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쓸어담는 재벌가 서자-54화 (54/200)

054. 미팅 앤 미팅 (4)

뉴욕 패션 위크.

패션계가 올해는 이러이러한 스타일과 색이 유행할 겁니다라고 외치면서 실은 '이러이러한 스타일을 유행시킬거다'라고 말하는 일종의 광고행사다.

뉴욕을 시작으로, 런던, 밀라노, 파리로 이어지는 이 4대 패션 위크는 디자이너들에게도, 모델에게도 꿈의 무대인 동시에 일종의 시험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대 뒤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지금 저 레드카펫에서 잘난체 하며 멋을 부리는 모델들과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는 디자이너들이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레드 카펫 앞으로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탑 모델들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던 나는 앤에게 말을 이었다.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도 런웨이가 있지 않습니까?"

"예. 다른 패션지에서도 이 날에 맞춰서 패션위크를 여니까요. 애초에 시작 자체가 패션지 기자들의 프레스 위크에서 시작된 행사다보니..."

"그런데 왜 하필 여깁니까?"

"이번에는 여기에 구찌 신인 디자이너들이 대거 출품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에 나는 어째서 톰을 모르면서 톰을 통해 오오와다에게 이 초대장을 보낼 수 있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구찌와도 선이 있습니까?"

"직접적인 선은 아니예요. Investcorp라고 구찌의 지분을 사들이는 회사에 투자해서 간접적으로 선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죠."

"그렇군요. 어쩐지 명품이라고 해도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는데...

구태여 구찌의 초대장을 보냈다는 것에 약간은 의아해 하던 참이었습니다."

내 말에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그 이미지를 망쳐놓은 파울로 구찌는 꽤 돈을 많이 만졌으니까요."

"라이센싱 사업의 예시로 보여주고 싶었습니까?"

"예. 상업성과 브랜드 가치는 다른거니까요. 할스턴, 빌 브라스... 모두 이 런웨이에서 지방시, 디올 같은 최고급 브랜드와 경쟁하던 브랜드인건 아시나요? 그것도 뉴욕 같은 마이너 리그가 아니라 파리 같은 메이저 급 패션 위크에서 말이죠."

"여성 브랜드는 잘 모릅니다만 이름들은 들어 본 브랜드군요."

"예. 그리고 전자는 대중 브랜드화 되어 큰 돈을 벌었고... 후자의 브랜드는... 디올은 조금 예외겠지만 지방시의 경우에는 LVMH에 인수되는 최후를 맞았죠."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즉. 구찌는 포스트 할스턴이 될 것이다... 그런 말이군요."

"브랜드의 덩치가 있고 여태 쌓아온 이미지가 있으니 그보다 더 가지 않을까요?"

"그럼 패션계의 롤렉스가 될 것이라 보는 거군요. 적당한 대중성과 적당한 이미지. 만인의 명품."

"예. 최근 오트꾸튀르(맞춤형 고급 의류)로 콧대 높은 프랑스 브랜드들도 라이센싱만 안 한다 뿐이지 프레타포르테(기성복)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사조에 구찌가 제일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레드카펫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우리를 알아보고는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

"미스 오브라이언?"

정확히는 앤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남성.

메신저 역할을 했던 톰 포드였다.

"누구신지..."

"아, 전에 피터를 통해서 일을 받은 톰입니다."

"톰...?"

그렇게 톰이라는 이름을 들은 앤이 슬쩍 나를 돌아보자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미스터 오오와다를 통해 잘 전달 받았습니다. 미스터 포드."

내 말에 톰이 슬쩍 인상을 쓰더니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엇....?! 킴? 킴 태이준?"

나를 알아본 톰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와 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쩐 일로...? 미스 오브라이언과는 아는 사이야? 이거 의외인 걸?"

처음 보고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사이임에도 마치 자기가 위라는 듯이 내 어깨를 툭툭치며 아는 체를 하는 톰을 보며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여전히 쥐뿔도 없으면서 저 잘난 맛에 사는 군.'

내가 그렇게 십년전 '스튜디오 54'에서도 연신 잘난 체를 하며 내게 손가락질 하던 톰을 추억(?)하던 그때, 앤이 당황한 듯 톰을 제지하며 말했다.

"저... 미스터 포드."

