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전쟁 (4)
태준이 소프트방코를 먹어치우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그때,
김두혁 회장의 명을 받은 박승철 이사는 사실상 유배를 가있던 김석훈을 찾았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도련님."
담담하게 마치 어제 본 사람에게 말하듯 말하는 박승철 이사의 태도에 김석훈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 이제는 감시까지 붙인건가?"
"그럴리가요. 이젠 뭘 하실 힘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박승철 이사의 말에 김석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살짝 이마와 두피의 경계에 핏줄이 튀어나오는 것이 나름 인내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것을 본 박승철 이사는 별다른 말 없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복귀인가?"
약간은 기대 섞인 표정으로 물어오는 박승철 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그 말에 박승철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석훈이 말을 이었다.
"내게 마지막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태준이에 대한 것이겠군."
"...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김석훈의 말에 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한 박승철 이사가 말을 이었다.
"평창동으로 가시죠."
"그래 가지. 지금 가면 되나?"
박승철 이사는 순간 김석훈의 태도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뭐지. 이렇게 순순히...?'
그러나 그런 섬뜩함도 잠시 다시 본 김석훈의 음울한 표정을 본 박승철 이사는 우려를 잠시 덮어두었다.
박승철이 지나친 섬뜩함.
그것은 김석훈이 숨겨둔 품속의 칼이 내뿜는 살기였다.
'지금부터 시작이지. 모든 준비는 끝났어.'
품 속의 칼.
그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태준의 존재를 인식하고, 태준의 존재감이 커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준비하던 계획이 바로 김석훈이 준비한 칼이었다.
'친생자존재확인소송으로 태준이 놈과 법적관계를 회복한 뒤... 좋은 곳으로 보내줘야겠지. 물론 그 전에 태준이 친모도....'
상속법을 이용해 태준이 여태 쌓은 재산을 몽땅 먹어치우는 것.
그것이 바로 김석훈이 벼르고 벼르던 칼이자,
일전에 태균전자의 모든 것을 퍼주듯 빼앗기고도 태연할 수 있던 이유였고,
태준의 수작질에 휘말려 유배아닌 유배생활을 하던 지금에도 딱히 불만을 가지지 않는 이유였다.
그렇게 태준을 향한 오래된 계획을 생각하며 박승철 비서와 함께 서울로 올라온 김석훈은 자신의 아버지, 김두혁 회장과 대면한 자리에서 말을 이었다.
"태준이를 집안으로 들이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거 외에 네 놈의 쓸모가 있겠느냐? 지 애비도 배신하는 뱀 대가리 새끼를 어디다 쓴다고."
그 말에 김석훈이 피식 웃으며 품 안에 갈고 갈았던 '칼'을 꺼냈다.
"법원에서 지정한 검사기관의 검사 결과입니다. 친자확률 99.998%. 여기에 미국 기관에서 받은 검사결과도 보충 결과로 가져왔습니다. 이건 트리플 나인입니다. 미국쪽은 최근에 개발된 PCR검사를 기반으로 해서 더 신뢰성이 높지요."
그렇게 김석훈이 품에서 검사결과를 내밀자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준비를 다 하고 있었던 게야?"
"예."
그 말에 김두혁 회장이 말을 이었다.
"... 좋다. 일단 넌 친생자존부확인 소송 걸고... 물산 이사로 복귀해. 그리고... 박 이사. 자네는 지금 가서 태준이 불러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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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소프트방코는 그렇게 장악한다고 하면... 태균텔레콤은 어떻게 장악할 생각이신가요?"
그렇게 태준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소프트방코의 인수에 대한 합법성, 정당성을 선언하자,
민영은 남은 하나의 타깃에 대한 전략을 물어왔다.
그 물음에 오오와다가 대신 웃으며 답을 이었다.
"그 부분은 모건 스탠리와 협업하기로 했습니다. 원리는 소프트방코와 동일하게 대출을 해주고 그 채권을 우리 쪽에서 사오는 방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물론 그 채권에는 스톡옵션을 걸거구요."
