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미팅 앤 미팅 (6)
애프터 파티는 본질적으로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방에 깔린 술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소음이 섞인 난잡함.
그 모든 것이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애프터 파티가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었다.
흔히 보기 힘든 탑 모델들과 그 모델들에게 인정받는 디자이너들이 풍기는 그 특유의 예술가적 분위기는 파티를 단순한 파티가 아닌 색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별세계 속.
원래라면 주인공 중 하나가 되어있어야 할 톰은 이방인이 되어 파티장 한 구석에서 깨작깨작 포도만 집어먹고 있었다.
"오는 거 맞아?"
톰의 절친한 친구이자, 톰의 연인이기도 한 보그지의 기자 리차드 버클리만이 그의 곁에서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러게 언행을 좀 조심하라고 늘 말을 하는데도."
"하... 그러게."
그렇게 톰의 경솔함을 질책한 리차드가 그의 손을 살짝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한 순간에 인종주의자로 몰릴 줄이야. 이참에...."
"됐어. 나를 위해서 굳이 그걸 할 필요는."
"하지만, 만약에라도 그... 동양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방법이 제일 좋지 않아?"
리차드의 걱정에 톰이 순간 눈빛을 바꾸고는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 그럴 분이 아니야. 무조건 오실거야."
"그럴 분...?"
내내 걱정과 수심에 차있던 눈빛이 한 순간에 희망과 광신으로 들어차자 리차드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뭐야... 그 마치 사랑에라도 빠진 것만 같은 표정은?"
"사랑? 아니... 이건 존경이고 경배야. 나 따위가 감히 그 분을 사랑한다는게 말이나 되겠어? 더군다나 널 두고 말이지.
내게 넌 사랑이지만, 내게 그 분은 스승과도 같은 분이거든."
그 말에 리차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마리화나 잎로 만든 시가렛트를 꺼내더니 입에 살짝 물고는 말을 이었다.
"...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왔길래 그러는 거야 대체?"
그 말에 톰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지...."
그렇게 태준과의 대화에 대해 말을 하려던 톰의 뒤로 오브라이언가의 영애. 앤 오브라이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스터 킴이 오십니다."
"오셨습니까?"
"예. 다만... 톰 당신이 협조해야 할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당신의 사과를 받고, 미스터 킴이 상당히 흡족해 하셨습니다. 해서 선물을 주고자 한다 하시니 그에 맞는 언사를 부탁드립니다."
"선물... 이라니요. 뭔가가 또 있는 겁니까?"
"뭔가라기 보다는 누구냐고 물어야 맞겠지요."
"누구?"
그렇게 톰이 되물음에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으려는 그 순간.
앤의 눈에 회장으로 들어오는 태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기 오시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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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으로 가기 전 톰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시장에서 '톰 포드'라는 브랜드의 입지를 다질 방법을 생각하던 나는 순간 재미있는 생각을 해 내고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혹시 제가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미국에 있는 한국인 중 입지전적인 인물.
그리고 미국의 영웅이자 동양계 미국인들의 큰 형님.
김영욱 대령을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원래라면 캘리포니아에 계셔야 할 분이었지만,
최근 태평양 아시아 가족 센터(Center for the Pacific Asian Family (CPAF) ; 태평양 지역 성폭력 피해 여성 지원 센터)의 대표에 취임하시게 되면서,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시는 상황이었기에 쉽게 찾아뵐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고액의 기부를 하겠다 하니 만사 제쳐두고 자네를 만나러는 왔네만, 나를 아는가? 한국에서는 그리 유명한 인물이 아닌데..."
"물론입니다. 2차대전의 영웅이자 제국주의자와 맞서 싸운 민족의 영웅을 제가 몰라볼리가 있나요."
"나는 미국인일세."
"예. 압니다. 하지만 그 피에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난감한 미소를 지어보인 김영욱 대령께서 말씀을 이으셨다.
"거 참.... 혈통 운운은 꽤 오랜만에 듣는데 말이지. 이거 꽤 비싼 만남이 되겠군."
"제가 그냥 온 것은 아니니, 그 말씀도 맞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저는 어르신의 결정에 따를 생각입니다."
"그래. 기부 건은 뭐 자네가 주고 싶은 만큼 주고, 내게 뭘 부탁할지나 들어보세."
"혹시 저와 함께 파티에 가실 생각 없으십니까? 거기 제가 편들어주고 싶은 친구가 하나 있어서요."
"파티... 말인가?"
내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인 일흔의 노장의 얼굴.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최대한 공손히 말을 이었다.
"예. 거기서 맞장구 좀 쳐 주십시오. 아시아 가족센터, 아시아 포스터 홈, 니세이 전우회에 각각 100만 달러씩 기부하겠습니다."
"거 참. 노인네를 돈으로 부려먹으면 좋은가?"
"그럴리가요. 거절하셔도 기부는 할 생각입니다. 좋은 일에 제 돈이 쓰이면 좋으니까요. 세금 혜택도 있고. 다만, 제가 편 들어주고 싶은 친구가 오해를 좀 사고 있어서요."
"오해?"
"예. 인종주의자라는 오해입니다. 누구보다 개방적인 친구인데 말이죠."
"그런가? 그럼 자네는 그 친구를 위해 돈을 쓰는 게로군."
"예. 그리고 그 돈이 다시 좋은 일에 쓰이니 아깝지도 않구요."
"좋네. 내 자네 장단에 춤을 춰주지."