그런 내 웃음에 당황한 앤이 톰을 말리듯 말을 걸었음에도, 톰의 거들먹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잘 되던 모델 일 때려치고 어디갔나 했더니 미스 오브라이언 밑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하긴 모델은 나이도 중요하니까 잘 결정했네. 피지컬이 아무리 좋아도 동양인은 동양인이니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지."

반가운 인사를 시작으로 10년전에 하던 이야기를 꺼낸 톰의 말은 점차 수위를 높여갔다.

"전에도 내가 말했었잖아? 공부도 잘하니까 어디 큰 기업에서 계산기나 붙들고 살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런웨이 기웃거려봐야 빛 보기 힘들다니까?

애초에 동양인은 패션에 대한 감각이 없어. 태생적으로 그렇달까? 태이준 너는 좀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봤자 타고난 한계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아니겠어?"

지금도 이 안 어울리는 스카프나 하고 말이야... 쯧. 에르메스라고 다 같은 에르메스가 아니라고."

그 변함 없는 거들먹거림과 인종차별을 가득 담은 힐난, 비꼼은 길게 이어졌다.

그 길고 긴 쓸데 없는 말을 내가 곧이 곧대로 들으며 그저 웃고 있기만 하자, 앤이 당황한 듯 톰의 말을 황급히 끊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만. 미스터 포드. 그만하세요."

"예?"

"그 분께 무례한 행동은 더는 용서못합니다."

"그...분?"

그 말에 톰이 벙찐 표정을 지어보이자 나는 슬쩍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앤(아마도 스카프에 대한 지적 때문이겠지.)을 보고는 다시 톰에게 말을 이었다.

"초대장 잘 받았습니다. 미스터 포드. 나름 신경 썼더군요. 위치도 런웨이 바로 앞이고. 구하느라 애 쓰셨을텐데... 따로 감사인사도 못 드렸군요."

그제서야 내가 쥐고 있던 초대장을 본 톰이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설마.... 테이준, 네가 그 귀빈이었어?"

그 말에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글세요. 귀빈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진짜 귀빈은 구찌가 여는 패션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을 것 같거든요.

지방시라던가... 아니면 메인이라 할 수 있는 크라운 플라자 타임스퀘어 (뉴욕 쿠튀르 패션위크 개최지이자 세계적인 관광 명소)에 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 비꼼에 톰이 아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기 미스터 킴....."

상당히 공손해진 표정과 말투에 나는 인자한 눈빛으로 톰을 바라보며 답했다.

"예. 미스터 포드."

"그.... 제가..."

그렇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톰을 뒤로한 나는 앤에게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혼잡한 것은 싫어서요. 앤. 들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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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패션쇼가 진행되는 내내 톰은 가시방석 그 자체였다.

오브라이언 가문의 영애에게 일을 부탁받아,

이름 모를 일본인에게 패션쇼 티켓을 전할 때만 해도,

톰은 자신의 성공이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왔음에 기대에 가득 차있었다.

패션계에서 말하는 황금 인맥, 금융가와의 인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전 죽은 앤디 워홀의 '돈을 버는 것이 예술'이라는 뉴욕의 예술사조에 걸맞은 행동이었으니 인맥을 쌓아 투자를 받는 것에 거리낌 따위는 없었다.

'여차하면 그 일본인에게 투자를 받을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자신이 생각했던 '귀빈'은 한국계 부호의 일개 고용인에 불과했고,

심지어 그 한국계 부호가 과거 자신이 아랫사람 취급하며 우습게 알던 태준이었기에

톰은 뭐라 말 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어떻게든 눈에 들기 위해 옆자리 티켓을 사들인 톰의 입장에서 이같이 당혹스러운 일은 없었던 것이었다.

'젠장... 그렇게 부자면서 왜 모델 일을 하고 있던거야 대체?! 왜! 동양인이라고 무시까지 당하면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던거지!? 설마 우리를 놀리려고 이러는 건가?

어떻게든 태준의 마음을 돌려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당혹감 탓이었을까.

톰은 과거의 태준을 원망하며 어떻게 태준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 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톰이 가시방석에서 태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태준의 반대편 옆자리에 앉아서 패션쇼를 구경하고 있던 앤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뭐지....? 톰이라는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알겠어... 그리고 입구에서 알아본 대로 구찌의 차기 수석디자이너 내정자라는 것도...