"...예?? 모건 스탠리랑요....?"
민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오오와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융가에게 있어 친구이자 아군, 영원한 동맹 대상은 돈 뿐이죠. 그리 이상 한 일도 아닙니다."
"말이야 그렇지만... 태균이 순순히 당할까요?"
"우리 쪽은 미국에 위치한 본사와 일을 꾸미고 있는 거니까요. 제 아무리 인맥이 어떻다 해도 좁아터진 한국이란 우물에서 진상을 알 수는 없지요. 아 덤으로 골드만 삭스도 여기 낄겁니다."
오오와다의 말이 끝나자 민영이 슬쩍 나를 보며 되물었다.
"골드만 삭스까지요....?"
그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하하. 예. 그렇습니다. 아마 태균텔레콤은 이 달콤한 꿀을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길겁니다."
느끼지 못한 오오와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하하거리며 민영에게 말했다.
그걸 본 나는 속으로..
'미국물 먹었다고 이젠 공기도 못 읽냐! 이 인간아...!' 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골드만 삭스의 참전은 어디까지나 지난 대출에 대한 성의표시입니다.
그 쪽이야 물론 투자 '은행'인 만큼 우리처럼 레버리지를 이용한 파운드 공매도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파운드의 하락에 '베팅'은 할 수 있었던 만큼 그로 인해 날린 기회비용을 우리가 채워주지 않으면 앙심을 품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 쪽에서 애써준 로버트의 입지가 결과적으로 약간 상처입기도 했고요."
"그 말은.... 그 왈가닥이 다시...?"
나는 예상대로의 민영의 반응에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어제 밤에 제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본사 대리인으로 오브라이언 양을 다시 보낸다더군요.
덤으로... 오브라이언 가의 가주에게도 연락이 와서 오브라이언 가의 대리인으로 보내니 잘 부탁한다는 말도 하더군요.
물론 후자는 농담조였습니다만... 우리 입장에선 가볍게 들을 이야기는 아니죠."
"후.... 또 그 지긋지긋한...."
내 말에 인상을 쓰는 민영을 보며 내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그 때.
- 뚜루루루
내선 전화가 울려퍼졌다.
"네. 회장실 입니다."
빠르게 울리는 전화에 다가가 전화를 받은 민영의 표정이 순간 당혹으로 물들더니 수화기의 송화부를 잡고는 내게 말을 이었다.
".... 박승철 이사가 왔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박 이사님이요...?"
내 표정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은 오오와다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옆방으로 잠시 피해있으면 되겠습니까?"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지요. 들여보내세요. 오오와다 사장도 거기 있고. 아 물론 보안 규정은 원칙대로 거치게 하시고요. 최고단계로."
그렇게 내 승인이 민영을 거쳐 떨어지고 1시간 뒤.
지친 표정의 박승철 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도련님."
"오늘은 태균의 이사로 온게 아니라 김씨가문 가신으로 오신겁니까?"
"태균이 곧 김씨가문의 것인데 그게 나눠지는 것입니까?"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민영에게 손짓하자, 민영이 탕비실에 들어가 미리 준비한 차를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내 앞, 그리고 박승철 이사가 앉을 소파 한 켠에 찻잔이 내려졌다.
"일단 앉으시죠."
"외부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 오오와다 사장은 초면이신가요? 이미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직접 대면은 처음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면서 뭘 그리 낯을 가리십니까. 오오와다 사장은 외부인이 아닙니다. 제 동료지요."
"동료라.... 그럼 외부인이겠군요. 말씀하신 바와 같이 김씨가문의 집안일로 온 것이니. '가신'으로서."
가신이라는 말이 거슬렸던 것인지 일부러 '가신'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 말하는 박승철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말씀하시라고요. 저는 그 집안 식구 아니니까. 그 쪽 집안 사정을 왜 이쪽이 신경을 써야합니까?"
내 반박에 박승철 이사가 아주 미약한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이제 집안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시랍니다."
"명령?"
"예."