그렇게 김영욱 대령께서 대표이사로 몸 담고 있는 태평양 아시아 가족센터에 100만달러의 기부를 약속함과 동시에,
그가 설립자로 있는 아시아 포스터 홈(이쪽은 아시안 인종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시민 단체였다.)에도 100만달러의 기부를 약속하고,
그에 더해 그의 동지들이자 세계 2차 대전기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니세이 전우회'에도 마찬가지로 100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한 뒤...
"여깁니다. 어르신."
김영욱 대령을 이곳, 구찌의 애프터 파티에 모셨다.
회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인의 등장.
그것도 한 켠에 빛나는 수훈십자훈장을 단 노인의 등장에 회장의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가라고는 차마 못하겠지. 미국이 어떤 나란데... 감히 퇴역군인, 그것도 훈장 수훈자를 내쫒을 수 있겠어.'
그 어색한 공기를 맡으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얼어붙은 공간 한 켠에서 나는 톰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반갑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톰. 여기야."
과하게 친한 체 하는 내 말투에 톰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어색하게 다가왔다.
"이분은 김영욱 대령님. 세계 2차대전의 영웅이자 최근에는 사회 활동가로 활동중인 분이야."
"당신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커널(colonel) 킴."
내 소개에 톰이 미국인들의 상투적인 군인에 대한 인사를 건네자 김영욱 대령 역시 반갑게 인사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이 친구가 말하던 그 친구인 모양이군."
"예?"
당황한 톰의 얼굴을 본 나는 빠르게 김영욱 대령께 맞장구를 쳐주며 말을 이었다.
"예. 이 친구가 바로 그 친구입니다. 패션계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최근에 차별반대 운동에 참가를 하고 있어서요. 대령님께 소개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그런가. 나 역시 아시아 포스터 홈이라는 시민단체를 설립해 자네와 같은 뜻을 펼치고 있네. 동지를 만난 기분이라 반갑군."
"예. 저도 반갑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둘간의 인사를 본 나는 바로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해서 이사장님을 소개도 해 드릴 겸 해서 이리로 모신 겁니다. 이 친구도 이사장님을 만나 뵙고 싶어 했구요."
"그런가."
어색한 분위기와 침묵 사이로 퍼지는 내 말은 톰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차별 철폐운동을 하는 운동가적 기질이 있음을 알리는 홍보가 되어 서서히 퍼져나갈 터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나와 톰. 김영욱 대령님이 모인 이 자리로 또 다른 백인 남성 하나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패션지 보그의 기자 리처드 버클리입니다. 대령님께서 어떻게 여길 오게 된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다고 해서 소개차 왔네. 이렇게 거창한 곳인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렇게 기자까지 달려드는 것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톰에게 살짝 엄지를 치켜세웠고,
그것을 본 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떠다 먹여준 기회를 잘 소화시키기 위해 기자와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예. 제가 태준 킴에게 부탁해 김영욱 대령님을 만나뵙게 해달라 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자, 전후에도 사회사업으로 우리 사회를 밝게 비추시는 우리시대 진정한 영웅을 이 자리에 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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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늘 나온 보그 특별판이예요. 노린대로 다 이뤄졌네요."
애프터 파티에서의 소동이 끝나고, 다음 날 아침.
카페에서 가볍게 커피를 마시던 내게 앤이 밖에서 사온 보그지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톰은 한 순간에 사회운동가가 되었고, 이번 패션 위크는 '정치적 올바름'을 주제로 한 것으로 변해버렸네요.
'영웅을 위한 패션'이라니.... 대단하네요 정말. 기자라는 족속들은.
그리고 그 기획을 톰이 이끈 것으로 나오다니... 진상을 아는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네요.
심지어 구찌도 이번 기사에 편승해서 소수 인종 여성에 대한 기부를 진행한다니..."
"내가 회장에서 말 한마디 내뱉은 걸 덮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겠지요. 어쨌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내 말을 들었을 테니까요.
이 바닥에서 소문 나는 속도가 어디 보통입니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요.
거기다 구찌 역시 기업 아닙니까? 안 그래도 후줄근해진 이미지를 이런 식으로라도 개선할 수 있으니 구찌로서도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화였을 겁니다."
"영웅을 돈으로 움직인게 불경스럽다는 생각은 안하세요?"
"그 점은 저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김영욱 대령께서도 좋아 하셨습니다."
"예?"
앤의 말에 내가 씩 웃으며 맞은 편에 있는 커피잔을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미국에서 소수인종이 당하는 차별이 어디 보통입니까? 이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인데 본인이 이용당했다고 화를 내시겠습니까?
외려 본인의 유명세를 이용해 더 큰 기부를 모을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말씀하시고는 가셨습니다."
내 말에 앤이 내가 가리킨 커피잔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만나뵌 분이 그럼..."
"예. 노령이시라 여기서 하루 머물고 가셨으니까요. 아침에 만나자고 하시기에 저도 여기 나와 있었던 겁니다."
내 말에 앤이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오늘 아침에 저희 아버지와 아침 약속이 있는 줄 뻔히 아시면서도 왜 카페에 나와 계시나 했더니...."
"아, 말 나온김에. 앤, 당신 아버님은 언제 오신답니까?"
"지금 막 공항에 도착하셨다고 들었어요. 이곳 호텔로 바로 오신다고 하셨으니 금방이겠죠."
"기대되는군요."
"저야 말로 기대가 커요.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그 말에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로버트에게 말 안하기를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