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쓸어담는 재벌가 서자-15화 (15/200)

015. 자민당 (2)

일본의 대장대신.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합쳐놓은 거대 기관의 장.

그런 사람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일본 정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쉬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해서 김 회장이 우리 코스모스의 주식을 좀 처분해주어야 겠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자민당 주요 인사들이 뇌물로 받아챙긴 리크루트 산하 코스모스의 주식.

그것을 외국인인 내게 처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전생에도 '리크루트 사건'이라며 일본 전체를 흔들었던 최악의 사건이었던데다,

그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미리 조사까지 마쳐놓은 뒤인지라, 놀랍지는 않았다.

애초에 일본이라는 나라는 내각제.

행정부가 의회에 예속되어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그 말인 즉, 한국과는 달리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면 행정기관의 장도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선거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니 이런 제안이 새삼스럽지는 않다만, 전생과는 달리 어째서 나에게 맡기냐는 게 문제겠지. 뭐. 그것도 대충 알만하지만.'

그렇게 내가 침묵을 지키며 찻잔만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자, 미야자와 대장대신이 말을 이었다.

"김회장은 일본어도 능숙하니... 알지도 모르지만. 내 문제 하나를 내지요."

"말씀하시죠."

"일본어에서 센세(先生)라는 존칭은 누구에게 쓰이는지 아시오?"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글세요."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주겠소. 센세... 한자를 풀어보면 먼저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지. 그리고 먼저 태어난 사람은 수도 없이 많고.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당신(お前)으로 불리고, 어떤 사람은 센세(先生)로 불리기 마련이오.

그 차이를 아시겠소?"

나는 계속 이어지는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선문답에 응해줄 마음이 없어 그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미야자와 대장대신이 말을 이었다.

"센세(先生)라는 존칭을 받는 사람. 그건 그 사람이 늘 약자의 아쉬운 소리를 듣고 도와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강자라는 뜻이오. 즉, 힘을 기준으로 하는 상대적인 존칭인 셈이지."

예상치 못한 발언에 흥미가 돋은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말을 기다렸다.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말이 이어졌다.

"교사는 학생이 낸 돈으로 살면서도 더 많은 지식이 있기에 학생보다 위에 선 것이고,

변호사는 돈을 받아 움직이는 주제에 기술이 있기 때문에 의뢰인보다 늘 고개가 빳빳한 것이며,

의사는... 뭐...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목숨줄을 붙이고 뗄 수 있으니."

나는 그 말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메이와쿠(迷惑)라는 것이군. 못 배운것도 민폐, 소송을 당한 것도 민폐, 아픈 것도 민폐라....이쯤되면 그냥 약자 혐오 아닌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일본 사회 전체를 짓누르는 관념.

나로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그 괴상한 사고방식이 일반 언어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에 나는 흥미가 동했다.

'우리가 쓰는 선생님 소리와는 전혀 딴판이군. 우리도 이런 식으로 쓰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본은 존중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인데 말이지.

뭐....피해자가 세간을 시끄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과를 하게 만드는 나라 다운 발상이긴 하네.'

"과연. 그래서 선생...인 것입니까."

내 흥미어린 말에 미야자와 대장대신이 약간은 신이 난듯 말을 이었다.

"그렇소. 그럼 정치인에게는 어떤 사람이 아쉬운 소리를 하겠소? 온 갖 사람들이 다 해대오. 나와 안면을 트자마자 대뜸 금불상을 내밀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지."

나는 그 말도 안되는 궤변에 '그게 교사와 의사, 변호사가 듣는 아쉬운 소리와 같은 레벨이냐? 그건 그냥 범죄잖아.'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내 속마음을 알리 없는 미야자와 대장대신이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 가 늘 선생소리를 들으며 존경을 받을 수 있는게요. 약자의 말을 들어주니까. 강자로서."

"헌데 그것과 지금 이 상황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더는 궤변을 듣기가 힘들었던 내가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말을 끊어내며 묻자 미야자와 대장대신이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내가. 정치인이자 이 나라 내각의 중추에 있는 내가 김 회장에게 하는 '아쉬운 소리'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예?"

"정치인이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얼마 없지요. 보통 기업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돈을 주고 청탁과 로비를 하니.

끽 해야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에나 의사 선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겠지. 살려달라거나 외부에 알리지 말아달라거나. 뭐 그런.

