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쓸어담는 재벌가 서자-49화 (49/200)

049. 월 스트리트 (2)

그렇게 대규모의 인수합병을 이뤄낸 미국 랜더스는 순식간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8억달러라는 돈을 한 번에 때려넣을 수 있는 일본계 투자은행의 등장은 월가를 진동시키기 충분했고,

그 관심 속에서 오오와다는 한 순간에 스타가 되어있었다.

"월가 데뷔를 8억 달러 규모 LBO로 시작하는 펀드라니.... 대단하군."

"그 LBO라는 것도 그저 돈으로 찍어 누른 건데 무슨. 1억 달러 더 부르고 성사 못시키면 그게 바보 아닌가?"

"그 돈을 가져다 쓴 건 소프트방코 쪽이지. 랜더스가 아니잖아. 랜더스 입장에선 소프트방코에서 그렇게 나와준 덕분에 더 이득을 본거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사주가 7억을 불렀다는데 8억을 쓴 건.... 좀."

"그렇게 무시할 것만은 아닌게, 그 덕에 잡음 없이 바로 인수한 것도 있고, 후에 평가금액이 10억달러 정도가 나왔으니 손해는 아닌거지.

아마 정교한 계산 아래 8억을 불러서 냉큼 채간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까지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나? 내가 볼 때는 그저 얻어 걸린 것 같던데 말이야."

"일본 쪽에 투자하는 다른 딜러들한테 물어봤는데, 오오와다 그 자가 일본을 무너뜨린 자라더군."

"일본을 무너뜨려? 그게 무슨 말이야?"

"일본 버블이 무너졌잖아 얼마전에. 그 버블을 이용하기 위한 금융상품을 설계하고 그대로 그 회사를 다른 증권사에 넘긴 뒤에 버블이 꺼지는 그 시점에 딱 맞춰서 숏 포지션에 배팅한 천재라더군."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좋아 숏 포지션을 맞추는 거지...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

숏 때렸다가 이득 보기 전에 골로 가는 펀드 매니저가 어디 한 둘이야? 근데 그걸 일개 개인이 해냈다고?

거기다, 일본이라면 얼마 전까지 파생상품의 천국이었는데... 지금 컴퓨터 수준으로도 계산이 안되는 그 복잡한 구조를 무슨 수로....?"

"동양의 신비같은게 아니겠나? 그 자의 사무실에 가본 사람이 그러던데 응접실이 일본풍으로 꾸며져 있다더군. 거기 직원들은 거기서 젠(禪) 수련을 하는 모양이야. 그자가 모시는 스승같은 분이 있는데...."

"닌자들이 수련한다는 그거 말하는 거야?"

"역시 닌자의 나라..... 금융도 닌자처럼 단칼에 해치운다... 뭐 그런건가...? 하기사 계산을 했다는 것 보단 그 편이 더 설득력 있긴 하네."

그리고 그런 스타가 되어버린 오오와다를 둘러싼 소문들 역시 일파만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사실에 가까운 것도.

너무나 터무니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실을 담고 있지는 못했다.

"소문에 대한 것은 착실히 흘렸겠지?"

"예. 안 그래도 혜성처럼 나타난 기업이라 그런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더군요. 따로 저희가 소문을 내지 않더라도 이미 소문이 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가 따로 뿌린 소문들 때문에 진짜 주인인 미스터 킴 보다는 미스터 오오와다가 더 많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요."

그리고 그 소문의 중심에는 골드만 삭스가 있었다.

유대계 자본으로 처음 시작한 122년 역사의 투자은행.

월 스트리트에서 무슨 일만 터지면 '골드먼 삭스 탓'을 하면 십중팔구는 맞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늘 문제와 화제의 중심에 선 골드만 삭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퀄컴을 물 먹인 걸 넘어서 아예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인 수완을 가진 자이니 말이지. 그러면서 딱히 노출은 없고."

그렇게 비서의 보고를 받은 로버트 루빈이 태준에 대해 평하자,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한 패션잡지를 내려놓았다.

"아주 노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태준이 몇년전 뉴욕 생활을 하며 찍은 패션화보가 담긴 잡지였다.

"뭔가 이건."

"여기 메인 표지 모델. 그 자가 미스터 킴입니다. 뉴욕주립대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찍은 거라더군요.

패션업계에서는 완전히 무명은 아닙니다. 나름 동양인 모델 중에서는 알려진 편이지요.

