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허영하 (1)
태준이 세운 랜더스 투자금융의 상품소식은 일본 금융계를 강타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경제 소식입니다. 신생 투자회사 랜더스 투자금융에서 내놓은 닛케이 인덱스 니바이(二倍)의 운용투자금이 발매 하루 만에 일천억엔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노무라증권이 내놓은 NNI(Nomura Nikkei Index) 펀드보다 서른배 이상 빠른 속도로 달성한 것으로...."
좋은 의미로는 노무라를 이긴 신생 회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는 것이었지만....
그 타이틀을 얻은 직후부터 얼마간은 계속....
"랜더스 투자금융이 발표한 상품 세가지를 보시면 펀드 2종, CDS 1종인데..."
"상품이 복잡하지요."
"그렇습니다. 해서 준비한 판넬을 보시죠. 여기 판넬을 보시면 자금 흐름이 이런식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하강기에는 상승, 상승기에는 하강.
즉! 이 상품의 구조가 두 개는 나라 경제가 망하면 돈을 버는 악의적인 구조입니다. 이것은 랜더스 투자금융의 사주인 김태준이라는 조센진의...."
"사키모토 상. 조센진이라는 차별용어는 방송에서는..."
"하하하. 사카모토 상. 너무 과잉반응 아닙니까?지금 같은 호황기에 누가 그런 멍청한 상품에 돈을 넣겠습니까.
더구나 랜더스 투자운용의 경우 김태준이라는 사람이 지배구조 하에 있는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리다는 오오와다 사장입니다."
"노무라 출신의..."
"그 오오와다라는 인간도 자이니치일...."
"사카모토 상. 주의를."
'일본이 망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조센진의 회사'라는 언론 플레이에 시달려야만 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입장에서 결코 좋을 것 없는 악명에 가까운 평가였지만....
"하하하하....!"
"그게 웃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웃기지 않느냐."
"상황이 웃기고, 일본인들이 이중적으로 구는 게 웃기다고는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나름 손해를 보고 있는게 문제란 말입니다."
"크하하핫! 네가 왠일로 어울리지도 않는 어리광이냐."
그 소식을 들은 김두혁 회장은 그저 한참을 웃어재낄 뿐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다 듣고도 웃기만 하는 김두혁 회장의 반응에 태준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뭐가, 이놈아."
"기껏 비싼 돈들여 국제전화 걸었는데 조언이라도 해주시죠. 회장님."
"회장님?! 너도 회장이라 불린다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 회장이 그 회장이랑 같습니까?! 그냥 띄워주는 표현이지 않습...."
"감도가 떨어지나... 잘 안 들리네?"
"....할...."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끊으마."
"할아버지. 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태준이 기어히 한숨을 푹 내쉬며 김두혁 회장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하자 김두혁 회장이 눈에 띄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같은 회장끼리는 이야기 할 게 없지만, 조손간에는 이야기 할게 또 많지."
"....."
"애초에 네 녀석한테 준 그 종자돈 10억도 말이야.... 나를 할애비로 깍듯이 모시면서, 할애비가 준 용돈을 어디에 썼는지 제 때 보고하기로 하고 준 것인데....."
"...."
"뭐 알아서 잘 쓰고, 잘 벌고 있으니 말은 안했다만, 네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수화기를 귀에 대고 한참을 기다려도 김두혁 회장의 답이 나오지 않자, 태준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자기 성질을 죽이진 않은채) 말을 끊고는 말을 이었다.
"저.... '할아버지'? 그래서 언제쯤 제 질문에 답을 해주실 겁니까?"
"질문? 아. 뭐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대표이사 선임하고 회사 굴리는데도 조센진 기업이라고 차별당한다는거?"
"예."
"그걸 뭘 신경 쓰고 있어. 사내새끼가 쪼잔하게."
"예?"
"남의 땅에서 남의 돈 따먹기가 어디 쉬운줄 알어? 하물며 일본? 거기 째포(재일동포)들이 괜히 거기서 고생하는 줄 알어?"
"애초에 자본에 국적 따지는게 정상입니까?"