그게 내 직업, 내 가문의 가업이 가진 힘이요. 언제나 강자의 위치에 서게 해주는 힘."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당하게 '정치인'이 가업이라 운운하며 힘 자랑을 하는 꼴이 앞서 들은 궤변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어처구니 없음을 드러내기에는 사랑해 마지않는 내 조국, 내 나라 대한민국도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런 내가.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민당이 아쉬운 소리를 하는게요. 김회장... 아니 김선생에게. 그 가치를 정녕 모르겠소?"

당연히 안다.

이렇게 대놓고 나한테 센세(先生)소리를 붙여대는 데 모를리가 있나.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순수한 일본인 기업가였을 때에나 그렇지.'

나에게는 해당이 없는 소리라는게 문제였다.

지금이야 입으로 선생이니 어쩌니 하며 약한체 하지만, 결국은 일본 내에서 내가 가진 태생적 혈통이, 외국인이라는 입지가, 사업을 하며 쌓인 평판이 나를 어떻게 해서든 약자로 끌어내릴 테니까.

애초에 이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 나아가 한국인은 늘 마이너다.

일본이 잘 나갈때는 존재조차 인식 되지 않는 투명인간,

일본이 못 나갈때는 만악의 근원이자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하는 바퀴벌레.

그것이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이 가지는 이미지이다.

그걸 알기에 부탁을 받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리고 실질적으로 내가 갑에 위치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한 시간 먼저 나와있었던게 아니었던가.

심지어 나에게 저런 구구절절 이상한 궤변이나 늘어대는 미야자와 대장대신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약속 시간 보다 30분은 더 늦게 나온 것이고.

이런 내막을 아는 나로서는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말이 그저 '어르고 달래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들어줄 생각도 있었는데, 외려 이런 식으로 나오니 협조하기가 싫구만.'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야자와 대장대신은 한 껏 자신의 말에 취해 말을 이어나갔다.

"하물며 나 개인의 부탁이 아니라 이 나라를 55년부터 지금까지 지탱해 온 자민당의 부탁이오. 그 무게에 대해 김회장은 깊이 생각해주셨으면 하오."

"과연. 자민당의 부탁이니 그 무게와 값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겠군요."

"그렇소. 가이진(外人)이라 이 나라 정세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압니다. 최근에 신 자유 클럽이 해산한 것도. 그리고 그쪽 세력들 전부 자민당이 흡수해서 지금은 명실 상부한 과반 이상을 가진 최고의 집권당이라는 것도."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구려. 그래. 어떻게 하시겠소."

나는 그런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질문에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남의 나라 정치인. 내 나라 정치인의 비리도 아니고 남의 나라 정치인의 비리에 한 손 거드는 정도라면 문제될 건 없다.

아니 오히려 좋지. 방법이야 어차피 랜더스 투자운용에서 코스모스의 비상장주식을 사들인 뒤 회사를 통째로 노무라증권에 넘기고 빠지면 될 일이니.

뒤에 사건이 터진다고 해도 어차피 나로서는 정상적인 금융 거래였음을 주장하면 그 뿐인 것이기에 빠져나갈 구멍도 있다. 그럼에도 걸리는 게 있다면....'

훗날 탈이 났을때 거대하게 부풀어 오를 혐한의 기운.

그게 문제였다.

'분명 이놈들 나중에 사건 터지면 어떻게서든 나랑 엮어서 개소리 하면서 재일동포들 괴롭히고 할게 뻔한데.... 이걸 받아줘야하나.'

그렇게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며 고민하던 그 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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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김태준과의 대화를 마친 미야자와 대장대신은 김태준을 먼저 돌려보내고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한 10분.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뒤로 벽처럼 서있던 미닫이 문이 열리고, 일전에 모였던 나카소네 총리, 아베 전 외부대신, 이부키 중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야자와 대장대신이 뒤를 돌아보자, 나카소네 총리가 씩 웃으며 미야자와 대장대신에게 말을 걸었다.

"꽤나 과묵한 친구구만. 김회장."

그런 나카소네 총리의 말에 대꾸한 것은 이부키 중의원이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제안을 받아들였으니 잘 된일 아닙니까."

마냥 웃으며 잘 되었다는 듯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보인 이부키 중의원의 말에 아베 신타로 전 외부대신이 말을 이었다.

"너무 선선히 받아들이는게... 영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그 자가 감히 거부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게 무슨 선선히 받아들인 겁니까. 결국 나름 한 몫 챙기지 않았습니까. 기준 금리 인상에 대한 정보."

"그걸 정보라고 할 수 있을지.... NTT 기업공개 전까지는 하지 않는다는 말은 김 회장쯤 되는 인사라면 당연히 알 수 있을 내용이었지 않은가. 이부키 군."

