을 돌리며 소위 '노나먹기'를 해준 꼴인데...
밥상 차린 사람한테 밥 맛이 없네, 짜네 어쩌네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소? 얻어먹은 주제에. 해서 정해진 로열티가 3%, 7%였던 거요.
그것도 김태준 회장이 상당히 호의적으로 나와준 덕분에 가능한 로열티였소. 실무자들 사이에선 10%대 초반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는 말이오.
그런데.... 김회장의 개인 결단으로 정해진 로열티의 반에도 못미치는 1.5%로 보급에 힘 쓰고 있었는데, 그걸 지금 전부 엎어버린게 대현과 수성이지 않소?
이걸 무슨 수로 도와달라는 말이요? 다른 기업들... 특히 사성이 왜 가만히 있는 줄 아시오? 다 QULAB과 척지기 싫어서 그러는 게요.
유니버스가 하는 일. 그래 덤핑일 수 있지. 그렇게 대놓고 덤핑하는데도 왜 정부는, 국회는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가? 생각해 본적 없소?
애초에 원가보다 판매가가 높이 책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1원이 더 높은 것이긴 하지만...
국가가 규정한 부당염매 행위 조건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정부도 유니버스에 빚이 있기 때문이요.
거기다 반기를 들 것을 예상해서 미리 피해를 볼 지도 모르는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 위주로 미리 은혜를 베풀기까지 했는데 나보고 무슨 수로 도와달라는게요?"
김상식 의원의 긴 질책 끝.
조그마한 티끌을 본 정현민은 그 티끌을 잡아 뜯으며 자신의 생각을
"하지만 그건...!"
말을 하려 했지만, 이내 김상식 의원의 이어진 말에 끊기고 말았다.
"나도 알아요. 인텔 CPU의 대항마로서 유니버스의 CPU를 보급하기 위한 일종의 떡밥이지. 램 역시 사성전자의 램을 이기기 위한 것이고. 헌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그렇게 따지면 CDMA는 더 보급할 필요도 없는데 구태여 로열티를 낮춰서 보급했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텐가? 그리고 자사의 시장 확대를 위해 원가에 가깝게 파는 게 불법이던가?
우리로서는,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정부, 그리고 국회 과학기술 소위의 입장에서는 외산 CPU의 독점적 지위 보다는 차라리 국내산 CPU의 독점적 지위를 용인하는 편이 훨씬 온당하다 보고 있소.
실제로 그 시장확대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이득을 보는 면도 있거니와, 설사 시장 장악 과정이 다 끝나서 독점적 지위에 유니버스가 오른다 한들...."
그렇게 잠시 말을 멈추고 크리스탈 컵에 물을 채워 마신 김상식 의원이 말을 이었다.
"당신네들 처럼 어떻게든 세금 안내려고 온갖 기술적 기법을 쓰는 기업보다야 유니버스에서 내는 세금이 더 클테니까 말이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축객령을 받아든 정현민은 후 하고 한숨을 쉬며 국회 의원회관을 나와 차에 타고는 말을 이었다.
"김회장에게 가자."
"어떤..."
"지금 내가 뭐 때문에 여기 왔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유니버스 회장이지!"
"...대전까지 직접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전이 아니라 미국이라도 지금 당장 가야할 판이니까 짜증나게 자꾸 되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어디 운짱새끼가 건방 떨면서 쳐 묻고 지랄이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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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민이 어떻게든 유니버스를 공격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그 시각.
대전에서는 태준의 선전포고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가 있었으니...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성전자 사장 구신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태준입니다."
바로 수성전자 사장 구신환이었다.
그 역시 정현민과 비슷한 판단으로 태준과 유니버스에 대한 공세를 펼쳤던 것이었으나,
태준의 선전포고 이후,
태준과 정부의 계약조건을 다시 확인하고,
태준이 해온 그간의 행보를 살펴본 뒤 곧장 유니버스를 향한 모든 공격성 소송을 취하하고 곧장 태준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구신환의 판단력은 단순히 특권의식과 태준에 대한 단편적인 소문만으로 자신이 우월하다 믿으며 공격해 들어온 정현민 보다는 몇 수나 위에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재계의 떠오르는 청춘 스타를 제가 만나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실제로 뵈니 훨씬 더 훤칠하십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불민해서 제 부하직원들의 단견을 그대로 믿고 회장님을 피곤하게 해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소를 바로 취하하셨더군요."
"예. 저희 수성전자 법무팀이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소송을 진행하긴 했습니다만, 그룹차원의 재검토도 같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소를 취하 한 것은 그룹차원의 재검토 결과였죠."
그 말에 태준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룹차원의 재검토라...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러나 그 생각은 생각으로만 머무를 뿐, 입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습니까? 오해를 풀어서 다행이군요."
"예. 해서 이렇게 사과의 의미로 제가 직접 회장님을 뵙자 청한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사과를 하시니 받겠습니다만... 그 외의 목적은 없으십니까?"
태준의 말에 구신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경제학에는 비교우위라는 말이 나오지요."
"무역의 중요성. 그리고... 우리같은 장사치들의 효용가치를 증명한 개념이였죠."
