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파운드화 공격 (2)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특히나 리더에 자리에 있을 때, 그 책임은 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번 미국행은 그런 의미에서 나 스스로 어마어마한 족쇄를 달아놓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AMD를 가서 얼라이언스를 형성한다.
퀄컴에게 양해를 구한다.
AMD와 손 잡고 퀄컴을 인수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AMD를 인수한다.
사업적인 면으로는 이러한 족쇄가 걸려있었고,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로버트의 신임과 인정,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부가적인 인맥을 기대하기 전에
골드만 삭스가 나를 어떻게 먹어치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떻게 될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거기다 금융쪽으로는 일본시장에 있을때부터 장기간 준비해 온 (정확히는 구상만 해온) 파운드화 공격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기묘하리만치 이상한 인연들과 엮여 들어 이제는 진짜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단 것 또한 일종의 족쇄이자 짐이었다.
성공을 확언하고 거칠게 행보를 움직였으니 그만큼의 실적을 내주지 않으면 그대로 추락하는 것이다.
이 백척간두의 칼날 위에서 나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으세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전생을 이미 경험하고 온 자의 특권이었다.
그렇게 전생이 내게 준 특권을 한껏 누리던 나는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민영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별일 아닙니다. 식사는 어떻게 잘 하고 오셨습니까?"
"식사라면 말도 꺼내지 마세요. 이번에도 설렁..."
그렇게 민영과 대화를 나누던 그 때, 앤이 황급히 뛰어들어오며 말을 이었다.
"DHL을 통해서 계약 문서 보냈대요!"
"골드만 삭스에서 말입니까?"
"예. 방금 로버트에게 직접 전화로 들은 이야기예요."
그 말에 민영이 앤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을 멈추고는 곧바로 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바로 면담 신청하겠습니다."
"예. 가능하면 영수회담 자리에 낄 수 있도록 조율해주세요. 아, 김태충 의원은 빼고요. 아마 분명 반대할 겁니다. 원칙주의자라."
그렇게 민영이 움직이자 나는 곧바로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좀 뵐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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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의 요청을 받은 노대호 대통령과 김응삼, 김정필은 은밀히 청와대 내에 있는 관저의 가장 깊은 내실에 모였다.
일전에 태준이 왔던 그 서재에서 노인 셋이 모여 하는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번에 태준이 갸가 무슨 제안 할지 대통령 니는 알제?"
"아마 우리한테 진 정치적 빚을 받아내려 하지 않겠소?"
김응삼과 김정필이 차례로 노대호를 보며 말을 했음에도 노대호는 그저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거 참. 말해보라케도. 니는 뭐 들은게 있는거 아이가?"
성격 급한 김응삼 의원이 보채듯 노대호 대통령에게 묻자 노대호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우리더러 돈 벌 생각이 없냐고 하더군. 뭐 비서가 말했으니, 말 자체는 공손했지만... 사실상 그 말이 그 말이지."
그 말에 김응삼이 인상을 팍 쓰며 말을 이었다.
"갸가 우리를 아주 호구로 보는구만?"
"설마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으려고. 잘못 들은게 아닌게요?"
그 말에 노대호 대통령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태준이 금마가...."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태준이 의도적으로 흘린 미국행에서의 일에 대한 대략적인 일이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지 회사에서 발행하는 채권을 사라?"
"요약하면 그런게지. 그래봐야 우리가 사는 건 별 의미는 없고, 진짜는..."
"은행... 을 움직여달라 뭐 그런거겠군."
"정확히는 움직일 수 있는 일반 시중은행들과 산업은행까지 살 수 있으면 사달라고...."
그 말에 김응삼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친 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거기서 나오는 돈은 누구 돈인데?"
"거기다 산업은행이야 그렇다 쳐도 일반 시중은행을 무슨 수로...."
"그런데... 거절이 쉽지가 않은게 문제요."
그 말에 김응삼이 말을 이었다.
"와? 니가 걔한테 주기로 한 거 홀라당 다 뺏어먹어서? 아니면, 뭐 니 따로 약점 잡힌거라도 있나?"
