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점화 (4)
NTT 주식 매각은 아주 느릿하게 이루어졌다.
최대한의 이득을 얻기 위해, 그리고 내 주식 처분이 버블붕괴의 신호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몸을 뺄 시간은 마련해야 하니까. 모름지기 공격이란 내가 얻어맞지 않는 거리에서 행하는 법이다.
"한 달 보름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워낙에 인기있는 주식이라 내놓는대로 팔리고는 있습니만, 문제는 나오는 물량이 적어도 너무 적다는게 문제입니다."
"기간은 아직 충분하니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하세요."
그렇게 오오와다를 통해 NTT 보유주식을 처분하며 학업에 열중하던 어느날,
내 앞에 전생에도 현생에도 처음보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까?"
"정확히는 박이사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저는 말단이라서요."
그렇게 말을 건넨 남자가 내민 명함에는 '태균물산 전략실 3부 계장 신병철'이라 새겨져 있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 하시죠."
그렇게 신병철 계장에게 자리를 권한 나는 룸 서비스로 차를 주문한 뒤 돌아와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겁니까?"
"도련님께서 일본에 오신 이후부터 줄 곧 일본 지사에 파견 나와 있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어지간히 못미더우신 모양입니다."
"그런건 아닙니다. 회장님의 자손이라면 응당 받는 케어일 뿐이니까요."
그 말에 나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울컥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서출에게도 이런 극진한 케어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서출이 중요한게 아니라 회장님의 핏줄이라는 점이 중요하지요. 어느 시대에나 왕의 핏줄은 귀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리 따지면 저는 대군(大君)이 아니라 군(君)쯤 되는 신분인데 구태여 이렇게까지 케어가 필요하겠습니까? 조선시대에도 군(君)은 나가 살면서 신경도 안 썼잖습니까."
"글세요. 높으신 분의 생각을 감히 제가 재단하는 것도 웃기지마는, 그럼에도 허락해 주신다면 말씀 올리겠습니다."
나는 과장된 태도로 말하는 신병철 계장의 태도를 보며 우스움과 놀라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이런 오그라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에 대한 우스움.
'이런 오그라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게 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놀라움이 그것이었다.
그런 상반된 감정을 품은 채, 나는 신병철 계장에게 그가 원한대로 '허가'를 내려주었다.
"말씀해보세요. 편하게."
"우선, 회장님. 그러니까 우리 태균의 왕이신 김두혁 회장님에게 있어 서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서얼이 중요하지 않다? 딱히 그래보이진 않던데요."
"외부에 드러내는 것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그렇겠지요. 어찌 되었든 서자가 있다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이고 단락적인 것에 불과하죠.
절대 핵심이 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왕의 핏줄이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핵심기능.
그것은 다스리는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왕국을 물려 받아 더 크게, 제국으로 키워낼 수 있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과 능력은 적서를 구분하지 않지요."
그리고 허가와 함께 이어진 설명은 공감하긴 어려워도 설득력은 있었다.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전생을 살고 왔기 때문에 가지는 편견...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있자, 신병철 계장이 말을 이었다.
"그런 면에서 도련님은 충분히 저희 전략실의 주요 인물이십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회장님께서 처음 전략실을 만드신 뒤에 말씀하신 전략실의 의의에 정확하게 부합하시는 분이랄까요."
"그게 뭡니까?"
"'내 핏줄만이 태균의 왕이 될 수 있다. 단, 왕을 고르는 것은 너희다. 너희가 생각할 때 왕의 재목인 사람을 골라 보필해라. 너희들 눈에 차지 않는다 싶으면 너희 눈에 차도록 뒤에서 만들어주고.' 그게 회장님 말씀이셨습니다.
뭐... 저도 선배들에게 전해들은 내용이라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는 그 오그라드는 대사를 듣고는 왠지 김두혁 회장의 흑역사 영상을 본 것만 같아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 말을 부끄러하기는 커녕 당연하다 여길지도 모르지.
왕을 자칭할 정도라면....군왕무치(君王無恥)를 주장해도 이상할 건 아니니까.
거 참... 어머니께 했던 그 사과면 진짜 엄청 비싼 사과였겠네. 그 양반 한테는.'
그렇게 내가 김두혁 회장이 했다는 말을 곱씹으며 생각하다 문득 신병철 계장의 앞서 말한 말에 의미를 깨닫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전략실에서는 나를 차기 회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뜻입니까?"
"정확히는 전략 3부. 그러니까 회장님의 3세를 모시는 저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른 도련님들은... 글세요. 적어도 모시고 싶은 분들은 아니죠. 사내 정치적으로나 도련님들 개인적으로나."