홀연히 사라졌다고는 해도 미스터 킴을 대체할 만한 동양인 모델이 지금껏 나오지도 않았구요."

비서의 보고에 잡지를 받아든 로버트가 허허 웃음지으며 말을 이었다.

"거 참. 생긴 것도 대단한 사람이었군. 모델이라.... 그 쪽은 인종차별이 꽤 심하지 않나?"

"금융계만 할까요."

"우리 쪽이야 좋은 의미로 하는 인종차별이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잖나. 동양인은 수학을 잘한다."

"그것도 엄연히 인종차별이지요. 뭐... 그런 인종차별도 이겨 낼 만큼 잘 생겼잖아요?"

"자네... 동양인 취향이었나?"

"저는 잘생긴 남자 취향입니다."

그 말에 로버트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뭐... 만나보면 알겠지. 말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답변은 왔나?"

"아직입니다. 아무래도 미스터 킴이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지라..."

"직업군인이었나? 한국은 군인이 겸업을 해도 되나보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는 민간인 신분입니다만... 한국의 병역 조건 중 이공계열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학생의 경우 군 면제를 신청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어서 이를 이용한 듯 보입니다.

때문에 출국에도 애를 먹고 있구요. 매번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그 말인 즉 나이가 상당히 어리다는 뜻인데...?"

"올해로 서른이라더군요."

"서른 살에 20억 달러가 넘는 자산가라... 대단한 성공이군."

"흔히 말하는 버블 퍼슨이니까요."

"언 싱커블 몰리(타이타닉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유명한 벼락부자)가 떠오르는 자로군. 아, 남자니까 그녀의 남편이라고 해야하나?"

"꽤나 잘 어울리는 별명이네요. 침몰하는 일본에서 적시에 내렸으니까요.

하지만 일본에서 번 돈만이 그의 전부는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투자에 크게 성공했거든요.

미국 유학시절에도 당시 기준 500만 달러를 벌어갔으니.... 보통 이상의 안목은 있는 자라고 생각해야겠지요.

미국에 건너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미국에 건너온게 갓 스물이었으니 뭘 하고 말고가 있었겠나? 뭐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을 보면 어딘가의 부잣집 도련님이겠지.

보는 안목도 남다른 것을 보면 그 자신도 보통내기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여하튼, 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알려주게. 나도 일정을 조정해야 할 수 있으니."

-----

로버트 루빈을 만나기 위해 일정을 잡는 것은 순탄치 않았다.

"승인이 안된다고요?"

"예. 학술회의차 일본을 자주 방문하셨더군요. 당연히 사유가 있는 만큼 승인을 해드렸지만....

자주 가는 일본도 아니고 이번에는 미국이다보니... 거기다 사유도 지난번 처럼 학술 회의가 아니라 견학이지 않습니까."

"제 전공이 IT니 당연히 최신 기술을...."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병무청 방침이 그래서...."

그렇게 지지부진.

병무청과 밀당을 계속 한 끝에 결국....

"그래서... 나까지 함께 가자는게냐?"

"예. AMD측에 견학 요청을 해뒀습니다. 견학 일정에 맞춰 컴공과 학생들끼리 한 번..."

컴공과 소속 석박사를 포함해 전길남 박사를 포함한 교수진들까지 전부 미국으로 향하게 되는 일정을 꾸미게 되었다.

"거 참. 네가 돈이 많은 건 알고 있었다만... 이건 좀 과한것 아니냐?"

"다 투자라고 생각하면 되지요. 이렇게 후배들 한테 인심 좀 써두면 유니버스에 오고 싶어하는 친구들도 늘어날 것 아닙니까?"

"덤으로 교수들도 너한테 설설 기고 말이지?"

"뭘 또 그렇게 까지 생각하십니까? 다 애교심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전부 제 스승님들인데 제가 어떻게 교수님들을 설설 기게 만들겠습니까. 제가 설설 기면 설설 기었지요."

"뭐... 이참에 나도 간만에 미국에 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니 좋다만... 네 술수에 놀아나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게 공항에서 한 소리를 들은 나는 슬쩍 멀리서 나를 지키고 선 민영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참에 한국항공 퍼스트 클래스가 미국 델타 항공에 비해 얼마나 좋은지 비교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습니까?"

"이놈아 퍼스트 클래스 처음 타본다고 놀리는게냐?"

"하하."

그렇게 대화를 마친 나는 슬쩍 화장실을 가는체 하며 멀찍이 떨어진 민영에게 다가가 물었다.