"글세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예측과 확인은 다른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조센진에게 무려 '금리 인상'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준것인데.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아베 신타로 전 외부대신의 말에 이부키 중의원이 상기된 얼굴로 신나서 떠들어대자, 미야자와 대장대신이 그의 말을 끊어내며 말을 이었다.

"지불은 놀랍게도 동일 가치의 땅으로 하겠다더군요."

"그것도 이야기 들었지. 땅이야 지금 없어서 못파는 수준인데다 대출도 잘 나오니 의외로 깔끔한 처리일 수 있어."

"거기에 처분하며 걸릴 일도 없고 말이죠."

미야자와 대장대신의 말에 나카소네 총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나카소네 총리의 표정에 이부키 중의원 역시 반색하며 떠들어댔지만, 아베 신타로 전 외부대신은 그저 불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베 신타로 전 외부대신의 불안은 그저 불안으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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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대장대신과 면담을 마친 나는 곧장 그 길로 허영하를 찾아왔다.

"그래. 크라우드 펀딩인지 뭔지는 다 기획이 되었나?"

"예. 여기. 말씀하신 유니버셜 스튜디오, 헤로즈 재팬, 그리고 여기 가(仮) 스키장 프로젝트까지 총 3종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따로 따로 쪼개어뒀나?"

"본질적으로 다른 사업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따로 쪼개둬야지요."

허영하를 찾아온 이유에는 방금 전의 대화처럼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렇군. 그러면 이제 판매만 시작하면 되는 건가."

"판매는 저희 쪽에서 할 예정입니다. 고위험 상품으로 분류하고 진행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뭐 잘 팔리겠지요. 불패 신화인 부동산을 기반으로 하는 건설 사업인데다, 듣기만 해도 잘 나갈 사업들 뿐이니까요."

"너무 고평가를 하는군."

"그럴리가요. 벌써 투자자들을 대거 모집했는데요."

"투자자?"

"예. 이 사업에 간판이 되어주실 분들입니다."

"간판이라... 대체 누구이길래."

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 입만 빤히 바라보는 허영하를 향해 씩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나카소네 총리."

"뭐?"

"아직 끝이 아닙니다. 미야자와 대장대신."

"거물들이군. 거물들이야. 중앙 정치권, 거기에 내각에 속한 이들이라면 이 사업은 확실하지... 자네의 말이 진짜라면 말이야."

"아베 신타로 전 외부대신."

".... 장난하는겐가?"

"거기에 앞선 세 분 보단 격이 좀 떨어지지만, 이부키 분메이 중의원도 있습니다."

내 말에 허영하는 하나하나 대꾸도 하기 귀찮았는지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대체 왜? 아니 그보다 내가 하는 그 치들이 사업을 어찌 알고?"

나는 허영하의 본질적인 의문을 받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그렇게 내가 방금전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자 허영하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카소네 내각... 아니, 자민당에서 리크루트의 자회사 코스모스의 장외 주식을 받았고, 그 장외주식을 처분하려 한다?"

"예. 해서 저는 그 장외주식을 허영하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토지와 바꿀 생각입니다."

"미쳤군. 그걸 내가 왜 하겠나."

"안하실 이유는 또 뭡니까."

"뭐라?"

"어차피 이 사업. 성공시키려면 회장님 돈도 들어가야 합니다. 회장님 돈이 안들어간 상태에서 투자를 받아봐야 지분만 빠지고 지배력은 없이 배당만 받는 처지가 되겠지요."

"그럼 내 돈을 바로 집어넣으면 그만인데 뭐하러 그런 놈들에게 지분을 줘가며 내 돈까지 퍼주냐 이 말일세."

"간판이 생기지 않습니까. 간판이. 하나같이 굵직한 의원들 아닙니까."

"그 간판으로 투자자를 더 모집한다?"

"예. 그리고 리크루트의 자회사 코스모스 거기가 뭐하는 데인지 아십니까?"

"....부동산 사업이군."

"예.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회사가 투자를 받는 것이고, 그 회사가 코스모스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는 겁니다.

잘 하면 MOU도 체결해서 이 사업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죠. 안 그래도 지금 토지 구하는데 애 먹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들 사기만 할 뿐 팔 생각을 안해서.

저도 장례식장을 돌아다니며 상속세를 왕창 물게 된 사람들의 토지를 사들이고 있는데...회장님은 오죽하시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듣고 보니 합리적인 제안이야."

그렇게 허영하를 옭아맨 내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인 그때.

허영하의 입에서 예상 외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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