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허영하 (2)
프로젝트 파이낸싱.
쉽게 말하면 대출이다.
일반적인 대출이 부동산이나 특수동산(공작기계, 토지, 차, 선박 등)이나 개인의 신용, 즉 사람을 담보로 이뤄진다면,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대출 후 이뤄질 사업운영 수익을 미리 계산하고 측정하여 대출이 이뤄진다.
'한 마디로 눈가리고 대출을 해주는 꼴이지.'
그런 PF이지만 내가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선 오사카 지역에는 미국 할리우드의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해외 분관을 유치하고자 한답니다. 2년전인가요?
도쿄에 디즈니랜드가 개장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그걸 의식한듯한 사업계획이지만 사업성은 충분할 듯 합니다.
그리고 도쿄에는 영국 헤로즈 백화점의 라이센스를 얻어 헤로즈 재팬을 열 생각이고, 삿포로에는 허영하 본인 소유의 임야를 개발해서 스키장을 지을 생각인 모양입니다.
일본인들이 영국, 프랑스하면 아주 환장을 하지 않습니까. 영국 왕실 홍차 브랜드인 포트넘 앤 메이슨도 아시아권에는 일본에만 들어와있고요.
확실히 허영하 그 사람이 감각은 있는 모양입니다."
전부 부동산 관련 개발이었기 때문이었다.
테마파크.
백화점.
스키장.
전부 업종은 다르지만 '땅에 무언가를 대규모로 짓는다'라는 점에서 내 욕망을 건들기에 충분했다.
'헤로즈 백화점의 경우에는 아직 부지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으니... 잘 하면 허영하에게 이케부쿠로에 확보한 부지들을 팔아먹을 수 있겠어.
거기다 스키장하면 또 회원권 장사가 있으니... 미리 회원권을 파는 걸로 돈을 만질 수도 있겠지. 물론 내가 아니라 허영하가 만지는 거지만.'
곧 쓰레기 휴지조각이 될 토지들을 허영하에게 떠넘기고, 허영하는 나를 통해 PF를 성사시킨다.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물론 내가 내 돈 들여서 대출을 해줄 마음은 전혀 없지만.'
그렇게 내가 허영하와의 대면약속을 잡고 이틀 뒤.
내가 묵고 있는 호텔 객실로 허영하가 찾아왔다.
"여기 항일투쟁을 한다는 한국 젊은이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소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태준입니다."
"하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청년이라고 해서 내 직접 이리 찾아왔는데... 어째 손님 대접이 부실하오?"
"아, 차는 룸 서비스로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차를 드십니까?"
"쯧. 행보 하나하나는 장군 저리가라인데, 생활은 백면서생처럼 하시는구려. 젊은 양반이."
허영하의 말에 나는 씩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글렌리벳으로 좋으십니까?"
"하하. 이제야 말이 통하는 구만."
그렇게 룸 서비스로 위스키와 과일안주를 주문한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업 계획은 대강 들었습니다. 통이 크시더군요."
"술이 아직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 이야기요?"
"안주거리로 삼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지 않습니까. 먹다 체하고 싶진 않아서 그러니 이해해주시죠."
"흠. 뭐 다 끝내고 축배로 들어도 좋지. 글렌리벳이면."
"뭐 사업 계획서야 실무자들이 검토할 거고... 자체 자본은 충분하십니까?"
"자본이 충분하면 대출을 받으려 들겠소?"
"그도 그렇지요."
"해서. 해줄거요 말거요."
"제게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허허... 이 사람. 내 다 알고 왔소. 일본 주요 은행들을 한 손에 올려두고 쥐고 흔드는 사람이 갑자기 약한체는...."
"PF로 그 정도 규모의 돈을 한 번에 조달할 수완은 없습니다. 일단 사업심사도 한 세월일테고, 거기에 저희가 PF를 주도할 만큼 크지 않습니다."
".... 그런데 나를 보자고 했다는 것은.... 다른 방도가 있다는 뜻인데. 맞소?"
그렇게 내가 대안을 말하려던 그때 룸 서비스가 도착했다.
방 안까지 카트에 실려 모셔진 글렌리벳을 본 나는 자연스럽게 위스키 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 허영하와 내 앞에 놓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크라우드 펀딩 형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크라우드 펀딩....? 그게 뭐요."
허영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시점에 나오는 투자 방식도 아니거니와 투자라고 하기에는 조악하기 그지 없는 제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핫바지 제도가 내가 원하던 거기도 하고.'
전생에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사기는 공공연히 이뤄졌다.
직접 개발하지도 않은 상품의 개발비다 뭐다 하면서 리워드랍시고 주는 조악한 품질의 제품을 팔아먹는 것은 양반이었고,
개발 자체가 무산되었음에도 개발중이라고 무기한 투자자들을 대기타게 만들다가 돈만 삼키고 쥐도 새도 모르게 날라버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런게 가능했던 이유.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상 투자였기 때문이다.
땅만 팔아치우면 되는 나로써는 투자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PF라는 귀찮고, 복잡하며, 여러가지로 얽혀있는 것 보다는 크라우드 펀딩이 더 나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미 망하는 것이 확정된 사람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거기에 정두황 대통령 아들하고도 연관이 있다는 의혹이 있었던 사람이지. 부관정기여객 노선 사업권 관련해서. 그 의혹이 사실이라면 동포이기 이전에 나와는 적이니까.'
문제는...
진짜 일반에서 그 정도 규모의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작금의 일본이 돈을 쌓아 두다 못해 계속 돌리고 돌려 돈으로 뻥튀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민간 자본만으로 거액의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안정적인 투자처가 너무 넘치기도 하고...'
한다면, 기관투자자부터 대규모의 은행까지 끼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머릿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사모펀드에 부합하는 개념입니다만...."