그 말에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엮이는 것도 짜증이 나는 판에 태균의 회장이라니.
할아버지라 불러주는 것도, 그 인연을 유지하는 것도 어쨌든 전생에 나에게 나름의 편의를 제공해주었다는 점과 현생의 나의 억지성 거래에도 흔쾌히 응해주었다는 점,
그리고 내 아비되는 자의 생각과는 달리, 어찌 되었든 자신의 혈육으로서 할 수 있는 정을 다 보여주었기 때문이지 진심으로 그 집안이 좋아서 부르는게 아니다.
'무엇보다 어머니. 어머니가 지금 회장 그늘에 있으니...'
그련 배경들 속에서, 전생에는 알지 못했던 태균 내부 기관이 불쑥 나타나 뜬금없이 나를 자신들의 미래라 여기니...
나로서는 짜증과 황당함, 그리고 그 감정의 격류로 인한 피곤함이 몰려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신병철 계장이 말을 이었다.
"제 개인적인 판단을 말하는 것을 아까 허가해 주셨으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물론 저는 도련님께서 태균의 왕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눈치를 보고 말하는 겁니까?"
"아뇨. 그간의 행보를 태균의 그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도련님께 태균이라는 왕좌는 작아보였거든요.
그간의 행보를 보면... 물론 태균 사람으로서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제 솔직한 심정은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과장된 표현을 일삼는 신병철 계장을 보며 속으로 솟구치는 짜증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화제를 꺼낸게 나였고, 광대짓에 가까운 그 과도한 태도에 화를 내기에도 애매했으니까.
'이 양반이 일본에 오래 붙어있어서 이렇게 오버스러운가...? 아니면 그냥 성격이 그런건가? 이대로 가다간 본론은 커녕 아무 말이나 한참 주고 받다 끝나겠네.'
그렇게 내가 오갈데 없는 짜증을 흩어내며 화제를 돌리려던 그때 신병철 계장이 눈치 좋게 화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는 서론이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전략 3부 계장으로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전략 3부의 자체적인 보고입니다. 도련님의 모친 되시는 박연수님을 향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차분하게 던져진 보고는 내 역린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감히 내 어머니를 건드릴 사람.
그것도 할아버지인 김두혁 회장의 보이지 않는 보호를 뚫어내고 어머니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시점에는 딱 한 사람 뿐이었다.
"노영숙입니까?"
"예. 한창 바쁘신 와중이라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작년에 대선이 있었습니다."
"노대호가 당선이 되었겠지요. 각자의 이상이 다른 운동권 인사들이 서로 양보를 할 리가 없으니까요."
"예. 정확히 보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운동권 인사들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야권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자면 사실상 야권의 승리로 봐야하니까요.
그리고 이 사실상의 패배를 노대호 대통령이 모를리가 없습니다.
선거기간 내내 보통 사람을 자처하며 군부독재의 종식과 문민통치를 약속하고, 당선이후에도 정두황 정권과 선을 그으며 그런 기조를 지속적으로 내세우긴 했는데...
사실 그 근본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해서 그 근본을 버리지 못하고 제 어머니를 건드렸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런 정황이 포착된 수준이긴 합니다. 사고도 없었고요.
회장님께서 최근에 박연수님께 선물로 자가용 하나를 보내셨는데 브레이크 패드가 파손된 상태였음을 저희 전략 3부의 사원이 발견해 조치했기에 사고가 없었던 것이지만요.
조사 결과 운송 중 실수라고 결론이 나긴 했습니다만...."
나는 그 말에 차갑게 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 없죠."
"예. 그럴리가 없습니다. 무려 회장님 선물입니다.
당연히 검수는 물론이고 안전진단까지 전부 이뤄진 상태에서 인도되었고, 인도 이후에도 추가적인 정기 점진을 주단위로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의도적인 파손이지요.
그리고 그런 공작을 태균의 시야 밖에서 할 수 있는 집단은... 당연히 청와대구요.
물론 시국이 시국이고, 올림픽으로 남들 눈도 잔뜩 몰려있으니 청와대 직통으로 이뤄졌을리는 없습니다.
아마 노영숙 사모님께서 혈육이라는 이유로 사사로이 요구를 한 것을 아랫선에서 충성심에 들어준 것이겠지요. 물론 그것 만으로도 이미 문제이긴 합니다만....
애초에 박연수 님께서 면허 자체가 없음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 공격은 공격 축에도 못끼는 수준입니다. 경고성 메시지라고 보는 편이 옳겠지요. 도련님을 향한."