"그럼 뭐 민족 차별하는건 정상이냐. 애초에 너도 일본이 좋아서 일본 간게 아니지 않느냐. 돈 벌러 간 것이지. 그리고 국적이 왜 안 중요해? 미국물 먹더니 이거 완전....."
"....애초에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니 그냥 신경 끄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태준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하듯 말하자 김두혁 회장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장사 잘 하고 있다며."
"예. 레버리지 펀드는 벌써 2천억 규모고, 은행권에 뿌렸던 CDS로도 꽤 돈 만지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땅으로 만지는 돈에 비하면... 물론 큰 돈이지만, 그래봐야 수수료 장사라..."
"백날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나는 잘 몰라. 그런 어려운 건 아랫사람들이나 익혀야 하는거지 내가 알아야할 이유가 없지."
"...."
"하지만. 이거 하난 알지. 결국 아까부터 말하던게 그런거 아니냐. 악명이 묻어서 더 팔 수 있는 것도 못 팔고 있다.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지. 살놈만 사라고 해."
"예?"
태준이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김두혁 회장이 말을 이었다.
"네가 나처럼 물건 잔뜩 쌓아두고 창고비 꼬박꼬박 내기를 하냐, 아니면 뭐 냅두면 썩기를 하냐. 어차피 돈놀이 하는게 아니냐.
뭐... 돈도 썩고 곰팡이 핀다지만, 넌 전산상에서 움직이는 돈이니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없잖느냐. 그렇게 사주세요 안달 복달 하나 안하나 그게 그거 아니냐."
"그야.... 그렇지요."
"거기에... 네 계획은 여기서 끝이 아닌거 아니냐. 말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그 수수료 장사 안된다고 징징거리는 것도 그렇고... 보아하니, 최대한 남의 돈 끌어 모아야 되는 모양인데. 그 다음이 있는게지?"
"그야....."
"그럼 신경 끄고 네 할 일이나 하거라. 어차피 네 계획대로 100프로 되는 사업은 없어. 지금 듣자하니 큰 계획들은 전부 해결된게 아니냐."
"그건 그렇죠."
"그럼 작은 것엔 신경 꺼. 작은 계획들은 되면 좋고, 안되어도 대세에는 영향이 없는 건데 신경 써봐야 뭐 할 게야. 안 그래? 이상한 데서 좀스럽게 굴지 말고."
그렇게 김두혁 회장에게 그간의 보고 겸 고민상담을 한 태준과의 전화를 마친 김두혁 회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노무 자식이.... 어디서 수 쓰고 있어."
입으로는 짜증을, 얼굴에는 어느 때 보다 활짝 핀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김두혁 회장을 본 박승철 이사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태준 도련님이십니까?"
"그래. 이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약한척 하면서 나를 살살 구슬리는데 자칫하면 넘어갈 뻔했어."
"어떤...."
"악평이 좀 쌓인 모양인데, 그걸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럼.... 샬롯테쪽에 주선을 넣어볼까요?"
"아니. 도와줄 필요 없어. 그리 큰 문제도 아니거니와...."
김두혁 회장이 잠시 옆에 놓인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정 거슬려서 해결하고 싶으면 본인이 해야지. 이젠 덩치가 제법 컸는데 엉덩이 닦아 줄 순 없잖나. 애초에 본인이 알아서 큰 놈이기도 하고.
허허...거 참 꼴랑 10억 받아서 지 혼자 이렇게 빨리 클 줄이야... 허허."
그런 김두혁 회장의 모습을 보던 박승철 이사는 희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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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할아버지 김두혁 회장과의 통화를 마친 나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으며 입 맛을 다셨다.
"하여간 노인네. 째쨰하기는."
김두혁 회장의 말마따나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고, 신경쓸 필요도 없는 문제였지만....
"나중에 버블 꺼질때 전부 뒤집어 쓰는게 좀 거슬린단 말이지.... 후... 이걸 어떻게 해결한다...."
일본 특유의 전범찾기에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전생에 다이치산교 자동차가 프랑스 라이노에 인수되고 다이치산교를 회생시켰던 곤 샤를도 결국 도쿄지검 특수부의 칼날에 당해서 곤욕을 치렀지.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않으면 잘 되어도 샤를 꼴 난다.