"하하.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십니다. 예. 그 말대로 입니다. 저 역시 장사치인지라 경제학을 배우던 시절 비교우위라는 개념을 인상깊게 보았거든요.
그리고 그 이론에 따라, 저는 유니버스 측과 일종의 협상을 하러 나왔습니다."
"협상...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구신환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수성전자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니버스에 처지지만, 생산이나 AS의 측면에서는 분명 절대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업력이 오래되었으니까요."
"예. 그 말씀대로입니다. 역사가 깊은 만큼 내실이 튼튼하죠. 반면 역사가 오래된 만큼 혁신 또한 쉽지 않기에 첨단 기술 분야에선 유니버스와 같은 젊은 기업을 상대하기 힘든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저희 수성전자의 비교우위가 무엇인지 바로 나옵니다. 신기술 개발보다는 생산에 더 강점이 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절대 우위로만 놓고 봐도 유니버스 측이 저희 수성보다 기술 개발 쪽에 뛰어난 것도 사실이고요.
해서, 저희 수성은 신기술을 개발하는데 힘쓰기 보다는 생산성 증대, 효율성 강화에 더 초점을 맞추는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으로 유니버스 역시 비교우위면에서는 생산보다 연구가 더 잘 맞으니 우리끼리 나름의 협상을 통해 한 배를 탄다면 충분히 한국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에 태준은 슬쩍 미간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자가 지금 이 말을 진심으로 하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구신환이 하는 말은 본인들이 사실상 조립업체가 되어 일할테니, 유니버스는 QULAB을 통한 기술개발에나 힘쓰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뜻 듣기에는 수성전자 스스로가 유니버스의 하청 업체로 들어오는 모양새로 비춰지는 말이었으니 태준에게 유리한 말 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그 너머를 보고 있던 태준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구신환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말을 이었다.
"대신 제 쪽에서 다른 제안을 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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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태준과 구신환의 미팅이 진행되는 동안 민영은 이제는 아예 한국에 상주하는 앤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도저히 흘리고 넘어갈 수 없는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으로 앤에게 물어보았다.
"잠깐. 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좀 해주시겠어요?"
"응? 무슨... 아, 그 조지 소로스에 대한 이야기 말하는 거예요? 민영?"
"둘 다요. 손의정 그 사람이랑 그 소로스가 뭘 했다구요?"
그 말에 앤이 어깨를 들썩이더니 민영을 보며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목소리와 행동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최근 월 스트리트에서 'BOE를 쓰러뜨린 사나이'라는 내 별명을 자꾸 KTJC-A의 태준에게 줘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보이는데...
태준이 나와는 각별한 친구 사이기긴 하지만 그런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물론 제가 불쾌하던 말던 그렇게 말하고 다닐 사람은 계속 그렇게 말하고 다닐 것을 알기에, 저도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 준비중인 작전 역시 BOE 건 못지 않게 꽤 성대할 겁니다.
그리고 그 성대한 잔치의 첫 고객이 바로 일본의 천재 경영인 미스터 손입니다."
"진짜 조지 소로스가 그렇게 말했다구요?"
앤의 짧은 연극에 민영이 다시 되묻자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소로스 뿐만 아니라 짐 로저스도 그런 투로 말했죠?
큰 걸 준비하고 있고, 일본의 천재 경영인이자 천재 투자가인 손의정이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다. 뭐 그런...
손의정 사장... 아니 이젠 미스터 손이겠네요. 그 사람을 불러온 게 짐 로저스기도 하구요.
거 참... 이제 하다하다 다른 사람 이름까지 팔아서 모객행위를 하고... 거 참.
제가 이래서 헤지펀드보다 투자은행을 더 좋아하는 거예요. 제가 몸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들 보다는 투자은행쪽이 훨씬 더 젠틀..... "
"잠깐만요 앤. 말씀 중에 죄송한데 회장님을 좀 뵙고 와야 겠어요."
"어...? 예? 어... 그러세요."
앤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민영이 빠르게 수첩에 뭔가를 적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빠르게 방 밖으로 빠져나가자,
얼이 빠져있던 앤은 이내 피식 웃으며 민영이 남기고 간 종이컵 속 커피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이었다.
"... 태준에게 조련당해서 민영이 태준을 닮아가는건지...
아니면, 민영이 태준을 좋아해서 태준을 닮아가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거참."
그렇게 앤의 핀잔을 뒤로 한채 민영은 앤에게서 들은 내용을 정리하며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와 오오와다에게 연락했다.
"오오와다 사장님?"
"민영씨?"
"예. 최민영입니다. 혹시 손의정씨가 퀀텀 펀드로 붙었다는 소식 들었나요?"
"아. 어제 발표를 들으신 모양이군요. 예. 알고 있습니다.
감히 건방지게 회장님 성함까지 팔아가면서 수작질 부린 것도 잘 알고 있지요."
음산하다고 할 수있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은 오오와다의 목소리에 민영이 순간 흠칫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쪽에는 별 영향이 없는 거죠?"
"예. 물론입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미리 조치를 해놓으셨기도 하구요."
"조치..요?"
그 말에 오오와다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회장님과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요. 그 자들이 뭘 그렇게 성대하게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해보기도 전에 큰 손해를 입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