그 말에 나는 콧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어차피 법적으로는 남남 아닙니까? 그것도 함구하기로 이미 거래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젠 아니게 될테니까요."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련님의 생부되시는 김석훈 도련님께서 친생자존재확인 소송을 걸 예정입니다."
".... 친생자관계 존재확인소송을 준비중이란 말입니까?"
구태여 내가 용어를 정정하며 되묻자 박승철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법원의 지정 기관에서 받은 서류도 있고, 보충자료로 미국의 PCR 유전체 검사를 기반으로 한 검사자료도 다 확보했으니까요. 이제 가실 마음이 드십니까?"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김석훈이 아주 망하기는 제대로 망했나봅니다."
"예?"
내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박승철을 보며 나는 속으로....
'전생에는 절대로 호적에 안 올려주던 걸 해주기로 했다면... 이유는 딱 하나뿐이겠지.
내 재산을 노리는 것. 전생에도 지 형제들 잡아먹고 마지막에 지 아비까지 잡아 죽인 사이코패스가 부성이 생겼을 리도 없고.
내 밑으로 가족이 없으니 친부의 자리를 회복해서 날 죽인뒤 상속 받으려는 수작질이지.
거 참. 전생에도 현생에도 그 인간은 여전하구만. 구제 불능이야.
적당히 실각시키는 걸로 끝내려 했더니... 안 되겠네. 완전히 밟아줘야지.'
그 답을 생각만 하고는 답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가지요. 민영씨 준비하세요. 곧 준비해서 나갈테니 박 이사님은 건물 밖에서 대기해주시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박승철 이사를 내보낸 나는 곧바로 오오와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의 그 노영숙 사건과 같은 수준입니까?"
"아마도.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요. 그 쪽이 시기 질투에서 벌인 일이라면 이쪽은 돈을 노리고 벌이는 일이니까요."
그 말에 오오와다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뭐 부터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당장 벌어질 일은 아니고... 한... 3개월은 시간이 있으니 안가부터 준비해주세요. 어머니를 모셔야겠습니다."
"예. 그럼 대마도에 있는 제 친가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를 노리는 사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곳이 부산입니다. 대마도는 도리어 너무 위험해요."
"그럼 타케미치를 통해 도쿄 인근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 편이 낫겠군요. 그리고. 이르지만 태균에 대한 공격도 들어가야겠습니다. 정신이 없도록."
"텔레콤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요...?"
"예. 그룹 전체에 공격을 할 겁니다."
"그룹 전체라면..."
"동원할 수 있는 명의,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을 다 써서 태균물산의 어음을 사들입니다."
"어음...이 뭡니까?"
"전통적인 한국의 채권제도입니다. 일반 채권과 달리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게 아니라, 대금 지불을 하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외상용 채권이죠."
"그 어음을 사들이면 되는 것입니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동 박영감 사무실의 주소(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를 적어 오오와다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예. 명동의 박 영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음을 사들이는 사채업자 출신 큰 손인데 이 자를 통하면 빠를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태균의 회사채를 사들입니다."
그 말에 오오와다가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설마..."
"예. 채권을 최대한 많이 모은 다음 기한이 도래할때 까지 기다렸다가 전부 터뜨릴겁니다.
그렇게 한번에 어음이 돌아오면 막을 수 없을테니까요. 막아내더라도 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고요.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우리는 태균에 대한 공매도를 칠겁니다.
아, 어음의 경우 발행요건에 따라 소멸시효 도래일이 다르니 주의해서 기한을 맞춰주십시오."
"예. 많이 바빠지겠군요. 공부도 많이 해야할 것 같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오오와다에게 지시를 마친 나는 곧장 민영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럼...."
"제 차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차에 오른 나는 뒷 좌석에 앉아 수첩을 꺼내 뭐라고 적은 뒤 민영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민영씨는 저 내려다주고 곧장 이 쪽지를 가지고 동교동으로 가주세요."
"상도동이 아니라요?"
그 말에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이번에는 김태충이 필요합니다."
내 발목... 아니 내 목을 노리는 김석훈의 손목 그 자체를 비틀어버리려면 '법'의 도움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