그 말에 노대호 대통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약점이 문제가 아니야. 차라리 약점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노대호 대통령이 서랍을 열더니 한 뭉치의 서류를 둘 앞에 던졌다.
"이 보고서를 보면 차라리 태준이 놈 말처럼 하는게 나을지도 모르오."
노대호 대통령이 건넨 서류.
그것은 경제기획원에서 올린 보고서였다.
[92' 외환시장동향 예측]
매년 통상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서.
그 보고서의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있었다.
-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의 재건을 위해 독일의 독단적인 금리인상을 진행중에 있음.
- 이에 유럽 각국의 ERM 탈퇴가 이어져 유럽환에 대한 환차손 우려가 있음.
- 외환은행 및 각 시중은행의 유럽환 보유고를 줄일 것을 권고함.
그냥 보면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을 내용의 보고서였지만,
노대호 대통령을 통해 전해들은 태준의 전략을 이미 어느정도 들은 세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무조건 돈 버는 상황을 잘도 잡아냈군. 대단한 친구야."
그렇게 김정필 의원의 혼잣말이 이어지자 노대호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이런 투기를 할 수는 없지. 하지만...."
"기업이라면 다르다는 건가."
"그렇지. 태준이 놈은 지금 자기가 그 총대를 메겠다고 하는거요."
그 말에 김응삼 의원이 말을 이었다.
"본인이 총대 매고 영란은행을 쳐서 돈을 벌고... 국가는 채권에 대한 이자만 받아가라?"
"정확히는 이자에 자본이득세까지 받아가라는 말이지."
"겸사겸사 우리는 은행들 설득 시켜서 태준이 놈 총알 채워주고 중간에 돈 벌어가고?"
"그런 셈이요. 우리 셋은 직접 투자도 받아준다고 했으니 진짜 큰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직접 투자할 곳은 한국에 있는 그 놈 회사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그놈 자회사가 되겠지만."
그 말에 김응삼 의원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악마가 따로 없네. 금마."
"...악마?"
"그럼 이걸 악마라 캐야지 뭐라카노. 나쁜 일 하겠다고 한 손 거들라카면서 또 명분은 명분대로 제대로 세워주는거잖아.
심지어 92년부터는 대선 정국이고. 이 놈 말대로만 되믄, 우리가 이기는건 따놓은 당상 아니겠나?
벌써부터 대현의 정회장도 대선에 나온다고 이빨이라는 이빨은 까고 다니는데, 이만한 꿀을 들고 오면 안받아줄수 있겠느냔 말이야.
영국이 이걸 알면... 성질을 있는대로 내면서 우리한테 뭐라카겠지만 뭐 그건 알바 아니고."
그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김정필 역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여라도 영란은행이 버티기라도 하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김정필의 우려에 김응삼이 하 하고 짧게 헛웃음을 내뱉고는 노대호를 보며 물었다.
"버틸 수 있겠나? 대통령. 니가 말해봐라. 니도 거절 못하고 우리 불러가 한탕 하자고 이리 꼬시는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주영대사로 나가있는 이흥구 교수한테 급히 물어봤는데... 영국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
안기부 해외파트장도 불러다 물어보니... 영국 재무장관이 독일까지 가서 언성을 높였다는 소문이 있다고도 하고. 금리 내리라고."
"한 마디로 무조건 먹는 상황이다?"
".... 거의. 미국도 이걸 모르지는 않겠지. 다만 국가차원에서 타국에 대한 경제공격을 가할 수 없으니 안하는 것일 뿐.
거기다 그 놈들 '다섯개의 눈'이라고 자기들끼리의 연합체로 묶여있으니 알아도 모른척 하고 있을거고."
그렇게 노대호 대통령의 설명이 끝나자 김정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 움직이는 건 막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직접 못움직인다 뿐이지, 자기들이 힌트도 안줬는데 알아서 움직여서 털어먹는 민간자본까지는 막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
태준이 그 놈은 그걸 전부 다 계산하고 우리한테 말하는거야. 돈 내놓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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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곧장 전화를 걸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김두혁 회장이었다.