"뭐 경고니까 내가 참아야 한답니까? 아니면 뭐 감사하기라도 해야 한답니까?"
이어진 보고에 내가 주먹을 꽉 쥐며 빈정대자 신병철 계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요. 그저 그렇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알 수 있는 사실도 있지 않습니까?"
신병철 계장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내가 어머니가 공격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미래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대호가 대통령이 되고 최대한 유하게 나왔다는 점.
그리고 그에 더해 노대호의 일가친척 모두가 몸을 사리며 조심했다는 점.
노영숙 역시 눈치가 있기에 함부로 이렇게 나온 적이 없었다는 점.
이 모든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 생에도 그럴 것이라 안이하게 대처했던 것이었다.
'내가 틀렸지.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다른 상황.
전생에 노비 처럼 부림당하며, 어떻게든 눈에 들어보고자 애쓰던 태준은 죽었고, 현생에는 어떻게든 전생과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발버둥치며 공부하고, 돈을 쓸어담는 내가 있다.
전생의 노비, 태준이 만만할 때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었다면,
현생의 나는 노영숙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미지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조건이 바뀌었는데도 역사대로 흘러갈 거라 믿는 내가 등신 머저리였지.... 애초에 선해서 나를 건드리지 않았던게 아닌데.'
그렇게 내가 과거를 안다는 오만과 어리석음에 스스로를 질책하며 입을 다물고 있자, 신병철 계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계속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내가 '이해한 것'과 신병철 계장이 말하는 '알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클 테지만, 말만 맞으면 되는 문제였기에 나는 손을 앞으로 휘적 내밀며 그에게 계속 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추가적인 전언입니다.
정확히는 박이사님께서 전하라 하신 사안이죠. 얼마전은 아니고, 한 반 년전, 노영숙이 회장님께 거래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거래의 내용은 뭐였습니까?"
"김석훈 상무... 아니 일단은 보직 해임 되었으니 김석훈 님이겠군요. 김석훈 님의 전자 사장 취임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회장님은 미뤄오셨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쓰며 아까 있었던 보고와 연결지어 생각하고는 혼잣말에 가까운 탄식을 흘렸다.
"설마...."
"예. 그리고 박연수님을 향한 공격이 있은 다음날 회장님께서 거래에 승낙하셨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노리고 한 협박이었고, 회장님은 그 노리고 한 협박에 순순히 응해주신 것입니다. 도련님을 위해서."
나는 그 말에 결국 참다못해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꽝!
내 주먹과 테이블이 맞닿으며 내는 폭력적인 소리가 울려퍼지고, 머리 속 뇌 덩어리가 열을 내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 어리석음의 결과 어머니가 공격당했다. 그래 그것은 내 잘못이고, 내가 저지른 불효.
그러나 지금 이 발언은 전혀 다르다. 자신을 할아버지라 부르라고 하던 김두식 회장이 내린 결정은 사실상의 배신이다.
스스로 혈육이라, 손자라 칭한 나를 향한. 그리고 본인이 사죄한 내 어머니를 향한 배신!
전생에도 애매한 태도로 나를 엿먹이더니, 이번에도 애매한 태도로 내 엿을 먹인 거야...!'
그렇게 내가 주먹을 테이블에 내려 꽂은 채 부들대자, 테이블 위에 불안하게 흐트러진 찻잔들이 덜그럭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그 신경을 긁는 소리에도, 신병철 계장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에 박 이사님께서 이러한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
"김석훈님의 전자 사장 취임건은 결코 회장님의 본의가 아니니 오해는 말아달라고...."
나는 그 말에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등을 등받이 쪽으로 빼내고는 말을 이었다.
"본의가 아니든 말든, 저를 위한 것이든 아니든. 어머니를 위협한 그 년놈들의 손을 들어줬다는 건 변하지 않죠.
애초에 며느리의 범죄를 막아야 하는 건 회장님 본인이지 않습니까. 며느리가 막나가는데도 휘둘리는게 무슨 자랑이라고 저한테 그렇게 공치사를 한답니까."
"예. 그 점 역시 박이사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하여..."
그렇게 말을 이어나가던 신병철 계장이 품 속에서 국제우편을 하나 거내 내게 내밀었다.
"이걸 보여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걸 보시면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으실 거라고..."
나는 그 말에 신경질적으로 국제우편을 낚아채 뜯어보았다.
그렇게 거칠게 뜯겨나간 국제우편봉투에서 나온 서류를 본 나는....
"하핫...! 하하하하하....! 하하하!"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웃어재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