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점화 (5)
태준이 서류를 전달받던 그 시각. 서울 평창동.
"전했나?"
김두혁 회장은 남향으로 나있는 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타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에 꽂은채 말을 이었다.
"예. 그제 국제우편으로 보냈으니 바로 받아서 전달했을겁니다. 작은 며느님에 대한 건도... 들으셨겠죠."
이어진 박승철 이사의 보고에 김두혁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희정, 정두황 때도 이렇게 압박을 받은 적이 없었어. 아니 정확히는 압박을 받을 일이 없었다고 봐야지.
알아서 돈 가져다 바쳤고, 둘째 놈은.... 내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심회 핵심인 노대호의 여동생과 결혼을 했으니.
그런데 감히 나를 넘어 내 손자에게 까지 손을 뻗다니.... 이건 확실히 선을 넘은거지. 거기에 노대호 본인도 아닌 노영숙이 고 년이 나대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고."
말은 차분한 것이었지만, 그 차분한 말 속에 담긴 감정은 분기탱천 그 자체였다.
박승철 이사는 조용히 타오르는 회장의 분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게 뭐 있어. 오히려 잘 해줬지. 하려고 하는 놈은 어떻게든 하게 되어있어. 큰 일 나기 전에 막았으면 된거야."
"전략 3부에서 잘 움직여준 덕분입니다. 제가 한 일은 없구요."
그 말에 회장이 어두운 표정 아래로 희미한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전략 3부에서는 아예 태준이 쪽으로 붙었나보지?"
"예. 전략 2부가 김석현 사장님을 밀고 있는 모양새인지라 자연히 민혁 도련님을 밀 거라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민혁 도련님이 아직... 실적이 없으신지라. 아무래도 눈에 띄는 실적을 보이는 태준 도련님께 마음이 가겠지요.
더구나 회장님께서 아직 차기를 논할 만큼 쇠약해지신게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도 많겠다...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봤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설사 실패한다 한들 태준이가 3부 놈들을 데리고 가서 따로 독립할 수도 있는거고."
"예. 3부 내에서 벌어지는 자세한 내부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저희 비서실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애초에 민혁 도련님이야 아직도 미국 유학중이시고, 민식 도련님은... 아직도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시고 있는데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니....
민정 아가씨는 아직 중학생이시라 애초에 후보에도 못올라 오고 계시는 형국이기도 하고요.
남는 분은 결국 태준 도련님 뿐이긴 합니다. 3부 입장에서는."
"고얀 놈들. 머리 좋고 쌩쌩한 놈들 뽑아다 팀으로 묶어놨더니 뒤로 호박씨나 까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김두혁 회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자네가 보고 뽑은 놈들이라 눈깔은 다 달린 모양이네. 태준이는 엄밀히 따지면 아직 인정 받지 못해서 해외나 도는 처지라...
정치적 판단을 했다면 민식이를 단일 후보로 놓고 자기들이 판을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태준이를 골랐다는 건 싹수가 보이는 놈은 그 놈 하나 뿐이란거 아니겠어?"
태준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일까.
김두혁 회장은 풀어진 얼굴을 하고는 이내 손짓으로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그렇게 박승철 이사에게 펜과 종이를 받아든 김두혁 회장이 그린 것은....
- 전략실 개편안 -
비서실 직할 전략기획본부 (구 전략 1부)
전략 1부 (김석현-김민혁 지지, 구 전략 2부)
기획 1부 (김석훈-김민식 감시, 신설)
전략 2부 (김석민-김민정 지지, 신설)
전략 3부 (김태준 지지, 현행 유지)
전략실 개편안이라는 이름의 후계자 명단이자,
"이대로 개편해. 봤으면 이 자리서 소각하고 가고."
태준에게 던지는 두 번째 메시지였다.
'정식으로 링 위로 초대할테니 어디 다른 데 갈 생각은 집어쳐라. 태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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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혁 회장이 보낸 두 번째 초대장.
그것은 분명 일본으로 서서히 향하고 있었지만, 중간에서 그 초대장의 내용을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개편?"
노영숙이었다.
"예. 이번에 전략실을 개편한다는...."
"전략실이라니... 형님네 편만 드는 그 버러지 같은 놈들 말이야?! 하! 아주 이제는 후계구도를 확정지어 버리시겠다는 건가?!"
시립한 남자에게 보고를 받은 노영숙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시립한 남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시립한 남자가 분노에 가득찬 노영숙의 외침을 자연스럽게 흘러내며 퍽 조심스런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입이 취하는 태도와는 달리 그 표정이나 행동거지만큼은 당당했기에 노영숙은 인상을 찌푸리며 후 하고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계속해봐요."
