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손 요시마사 (1)
타케미치 변호사를 통해 알아낸 손의정은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81년 9월, 후쿠오카에서 소프트방코 창업, 컴덱스에서 회계프로그램으로 화려하게 데뷔. 성공한지 2년도 채 안되어 간염판정을 받고 은둔... 올해 5월에 다시 CEO로 복귀했다... 이 말입니까?"
"예. 여기 보고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가 없던 3년 반동안 후쿠오카 지역 고객사들이 70%가 이탈해서 경쟁사인 빅풋소프트의 회계프로그램으로 넘어갔고, 소프트방코에서 팔던 서드파티 프로그램들의 매출도 50%가까이 매출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인가... 흠."
내가 아는 손의정이 아닌. 내가 모르는 손의정.
자신의 건강이 원인이 되어 몰락의 길을 걸은 그리고 걷고 있는 손의정.
그런 그가 지금 내게 온 것은 내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돈 문제 때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잘 하면 손의정의 업적을 내가 먹어치울 수도 있겠어.'
어차피 새로 시작한 인생이다.
전생에도 인정 받겠다고 발악하며 온갖 더러운 오폐수에 손을 담근 인생이었고, 현생도 그 과정과 대상만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공을 털어먹는데에도 거리낄 것이 없지.'
실제로 이미 그렇게 하는 중이기도 하고.
일본의 버블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더욱 버블을 부추기고,
그 버블에 올라타 계속해서 버블을 즐기다 못해 때 이른 파생상품들을 대거 도입해서 일본경제를 털어먹고 있으니
아무리 나 자신을 좋게 평가하려고 해도 선인이라 평가할 수는 없을 터였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볼때는 악마가 아닐까? 뭐, 그래도. 한국 사람 등쳐먹은거 아니고, 내 사람 등쳐먹은거 아니니까.'
그렇게 사전조사와 자기합리화까지 완벽하게 마친 나는 손의정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연락을 했고, 내 연락을 받은 손의정은 한달음에 내가 머무는 타이코쿠 호텔 1층 커피숍으로 달려왔다.
"손의정입니다."
"김태준입니다."
전생에 언론매체에 소개되던 손의정은 늘 머리숱이 부족하던 인물이었는데, 젊은 시절이라 그런지 지금은 풍성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빤히 그의 머리를 보던 나는 순간 실례를 깨닫고 곧바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젊으신 분이군요."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더 많이 젊으시군요."
생각보다 당당한 태도에 나는 짐짓 놀라며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손의정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전산학 석사까지 취득한... 엘리트시더군요."
마치 주객이 전도된 듯한 분위기.
내가 불러서 내가 투자를 할지 말지 선택하는 자리였음에도 나는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고 느꼈다.
'역시 손의정은 손의정이라는 거겠지.'
물론....
"잘 아시는 군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굳이 그 시험을 받아 줄 이유는 없다.
'돈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돈이 곧 힘.
그것이 자본주의 논리였다.
그렇게 내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답하자 손의정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미국 유학생 출신인지라. UC버클리 나왔습니다. 제 처도 그곳에서 만났지요."
"그러십니까."
"해서 우리가 말이 좀 통할거라 생각하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말한 손의정이 들고 온 가방에서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들어 내게 보여주고는 말을 이었다.
"최근 제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입니다."
'안통한다는 걸 알자 바로 태도를 바꾸는 점은 좋네. 전생에도 강연마다 유연한 사고, 유연한 태도를 강조하더니...'
나는 손의정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고는 빠르게 휙휙 넘겨보았다.
통신사업. 정확히는 새로운 통신기기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기술적 원리나 이런 것까지 꽤 상세하게 적었군. 관심은 가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차피 이건... 지금 시점에선 무조건 뜨는 사업일테니까.'
그렇게 서류를 전부 훑어본 나는 서류를 가볍게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나카소네 총리 담화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군요."
"예. 일본전신전화공사, 일본전매공사, 일본국유철도 이 셋을 민영화 한다고 발표했지요. 이로 인한 여파는.... 기므상. 아니, 김태준 회장님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가 건네준 서류를 가만히 살펴보다 말을 이었다.
"전신전화공사가 민영화 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통신시장 자체가 자유화 되어 여러 기업이 난립하리라는 것도.... 다들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그런데 그 예상에 비해 사업 스케일이 너무 작은 것 아닙니까?"
"스케일이 작다...라?"
"예. 어차피 통신시장이 자유화 된다면 통신사를 차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손의정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아니. 흔들렸다기 보다는 실망한 것인가. 흥미를 잃은 표정이군.'
"그에 대해 설명을 드리자면..."
나는 마치 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맥없이 설명을 시작하는 손의정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며 투자를 거절했겠지요."
"예?"
"아닙니까?"
"아...아니, 그게 맞기는 합니다만."
나는 당혹스러워 하는 손의정의 표정을 살짝 본 뒤 아까 내려둔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치며 아껴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건 거절을 위한 명분일 뿐이었을터. 그 치들은 이 사업 아이템이 뭘 의미하는지 관심조차 없었을 겁니다."
"...."
"찾아간 사람이 일본인들이었을테니 말입니다."
"정확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손의정의 눈빛이 흥분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저를 보고 레이시스트...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마는, 일본인들 국민성이 그렇지 않습니까.
거절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서 이 부분은 이렇게 고쳤으면 좋겠다.
저 부분은 저렇게 고쳤으면 좋겠다.
조언을 빙자한 거절 사유들을 들먹이고는 그 부분을 제외하곤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라는 말로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지 않습니까."
본론이 아닌 잡설.
