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미팅 앤 미팅 (5)
미국사회에서 차별주의자라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실제로 하는 것과 그렇다고 낙인 찍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기에 아시안 커뮤니티 혹은 유색인종 커뮤니티가 대거 밀집한 지역의 백인들이 늘 상 입에 달고 사는 소리가 바로....
"나도 아시안 친구 있어. 그 친구랑 내가 얼마나 친한데."
따위의 자기 변명이었다.
'나도 몇 번 들었던 말이고, 그 친구가 내가 되기도 했었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저항할 힘이 없을 때의 이야기.
상대가 강력한 힘을 가진 아시안일 경우에는 그런 변명 따위는 여러가지 의미로 불필요한 것이었다.
변명을 해봤자, 상대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끝이기도 하고,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알면, 애초에 변명을 할 상황을 백인 스스로가 만들지 않기도 하기에
말 그대로 불필요한 해명이었던 것이다.
"그... 저 제가 미스터 킴을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어서... 아! 저 아시안 친구들도..."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톰은 그런 불필요한 말을 구질구질하게 하고 있었다.
'전생에도 아시안 차별은 늘 있었으니.... 지금 시점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지.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런 말이 나왔을테지... 그런 톰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어느정도의 야만성과 공격성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기도 하고.
핵심은... 내가 그런 차별을 당할만큼 약하지 않았다는게... 톰에게 있어 불행인 거겠지.'
그렇게 톰의 구질구질한 변명에 대한 감상을 마음 속에 묻은 채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만...."
"그게... 미스터 킴을 불쾌하게 해드린 것 같아..."
"그건 십 년 전에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데 뭐하러 제가 불쾌감을 느끼겠습니까?"
그 말은 톰에게는 공포였는지 매우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톰에게 나는 슬쩍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인종주의자이든 뭐든 저랑은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인종주의자가 결코..."
"그럼 뭡니까?"
그 말에 톰이 말을 이었다.
"속물... 그저 속물일 뿐입니다. 저보다 못 난 사람을 우습게 알고 그랬을 뿐입니다. 그 조차도 잘 못 생각...."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래서 저 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인종주의자라는 말만 어떻게 거둬주신다면..."
"왜요? 속물보다 인종주의자가 더 역겨운 것이라 생각합니까? 속물도 인종주의자도 근거만 다를 뿐 차별은 똑같이 하지 않습니까?"
"예... 맞지요. 맞습니다만..."
당황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톰에게 나는 살짝 목을 꺾어 스트레칭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인종주의가 왜 철폐되고, 차별이 왜 악으로 규정되었는지 아십니까?"
"예?"
내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톰을 보며 나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들어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도덕적인 이유라던가 그런 것들은 명분이고. 실제 이유를 묻는 겁니다."
"왜...죠?"
"그것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니까."
"예?"
"덤으로 도덕적이기까지 하니 얼마나 이상적입니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톰이 나를 빤히 바라만 보자 나는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르침의 시작이었다.
"모든 것은 결국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죠.
제국주의 시절에는 시장을 넓히기 위해 식민지를 이곳 저곳 만들었고, 현대 사회에는 자유무역이라는 미명하에 각 국의 관세율을 무너뜨리려 하고 자신들의 상품을 이곳 저곳에 쑤셔넣으려 안달입니다."
"예.... 그야 그렇지요.."
뜬금 없는 경제 강의에 톰이 벙찐 표정으로 어색하게 대답하자 나는 들고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장만 늘어난다고 해결이 됩니까? 시장이 늘어난 만큼 생산량도 늘어나야 하고, 늘어난 생산량 만큼 다시 소비도 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별 철폐는 이 생산과 소비를 늘리는 핵심 전략인겁니다. 백인만이 자유민이고 유색인종들이 노예라면, 공장에서 혹은 자본가 밑에서 일할 사람이 반토막이 나죠. 거기다 소비시장도 반토막이 나는 겁니다.
자유민이 늘어야 자본가들 밑에서 일할 사람들이 늘어나고,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자본가들은 그들의 시간과 노동력을 살 수 있죠.
그리고 그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이 번 돈으로 자본가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을 사주고, 그렇게 부가 쌓이기 시작하는겁니다."
어찌보면 도덕이라는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지만, 톰의 입맛에는 아주 잘 맞는 말일 터였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대로 톰의 표정은 마치 내게 어떠한 가르침을 얻은 사람처럼 놀람과 경이가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톰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그저 '나는 너희와 다르다'를 어떻게든 보여주기 위해 안달난 사람처럼,
그 입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자위만을 해대는 당신을 보면 솔직히 내 입장에선 우스운 것을 넘어 안쓰러울 뿐입니다."
그 말에 톰이 고개를 숙인채 침묵했다.
나는 그런 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그런 값 싼 자위를 하느라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시궁창에 박아버린 것도 불쌍하고요."
".... 그렇습니까."
뭔가를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게 대항할 수 없기에 가만히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반성을 하는 것인지.
애매한 표정으로 애매하게 고개만 숙이고 있는 톰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남들과의 차이는 입이 아니라 능력과 돈으로 만드는 겁니다."
"예."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차이 만들어 볼 생각은 있습니까? 단, 앞으로 논란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약속은 해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에 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예. 당신의 재능을 제가 사겠습니다. 당신이 독립할 때, 당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에 투자를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덤으로 당신의 떨어진 위상도 복구를 해줘야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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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톰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나는 돌아가는 톰을 보며 앤에게 말을 이었다.
"이걸로 톰 포드는 제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확실히 미스터 킴. 당신에게 감화된 느낌을 받기는 했는데...