"일정 조율은 되었습니까?"

"예. 일정 첫날 저녁 힐튼 호텔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쪽에서도 꽤 우리 사정을 많이 봐줬군요. 미국을 횡단해서 오겠다니."

"그 쪽에서 요청한 면담이니까요. 오히려 뉴욕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에서 만나자고 하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렷지만...

'가보면 알겠지. 무슨 생각인지는.'

만나보면 알 일이었기에 나는 궁금증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일정을 조율하느라 고생한 민영을 치하하는 말을 건넸다.

"이 후 일정하고 꼬이지 않게 잘 처리했네요."

"오오와다 사장님이 애 많이 쓰셨죠. AMD쪽에 견학 신청을 넣은 것도 오오와다 사장님이었으니까요."

"오오와다 사장이?"

"예. 투자의사를 타진하면서 은근슬쩍 견학신청을 넣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투자라... 꽤 괜찮은 기업을 골랐네요."

"퀄컴의 사례를 들면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아무래도 생산 기반이 빈약하지만 연구 실적이 좋은 우리 쪽과 통신 분야의 신흥강자로 떠오르는 퀄컴, 그리고 인텔 뒤 꽁무니만 쫒고 있는 AMD 이렇게 셋이서 특허공유를 하며 일종의 얼라이언스를 형성하는 신성장 전략을 제안했답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무표정하게 국어책 읽듯 준비한 브리핑을 하는 민영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민영씨는 본인이 얼마나 엄청난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고.

민영이 지금 한 브리핑은 내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AMD측에서 견학을 승인했을때 뭔가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로 큰 일일 줄은 몰랐는데... 잘 하면 원래 계획했던 일이 더 쉽게 풀릴 수도 있겠어.'

AMD가 인텔이 내놓는 CPU에 대한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나 하는 기업이라고 무시할 기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산 능력부터 설계까지... 아무리 싼 맛에 쓰는 AMD라고는 해도 어쨌든 고정적인 수요가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알짜배기 기업이 QULAB 합류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내게는 엄청난 희소식이지.

물론... 왜 우리쪽에 붙으려 하는지를 알아야 하겠지만...'

그렇게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 민영이 보고를 마치고는 품에서 티켓 한 장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오오와다 사장님께서 인편으로 보내오신 겁니다."

"인편으로요?"

"예. 일정 마지막 날의 뉴욕행 티켓과...."

"이건....뉴욕 S/S 패션위크 티켓 아닙니까?"

"예. 오오와다 사장님께서 양복을 사러 가셨다가 알게 된 디자이너가 선물로 준 것이라더군요. 시간 날 때 한 번 오시라고...."

"그 디자이너는 누구랍니까?"

"우연히 구찌 매장에서 만난 분이었다고 하더군요. 톰 포드라고 구찌의 매장 디자인을 담당하는....."

그 말에 나는 인상을 확 구기며 말을 이었다.

"톰... 포드요?"

"아는 분이십니까?"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한창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1981년 겨울.

알바로 패션잡지의 모델을 하던 때에 파티에 초대받아 갔던 나이트클럽 '스튜디오 54'에서 내게 진상을 부렸던 놈이자....

'미래에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릴 놈'이었다.

당시에는 딱히 패션 쪽과 엮일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기에 그저 악연이겠거니 하고 지나갔던 일이.....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렇게 돌고 돌아 다시 내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쪽도 일정을 하는 것으로..."

"예. 그렇게 잡아주세요. 거... 참 파란 만장한 미국행이 되겠군요."

"저는 오오와다 사장님께 전화가 왔을 때 부터 이미 각오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네요."

"하하... 그럼 이따가 기내에서 뵙죠. 제 옆자리 맞죠?"

"예. 교수님들은 퍼스트 클래스 맨 앞 칸 창가지리, 저와 회장님은 통로 좌석으로 해서 바로 붙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조치했습니다.

다른 학우분들은 전부 비지니스 클래스구요. 동선이 겹칠 일도 따로 눈에 뜨일 일도 없게 잘 배치했습니다."

"좋네요. 그럼 이따가 자리에 타서 마저 이야기 하도록 하죠."

그렇게 민영과 대화를 마친 나는 슬쩍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며 카이스트 멤버들과 합류하여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출국장 너머 비행기에 오른 나와 일행들은 열 두 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전 세계의 괴짜들이 모인 실리콘밸리에 첫 발을 내딛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