그 말에 시립한 남자가 보고서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13페이지 부터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노영숙이 보고서를 팔락이며 13페이지를 펼치자 남자가 보고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저희 요원이 태균 인사팀에 잠입해 얻어낸 자료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버님 직속 전략실이 아예 본부로 올라갔고.... 형님네가 1부.... 동서네가 2부... 그리고... 그 첩년 자식이 3부?!"
"예. 그리고 여기 보시면... 사모님과 사장님을 전담하는 기관이 기획1부로 되어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그 말에 시립한 남자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이며 말을 이었다.
"두 가지 경우입니다. 숫자에 집중할 경우와 명칭에 집중할 경우.
우선 첫 번째. 숫자에 집중할 경우에는 상황이 상당히 개선된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전략실 체제에서 1부는 김두황 회장을 보좌하는 사실상 제 2 비서실이었고, 2부는 회장님의 자제들을 보좌, 3부는 회장님의 손자분들을 보좌해왔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숫자가 같다는 것은 사실상 같은 항렬로 본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이는..."
"동등한 경쟁자로 볼 수 있다?"
"그렇습니다. 후계 경쟁에서 동등한 입장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김석현 물산 사장과 본격적인 경쟁을 해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2부로 올라선 김석민 이사는... 사실상 예비 후보군으로 볼 수 있겠죠. 3부는 말할 것도 없구요.
이 경우에 걱정하시는 김태준씨의 입지는 사실상 '서자에 대한 배려'로 볼 수 있을 겁니다.
혈육을 아끼는 김두혁 회장의 입장에서, 서자이기는 하나 본인의 핏줄인데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리고.. 사모님과의 빅딜로 태균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될 김태준씨를 향한 차별을 막기 위한 정책이겠지요."
그 말에 노영숙이 살짝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명칭에 집중할 경우에는 어떤 의미죠?"
"명칭에 집중할 경우에는... 좋게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봐요."
"전략과 기획. 직무적으로만 보면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재벌가가 그렇듯 사전적 의미의 직무분류가 아닌.... 군으로 따지면 참모실에 가까운 운용양태를 보이기에 해석을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의 전략실이... 소위 '뒤를 닦아 주는 일'을 해왔다는 점,
그리고 초기 전략실 창설 당시 김두혁 회장이 했다는 말처럼 '너희가 왕을 정해라'와 같은 식의 기조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은 제대로 된 후계자로서 인정했다는 것이고....
기획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은....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후계구도에 방해되는 인물을 막기 위한 견제기관으로서..."
그렇게 남자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노영숙이 노기를 넘어선 광기어린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미친 노친네가 거래를 마쳐놓고 지금 우리를 견제한다... 뭐 이런 건가요?!"
"...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쪽 해석은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높지 않다니!? 기획이 견제의 의미라면서요!"
"그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태준씨가 후계 후보에 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출인데다, 아직 20대고, 거기에 뛰어난 머리로 학업에 대한 성취가 있어 국내에는 몇 안되는 전산학 석사이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학업적 성취일 뿐입니다.
그런 류의 실적으로 태균의 후계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거기에 김두혁 회장의 나이가 20년 생이니 올해로 일흔입니다.
언제 숨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인데, 그렇게 새파랗게 어린 손자, 그것도 서출을 후계구도에 올릴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주들이 가만히 있을리도 없구요.
설사 김두혁 회장이 노망이 나서 후계구도에 올렸다 한들 김두혁 회장에게는 장성한 40대 아들들이 떡 하니 있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무엇보다... 김태준씨는 태균 주식도 없습니다. 자연히 후계경쟁도 불가능하지요.
올린다 한들 회장 사후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주식 싸움으로 뒤집힐 운명인데요.
김두혁 회장 사후에 상속될 지분이나 여러가지 상황을 참고해본다면, 이 해석은 가능성 자체가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 심기 불편하게 말을 꺼낸거죠?"
"높지 않다고 해서 보고하지 않는 경우는 저희 아세아문화원에는 없습니다."
그 말에 안심한 듯 노영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안심해도 되겠군요."
그 말에 남자는 침묵을 고수했다.
이유는 단 하나.
'이문동쪽 정보를 믿을 수 없으니 확답은 못하지만, 그래도 전하긴 했으니까.'
이문동. 그러니까 안기부의 국제파트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불신 어린 판단 배경에는 노대호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시작된 '이미지 개선 작업'의 일환으로 힘이 약해진 국내파트(남산)라는 내부적 요인과,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국제파트(이문동)가 국내파트의 힘이 약해진 것을 빌미로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외부적 요인이 깔려있었다.