정치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서 내 제안에 움직여 주겠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것이 있는 만큼 탄통을 채워줄 다른 수단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대뜸 무슨 일이야?"
"뭐 하나 팔러 왔습니다."
"팔아? 뭘?"
그 말에 나는 슬쩍 서류하나를 내밀고는 말을 이었다.
"60억짜리 차용증입니다. 만기일은 바로 내후년이죠."
그 말에 김두혁 회장이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석훈이한테 돈 빌려준게 너였느냐?!"
"알고 계셨으면서 왜 갑자기 모르는 척 놀라는 시늉을 하십니까."
"설마하고 의심하는 거랑, 확실한 사실이랑은 다르지 이놈아!"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자 사탕까지 뺏어 드시는 분이 손자가 수염 좀 잡아당겼다고 뭘 그리 화를 내십니까."
".... 이놈아! 그 사탕 값으로 내가...!"
"물론. 사탕값은 주셨죠. 전자 쪽 껍데기는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저 역시도 만만찮게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손해? 무슨 손해! 네가 가져간 연구소가 기반이 되서..."
"그건 저랑 제 카이스트 동문들이 잘해줘서 그렇게 된 거지요. 태균의 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 해서 이 차용증을 나한테 갚으라고 온게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양아치도 아니고 자식 빚을 부모보고 갚으라고 찾아와서 생떼를 쓰겠습니까?
돈이 필요해서 명동 사채시장에 팔아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회장님 생각나서 여기로 들고 온 겁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딴 소리를 해라 이놈아. 대체 뭘 바라고 온 게야?"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회사에서 발행할 채권에 좀 투자하시죠?"
"뭐?"
"그러면 그 차용증 딱 60억에 팔아드리겠습니다.
그 차용증 꽤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갚지 못하면 담보물인 물산 주식을, 그것도 계약 체결 당시 가격 기준으로 받아낼 수 있는 물건인데요.
싫다고 하시면 명동 박영감에게 들고 가고요. 그 양반 재벌 소리 듣는게 꿈이라던데."
그 말에 김두혁 회장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채권 이자는 얼마냐?"
"한... 10%쯤 됩니다."
"시중 은행에 그대로 가져가도 10%는 주는데 미쳤다고...!"
"만기일이 92년 10월 2일입니다. 채권 발행 예정일은 92년 8월 31일이고요. 정확히 1개월 만에 10%를 주는건데 시중은행이 그만큼 줍니까?"
".... 1년 뒤...? 너 대체 뭘 꾸미고 다니는게야?"
그 말에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돈 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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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김두혁 회장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낸 나는 바로 사무실로 돌아와...
"타케미치입니다."
"접니다. 김태준."
타케미치에게 바로 연락을 취했다.
"회장님!"
"잘 지냈습니까?"
"예. 저야... 잘 지내고 있지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잘 지낸다니 다행입니다. 혹시 이번에 내가 하는 일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일이라고 하시면...."
"정치인들과 만날일이 좀 생겼습니다."
"일본 쪽 정치인들 말씀이십니까?"
"예."
내 말에 타케미치가 말을 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예?"
"제가 바로 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내가 댱황한 표정으로 수화기 너머의 타케미치에게 묻자 타케미치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다케시타 선생을 모시고 있거든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나는 순간 말문을 잇지 못했다.
"다케시타라면... 그때 그 대장대신 말입니까?"
"지금은 총리까지 하시고 자민당 고문으로 물러난 분이죠. 그래도 아직 기력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그 말에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아직 도쿄지검 특수부에서 모르는 모양이군요."
내가 '그 건'이라며 돌려 말한 그것.
원 역사에서는 리크루트 사건이라 불리며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뇌물 수수사건이자,
내가 허영하를 이용해 돈세탁을 해주었던 그 사건이었다.
'버블이 붕괴한 지금. 그 건이 터지는 순간 허영하도, 자민당도 무사하지 못하지. 나야 중간에 연결이 되어있다고 해도 딱히 내 손을 거친게 없으니 걸리는게 없고...
이 참에 한 번 거하게 당겨봐야 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