저 자가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말하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천박하기 이를데 없던데요."
"천박함과 유쾌함은 한 끗 차이니까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는 남들보다 위에 서려 안달난 머저리였지만... 이제는 아니겠지요.
본인도 깨달은 바가 있을 테니. 그런 깨달음이 톰의 디자인에도 어느 정도 반영은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톰 포드는 원 역사에서 고루해지고 흔해 빠진 것이라는 구찌의 이미지에 섹시한 이미지를 덧씌워 부활에 성공시킨 전력이 있다.
다만, 그 때도 '섹시'라는 이름으로 논란이 일어날 만한 디자인을 해 구설에 오른 적이 있었기에 한 번 쯤은 그를 다듬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
그랬기에 그를 구태여 내가 머무는 호텔에까지 끌어들여 일종의 훈계를 내렸던 것이었다.
'약간은 유치한 방법이었지만... 뭐 성공적으로 먹혔으니까. 내 쪽으로 끌어들이기도 했고.
그래도 뒷 맛이 쓰긴 하네. 괴롭히고 다시 구해주고. 이거 완전 스톡홀름 증후군을 이용하는 악당이 된 느낌이랄까....?'
그렇게 내가 앤과의 대화 사이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감상을 곱씹고 있던 그 때, 앤이 슬쩍 자신의 손에 들린 다른 모양의 초대장 두 장을 들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진짜 가시려구요? 여기에?"
"예. 애프터 파티라는 것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썩어도 준치라고... 무려 그 구찌가 하는 애프터파티인데. 거기에 약속 한 것도 있으니..."
그 말에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술은 적당히 해주세요. 내일 아침에 저희 아버지를 만나시게 될 거 거든요."
"뭐... 술 마실 틈이나 있겠습니까? 무려 오브라이언 가문의 영애가 옆에 있어서 인사 받기도 벅찰 것 같은데요.
그럼 우선은 좀 쉬어야 겠습니다. 애프터 파티를 가려면 체력이 좀 남아있어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애프터 파티 시간에 맞춰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앤과 남은 일정을 조율한 나는, 곧장 호텔 객실로 올라와 멀리 떨어져 고생하는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까?"
"여기는 별 일 없습니다. 오오와다 사장이 진행하는 지분교환 논의 덕분인지 연구원들에게도 상당히 호의적이구요. 저도 뭐...."
"혼자 와서 미안합니다. 퀀텀 펀드 쪽과 안면을 터야해서 혼자 움직였습니다."
내 말에 민영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안되셨죠."
약간은 섭섭함이 묻어나는 그 말에 나 역시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예. 로버트가 사람을 붙였더군요. 대놓고. 그래봐야 우리쪽으로 엮을 예정이라 딱히 신경은 쓰이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거추장스럽긴 하네요."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변명아닌 변명을 하며 민영을 달래주었다.
"아무래도 한국에 돌아가면 회장님 비서를 추가로 뽑기는 해야겠네요."
"예. 안 그래도 저도 그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외근비서, 내근비서 체제를 슬슬 갖출때가 됬으니까요."
그렇게 어색하게 말이 끝나고, 나는 그간의 일을 대강 말해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일단 오오와다 사장에게는 퀀텀 펀드 쪽에서 연락이 올 수 있다고 언질을 좀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십니까?"
"아직 미팅이 더 남았습니다. 오브라이언 가문의 사람과도 만나야 해서요."
"...그렇습니까?"
"조금만 더 고생해주시면 보답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추가적인 보답을 약속하며, 전화를 끊은 나는 테이블 한 쪽에 던져진 초대장을 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 일단은 톰의 이미지 추락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부터 생각을 해봐야 겠네. 절벽에서 떠밀었다가 구해준 것 까진 좋았는데 뒷 수습이 문제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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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이 호텔에서 고민을 하던 그 시각.
오오와다는 민영으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에 깜짝 놀라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퀀텀 펀드와 접촉하셨단 말입니까?"
"예. 그 오브라이언 가문의 영애 아가씨를 이용해 드러켄밀러라는 사람을 끌어냈다고 하더라구요.
오오와다 사장님의 메신저를 자처하셨다고 하니까... 그 부분은 오오와다 사장님께서 잘 처리해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에 오오와다 사장이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 참... 아직도 전 회장님을 따라가려면 먼 모양입니다. AMD건에 대한 것도 머리가 아픈데...."
"회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퀀텀 펀드 쪽은 본격적으로 92년도에 움직일 것이라 하더라구요.
금융에 대한 것은 잘 모르지만... 독일 통일과 영란은행, 그리고 ERM을 이용한 방법이라고 하셨으니... 연락이 오면 적당히 그에 맞춰 이야기를 나누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오오와다가 살짝 인상을 쓰며 생각하더니 이내 종이 한 장을 옆에서 빼 뭔가를 계산하고는 말을 이었다.
".... 회장님께선 영란은행을 공격하실 생각이신건가...?"
"예?"
오오와다의 혼잣말에 민영이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오오와다가 말을 이었다.
"아... 아닙니다. 또 뭐 들은 내용은 없습니까?"
"그 밖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 말에 오오와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민영씨도 저도 한동안은 엄청 바빠지겠군요."
"....지금보다 더 말인가요?"
"예. 아마 제 생각이 맞다면 회장님께선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일을 벌이실테니까요."
"이미 한국에서도 IT사업으로...."
그 말에 오오와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보단 수백배는 더 큰 일이 될 겁니다. IT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면... 이번 일은... 말 그대로 센소오(戦争과 錢争이 같은 발음인 것을 이용한 언어유희; 돈의 전쟁을 뜻함.)가 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