'일본 금융계의 악마라는 소문....? 관련 정보라고는 타블로이드지에서 다룬 음모론 기사만 던져주고는 무슨.
1국장님을 묻으려고 수작질을 부리려면 정성이라도 들이던가. 어디서 말도 안되는 찌라시를 조작해서는.... 쯧.
믿게 만드려면 자리 수라도 몇 줄이던가 해야지. 500억엔대의 거부라는게 말이 되나. 겨우 스물 아홉 살 먹은 애새끼가.'
그리고 그런 안기부의 내부환경이 태준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정권의 최측근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국제파트쪽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수집해 국내파트에 넘겨주었지만,
정치권력의 사냥개 노릇만 하던 국내파트에서 이를 국내파트를 향한 함정 내지는 공격으로 받아들여 묵살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묵살 덕분에,
"일단은 안심이네요. 그럼 아버님 장단에 조금 맞춰주는 시늉은 할 필요가 있겠어요."
노영숙은 안심할 수 있었고,
"예. 김태준씨가 국내로 들어오고 난 이후에 따로 견제 조치를 생각해봐도 늦지 않습니다. 일단은 귀국에 맞춰 바로 가볍게 견제구 날릴 준비는 해두었습니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범위 내에서요."
남자 역시 쓸데 없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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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들린 것.
그것은 한 달 뒤의 미래날짜로 되어있는 전자 쪽 인사공고문이었다.
- 직위 : 부사장
그걸 본 나는 바로 김두혁 회장이 순순히 거래를 받아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작 그 따위 어줍잖은 거래를 하고는 뿌듯해 했을,
그리고 그런 사실을 내게 넌지시 알리며 내가 만족스러워 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만족해했을,
김두혁 회장의 얼굴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아 퍽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웃었다.
회장의 그 빤한 의도에 대한 실망을 담아,
그리고 당연히 또 다시 배신당할 것을 알면서 일말의 기대를 품은 나에 대한 실망을 담아,
최대한 거칠고, 최대한 격렬하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미친 놈처럼 대한해협 건너편에 있을 김두혁 회장을 향해,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준 나는 일순간에 표정을 훅 하고 굳히며 말을 이었다.
"또 다른 딜을 했다. 그런 걸 내게 알리고 싶었답니까?"
그렇게 내가 한참을 웃다말고 뚝 하고 정색하며 말하자, 신병철 계장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전달하라 지시를 받고 전달했을 뿐, 그 안의 내용은 잘 모릅니다."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는 인사공고문을 접어 품에 넣으며 말했다.
"의도대로 '이해는 했다'고 전해주십시오."
"말씀 그대로 전하면 되겠습니까?"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내 말의 속 뜻을 간만에 시원하게 이해하는 사람을 만난 탓이었을까.
나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숨소리 하나 빼지 말고 그대로 전달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신병철 계장이 물러나고, 혼자 있게된 방 안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전생의 기억만 믿고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을거라 믿은, 할아버지.... 아니, 김두혁 회장이 보여준 그 알량한 양심을 믿은 내가 등신 천치 새끼였지."
자연스럽게 새어나오는 탄식과 한탄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메캐하게 깔린 탄식과 한탄 속에서 나는 차갑게 식은채 냉정하게
"제대로 살면 된다는 결심을 잊어버린 게 최대 실수였어.
아니, 그 빌어먹을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게 근본 원인이겠지.
이제는 노예가 아닌데도, 노예처럼 아무 생각없이, 기회가 시키는 대로 돈 벌이에 몸을 맡긴 노예근성. 그래. 그게 문제였어."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지금부터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 어차피 내 최대 무기는 미래의 흐름을 알고 있다는 거지 어줍잖은 딜로 얻은 10억 따위가 아니니까.
어머니가 위협 당하고도 그저 분노하고 앉아 있어선 전생과 다를 바 없지. 그래... 달라지려면 완전히 달라져야 해.
'혹시'라는 헛된 망상 따윈 오늘 부로 버린다. 태균.... 그 집구석은 역시 '병균'만도 못한 쓰레기들이니까."
반성이라는 출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출구 앞에서 나는.
"김석훈, 김민식을 재기도 불가능 하게 정확히 10년.. 아니 5년 안에 무너뜨리겠어. IMF도 보지 못하고 처절하게 망해서 변명거리조차 없게. 완벽하게.
그러려면... 그래. 우선은 노영숙의 가장 큰 보물...."
더는 착한 척, 명분이나 찾는 호구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김민식부터 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