그런데 이 분위기는 뭐지? 미스터 킴을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습이라...

거기다 저런 무례한 인사를 미스터 킴이 꼭 만나봐야 할 사람으로 꼽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

그렇게 두 사람의 당혹감과 물리적 거리가 겹쳐지는 중간지점에 앉은 태준이 천진하게 웃음지으며 박수를 치자.

그제야 패션쇼가 끝났음을 인지한 두 사람이 함께 박수를 쳤다.

그렇게 패션쇼 내내 답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태준을 바라보자.

박수를 치던 태준이 앤을 바라보며 씩 웃고는 입모양만으로 말을 이었다.

- 살짝 톰에게 제가 머무는 호텔 위치를 알려주도록 하세요.

그 말에 앤이 고개를 슬쩍 끄덕이자, 태준이 미소지으며 반대편에 앉은 톰에게 말을 이었다.

"미스터 포드. 잘 봤습니다. 이번 기획... 당신이 낸겁니까?"

"아, 예. 제가..."

"과연 감각이 좋더군요."

"가..감사합니다."

"다만, 당신의 재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사람인지라..."

그 말에 톰이 죽어가는 표정을 얼굴에 띄우며 뭐라 말을 하려던 그 순간.

태준이 그의 말을 듣지도 않은채 무시하며 앤에게 말을 이었다.

"미스 오브라이언. 당신이 기대하라던 구찌의 부활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 미스터 킴. 아쉽게 되었습니다. 저희 쪽도 한번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요."

"망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그렇게 마치 톰이 들으라는 듯, 그리고 나아가 톰의 주변에 있는 디자이너 관계자가 들으라는 듯 말을 내뱉은 태준이 작게 소곤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레이시스트..."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들은 태준의 한 마디에 모든 시선이 톰을 향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톰은 좌절한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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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리에서 나와 내가 택시에 몸을 싣자 앤이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와 택시에 오르더니 말을 이었다.

"말씀 하신대로 미스터 포드에게 미스터 킴이 머무는 호텔을 알려주었습니다."

"잘 하셨네요."

"레이시스트라... 톰 그자가 많이 난감하겠더군요."

"미국에서 그만한 모욕은 없으니까요."

"공식석상에서 그것도 귀빈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사실상의 사망판정이죠. 이럴 목적으로 보려고 하신 겁니까? 과거의 악연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그럴 목적이었다면 따로 부르진 않았을 겁니다."

내 말에 앤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그럼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씀까지 하시면서...."

"글세요. 그건 톰이 직접 와봐야 알겠는데요. 방금 전 제 행동이 복수가 될지. 아니면, 톰에게 가르침이 될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택시는 침묵 속에서 빠르게 내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그렇게 호텔 앞 로비에 몸을 내린 나는 이어서 내리는 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당신 아버지는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지금 막 연락을 드릴 참이었으니... 아마 빠르면 내일 뵐 수 있겠죠."

"기대되는 군요."

"그건 저도 기대가 되는데... 아직 톰에 대한 건은 다 끝난게 아니지 않나요?"

그 말에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곧 끝날겁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은 끝까지 해내고 마는 성격을 가졌죠."

"그러니....!"

"그 말인 즉, 자신의 행동이 여태껏 옳지 않았던... 아니 맞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으면 금방 때려친다는 뜻이기도 하죠."

내 말에 앤이 당황한 듯 말을 멈추자 나는 앤에게 말을 이었다.

"실제로 그는 파슨스에서 건축을 전공한 남자입니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패션계로 온 데에는...'건축은 너무 진지해서 자신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죠.

실제로 늘상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니 맞을 겁니다. 그런 그가 레이시스트라는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벗고 싶어 내가 내민 동앗줄을 잡으러 올 겁니다."

그렇게 내가 말을 마치고 손가락으로 앤의 뒤를 가리키자.

앤의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홱 하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올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럴리가요. 다만 보이기에 알려드린 겁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그 말에 나는 슬쩍 앤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말을 이었다.

"다음은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뻔하다니요?"

앤의 되물음에 나는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둔 사람처럼 살짝 입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톰 포드의 재능을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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