아무짝에 쓸모 없는 말이지만, 손의정으로부터 주도권을 뺐어오기엔 충분했다.
"하하...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뭐. 그런 문화니 문화적 차이겠지만요."
"예예. 맞습니다."
그렇게 잡설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나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해서 저는 직설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손의정의 목에서 꿀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할지 꽤 기대가 되는 모양이군.'
그렇게 나는 속으로 약간의 촌평을 하며 손의정의 기대감을 자극하는 잠깐의 침묵을 보낸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사업 아이템... 정확히는 그래 이 통신 교환기. 대박날겁니다."
"그럼...!"
"하지만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번호가 바뀝니다."
나는 그가 가져온 서류를 몇장 넘겨 해당 부분을 보여주고는 말을 이었다.
"가장 저렴한 회선을 찾아 전화를 걸어주는 시스템. 이건 좋습니다. BM(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이 될 요소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예. 전화비가 획기적으로 줄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딱히 경제적인 동물이 아닙니다. 외려 게으른 동물이지요."
"게...으르다?"
"예. 사람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당장 쓰고 있는 번호가 아닌 새로운 번호로 매번 바꿔 전화를 걸고 다시 전화를 받고 하는 일은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 될겁니다. 고작 개인 고객 수요로 만족하신 다면이야.. 모르겠지만. 투자를 받아 개발해야 하는 제품이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허면..."
"이 부분을 해결해 오세요. 정확히는 기존의 번호를 그대로 쓰면서 회선만 바뀌는 시스템을 구축해 오신다면, 제가 투자하겠습니다."
"아...알겠습니다."
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던 손의정에게 힌트를 하나 던져주기로 했다.
"힌트를 드리자면 '전화는 기본적으로 받기 전까지 누가 건 건지 알 수 없다.' 라는 것이 힌트가 되겠군요."
그 말에 손의정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자리에서 내가 준 서류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 수신시에는 별도의 비용이 발생하지 않으며, 송신시에만 별도의 비용이 발생한다.
- 즉, 수신시 번호와 송신시 번호를 이원화하여 송신시 회선을 그때 그때 바꿔 처리한다.
- 결론 : 수신 번호는 고정하고, 송신회선의 단가를 실시간으로 불러와 '자동'으로 송신회선을 전환시켜준다.
'노트인가?'
그렇게 내 말을 정리한 듯한 노트 아래로....
'.... 즉석에서 알고리즘을 이 수준으로 짜낼 수 있다니... 대단하긴 대단하네.'
복잡한 알고리즘 도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표정을 가장한채 손의정이 그려내는 알고리즘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커피잔의 커피가 다 비어질때쯤.
탁.
펜과 종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손의정의 알고리즘 도식이 완전히 그려지자....
'정답이군.'
나는 그것이 정답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액정 화면 기술은 커녕 브라운관 기술이 메인인 시대인 만큼 전화에 화면이 달려 나오는 시대가 아니지만, 몇년만 지나면 그런 시대가 올 터.
'그런 시대가 오면 송신시 번호도 같은 번호로 처리할 수 있어야하겠지. 건 사람 번호가 바로 화면에 나올테니까. 그럼 시스템은 더욱 복잡해지겠지.... 만, 뭐 기본적인 개념은 던져 줬고, 알고리즘 구성도 잘 했으니.... 실제 구현은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애초에 그리고 이 사업 아이템은 단기에 그칠 수 밖에 없는 아이템이기도 하고. 저게 보급되는 순간 통신사끼리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죄다 비슷한 단가에 맞춰질 가능성이 크니까.
내 입장에서는 이 기계에 대한 로열티를 얼마에 어느 순간 파느냐겠네.'
그렇게 그 자리에서 답을 내놓은 손의정이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자신의 결례를 깨달았는지 나에게 사과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럼 제가 다시 정리를 해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러면 나무가 아깝지 않습니까. 그냥 지금 바로 투자계약을 하지요. 적으시는 개념이나 알고리즘은 제가 봤습니다. 시스템 구현에 있어 알고리즘만 짜놓으면 그 다음은 단순한 코딩의 영역이니. 지금... 당장 해결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가...감사합니다."
"대신 가져오신 투자계약서 말고, 제 쪽에서 투자계약서를 따로 준비하고 싶은데."
"물론입니다."
그렇게 내가 타케미치 변호사를 부르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손의정이 나를 붙잡고 말을 이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신임을 잃은 제게..."
아무래도 지금 자신의 처지가 걸린 모양인지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며 나에게 감사를 표하는 모습에 나는 뭐라 대꾸하기 어려웠다.
'미래에서 보고 와서 당신이 성공할 걸 알고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참...'
그렇게 한참을 그의 감사를 받던 나는 결국 그럴듯한 말을 자아내며 타케미치 변호사를 부르러 자리를 떴다.
"신뢰는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얼마나 잘 보여주느냐도 중요한 법이지요. 손의정씨는 그걸 방금 눈 앞에서 해내신 겁니다."
그렇게 계약은 일사 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타케미치 변호사에게 미리 언질을 주어 계약서 상에 소프트방코의 지분 10%를 가져오는 조건을 걸고, 별도로 손의정이 들고온 사업의 지분을 20%를 가져가는 조건까지 추가해 투자계약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투자계약을 마무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는 (비록 단신이었지만) 통신 사업법 개정안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신전화공사의 민영화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통신 사업법 개정안 통과가 이뤄졌습니다. 이번 개정안에는 통신 사업의 효율화를 위한 복수의 사업자 설립관련 조항이 추가되어...."
돈이 들어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