기다 음모론 좋아하는 우익 새끼들이라 그런지 내가 생각한 수법까지도 끼워맞춘 수준이지만 맞추기도 했고.... 이걸 어떻게 해결한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하던 그때 로비를 통해 한통의 전화가 넘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어딘가 묘한 한국어. 손의정이었다.
"어쩐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이번에 투자운용사를 하나 차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소식이 빠르시군요."
"느린편이지요. 이제 막 NCC Hub의 설계가 끝나간 참이라 간신히 들었습니다."
"그럼....?"
"예. 설계부터 랩 수준 실험기까지 정상작동하는 것 전부 확인했고... 이제 완성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김회장님께서 받으셔야겠지요. 이번 투자 운용사 건도 그렇고, 저희 제품에 투자해주신 것도 그렇고.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하. 그래서 그 NCC Hub 건 때문에 연락 주신겁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잠시 말을 멈춘 손의정은 고민하듯이 말 끝을 흐리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추가 투자가..."
"아뇨. 자금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초도 생산분까지 전부 생산하고도 남을 금액이니까요."
"그럼...."
그렇게 수화기 너머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손의정에게 내가 '편하게 말씀하세요'라 말을 꺼내려던 그 순간.
손의정이 결심을 굳힌듯 말을 이었다.
"혹시 투자운용사에 신규 상품 하나 런칭 가능합니까?"
"예?"
전혀 예상치 못한 요청에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자 손의정이 황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 제 쪽에서 직접 드리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야 제 사업하기 바쁘니까요."
"그럼 어느 쪽에서 들어온 요청입니까?"
"혹시 허영하라고 아십니까? 최근 사업을 확장하는 오사카 쪽 재일교포입니다."
손의정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황급히 수화기를 떼어내고는 잠시 숨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허영하.
일본 버블기를 대표하는 버블 퍼슨(버블기에 큰 돈을 번 소수자) 중 하나다.
재일교포쪽에서는 허영하.
일본인 중에서는 시노노메 누이(東雲縫).
허영하는 중졸 재일교포이자 빠칭코로 가산을 탕진한 한량에서 단 5년만에 계열사 60개를 거느린 거대 기업체의 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사건사고'의 범주에 들어간 인물이었고,
시노노메 누이의 경우 긴자의 웨이트리스로서 투자의 귀재로 변신한 자수성가형 신 여성으로서 일본의 '사건사고'의 범주에 들어선 인물이었다.
'뭐... 그 사건사고에 이제는 나도 포함되는 것 같지만....'
그런 인물을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이 두 버블 퍼슨의 말로가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영하의 경우에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빠칭코 한량이었기에 오사카 지역 야쿠자와도 인연이 있었고, 그 야쿠자 인맥을 통해 야쿠자 측의 숨겨진 정치권 로비스트로서 활동하다가 수습불가능한 상황에 빠져 결국 자신이 세운 남바완 그룹의 회계장부를 조작하여 말년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노노메 누이의 경우 긴자에 드다드는 금융계쪽 인맥을 동원해 가짜 예금증서로 초기 자금을 마련하여 투자한 것이 버블의 붕괴와 함께 밝혀지며 징역을 선고받았다.
'뭐... 시노노메 누이 케이스야 생각보다 흔한 케이스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 여자가 투자를 자기 안목이 아닌 '금불상'에 물어보고 한 것, 그리고 그 '금불상'에 기도를 드리는 집회에 일본경산성 간부부터 츄부산업은행(中部産業銀行) 총재까지 드나들었다는게 놀라운 일이었지.'
어쨌든.
지금 생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들의 몰락이었지만, 전생에 분명 몰락이 확정된 이 두 사람과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본심이었다.
그렇게 내가 거절을 하기 위해 손의정에게 말을 하려던 그 순간.
내 마음을 바꿔놓을 말이 손의정의 입에서 흘러나와 수화기를 타고 내 귓전을 울렸다.
"일본 최초의 민간 프로젝트 파이낸싱(PF)를 진행하고자 한답니다. 예정지는 총 세 곳. 도쿄, 오사카, 삿포로라고 합니다.
예상 파이낸싱 규모는 약 1천 9억엔(당시 환율 기준 약 1조원)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