"사모 펀드....? 사인(私人)들이 모여서 만든 펀드라는 말이오?"
"예. 다만 통상의 사모펀드처럼 비공개 자산 모집이 아닌 완전 공개 자산모집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일반인들의 푼돈으로 돈이 모이겠소?"
"당연히 가능할리가 없지요. 해서, 일반 금융권에도 오픈할 생각입니다. 어찌되었건 완전 공개 자산모집이고, 그 공개 대상은 자연인과 법인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금융권까지 연계되어 있는 비상식적인 구조의 크라우드 펀딩을 기획했다.
이런 기획에 의도에는....
"흐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리 큰 돈을 벌었지만 귀하의 돈은 쓸 생각이 없으시다. 이 말이시구려."
그렇게 내 머릿 속을 훅 하고 들어갔다 나온 사람 처럼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인 허영하의 말이 귓가에 틀어박혔다.
'뭐 그래봐야 반만 정답이지만.'
내가 큰 돈을 벌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전부 묶인 돈.
그 묶인 돈들을 한번에 전부 회수해 눈 앞의 '버블시대 최악의 사기꾼'이라 아직도 욕을 먹는 허영하에게 넣어줄 이유는 없다.
아니, 넣어주고 싶어도 넣어줄 수가 없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유.
사업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능한 일본 땅에서 손해보지 않으며,
가능한 많은 일본의 자금을 끌어들여,
가능한 많은 돈을 일본인들에게 뜯어내는 것.
나는 이 '사업적인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압축해 허영하에게 말했다.
"사업하는 사람이 자기 돈으로 사업하는 거 보셨습니까?"
그 말에 잠시 허영하가 멈칫하더니 놓여있던 잔을 들어 글렌리벳을 단숨에 삼키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핫. 맞아. 맞는 말이오. 사업가는 제 돈으로 사업을 하지 않지. 그래서. 그 크라우드 펀딩은 어떻게 하는 거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가 가진 운용사에 새로운 상품을 하나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허영하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곧바로 오오와다 사장을 불러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구조로 상품을 하나 만들어보죠."
오오와다는 내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눈을 껌벅이더니 이내 이 상품의 문제점을 깨닫고 경악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러면... 판매하는 저희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상관 없게 만들어야지요. 일단 1차적으로 지금 말해준 방식으로 상품을 기안해서 가져오세요."
그런 오오와다의 경악성이 채 다 이어지기도 전에 나는 오오와다의 말을 툭 자르고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86년 9월 14일.
달력이 가리키는 날짜였다.
'이제 내년 2월에 있을 NTT 상장까지 반년도 안남았으니. 슬슬 자산을 현금화 할 시점이지. 한 달 이내에 전부.'
그렇게 내가 달력을 빤히 바라보자 오오와다가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저.... 회장님?"
"네."
"어째서 상관이 없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보면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오오와다 사장도 그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겠지요."
"시험... 인 겁니까?"
"아뇨. 그저 선택권을 줄 뿐인겁니다."
'나를 택할지. 아님 일본을 택할지.'
그렇게 오오와다가 돌아가자 타케미치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오오와다 그 친구. 생각이 많아보였습니다."
"그렇겠지요. 누가 봐도 위험하고, 관리도 어렵고, 애매한 상품이니까요."
"그런 상품을 만들라고 지시하신 이유는... 역시 그 친구를 시험하시기 위함입니까?"
"아뇨. 상품 자체는 전적으로 허영하 회장의 요청에 응한 것일 뿐입니다."
'상품 자체는.'
내 말에 타케미치 변호사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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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타케미치가 김태준의 방에서 나오자 오오와다의 목소리가 타케미치의 귓전을 때렸다.
"별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대체 이게 뭔지."
오오와다는 김태준이 말한 내용을 정리한 수첩을 들여다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는 말을 이었다.
"허영하. 그 사람 수상하기가 이를데 없는 사람이야."
"그런가."
"금융가쪽 인간들은 허영하 그 사람에 대한 찌라시를 다 한 번쯤을 들어봤을껄. 자이니치-픽사(재일교포 브로커). 유명한 별명이지. 얼마전 휴면회사인 요미츠건설을 인수한 것도 그렇고, 야마구치 구미와 관계도 있다는 소문이 있어."
오오와다의 말에 타케미치는 놀랍지 않다는 듯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며 말을 이었다.
"듣던 대로의 소문이네."
"듣던 대로...? 설마. 너 알고 있었던거야?"
타케미치의 그런 태도에 오오와다가 놀란 표정으로 타케미치를 바라보자, 타케미치가 별거 아니라는 듯 로비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고는 말했다.
"금융가에서 도는 소문이 법조계라고 안돌까."
"알면서 회장님과 그 자를 만나게 했다는 거야?! 위험하다고, 그거?!"
"우리가 아는 걸 회장님께서 모르실까? 설사 모르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감히 회장님께 만나지 마시라 말할 권한이나 있고?"
"하..하지만, 넌 회장님의 심복이잖아. 심복이면..."
오오와다의 반발 섞인 말에 타케미치는 순간 울컥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이내 후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회장님 안지 얼마 안되었고,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시한 걸 이행하는 것 뿐이야. 어쩌면...."
일본인 특유의 애매모호한 말 흐리기 뒤에 감춰진 혼네(本音).
그것이 풍기는 기묘한 공기를 읽은 오오와다는 잠시 멈칫 하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아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것. 준비 잘 해. 네게 거는 기대가 크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을 감추고, 속을 감춘 타케미치의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차임음이 울렸다.
그렇게 로비의 문이 열리자. 호텔 직원이 타케미치를 보고 말을 이었다.
"타케미치상. 전화가 왔습니다."
"제게.. 말 입니까?"
"예. 대장성에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