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제는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김두혁 회장이 한밤중에 집에 나타난 것도 놀라웠는데, 다음날 다시 우리집을 찾은 박승철 비서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사요?"
내일 바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예. 어제 회장님께서 도련님께 약속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빨리 집을 구했습니까?"
"아직 구해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 가실 집은 입주전까지 임시로 주거하실 곳이고 회장님께서 사모님께 드릴 집은 따로 있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은마아파트입니다. 지금 가실 집은 그 옆에 있는 청실아파트라고..."
박승철 비서의 말에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냥 지금 가는 집을 받으면 안되겠습니까?"
"청실아파트 말씀이십니까? 그러셔도 좋습니다만... 그래도 기왕이면 새집에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뇨. 그냥 청실아파트를 주시죠."
은마아파트가 대치동의 상징이자 강남신화의 최고봉이긴 하지만....
'문제는 2021년까지도 재건축이 안되는 계륵 같은 곳... 받는다면 당연히 청실아파트다. 거긴 2015년이면 재건축이 되니까. 만년 유망주인 것 보다는 재건축이 확정적인 청실이 답이지.'
전생에 태균집안에 입성할 때는 지금 사는 이곳에 어머니를 두고 들어갔었다.
다시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된 것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후.
그 조차도 평창동 고택의 별채 맨 끝 방이었다.
어떻게든 인정 받으려고 발악하고 발버둥 쳐서 얻어냈던 결과라는 것이 고작 조선시대 여종 정도의 대우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생을 알고, 들어간다는 선택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한다는 선택을 한 지금.
불쌍한 내 어머니는 서울에 자기 명의의 집이 생겼고, 나는 10억이라는 자본금이 생겼다.
"이게 나비효과라는 건가..."
그렇게 내가 감상에 젖어 혼잣말을 내뱉자 옆에 있던 박승철 비서가 홱하고 돌아보며 되물었다.
"예?"
"아닙니다. 그럼 그 돈은 언제쯤 입금 된답니까?"
"그건 지금 준비중에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어색하게 대화가 끊어지려는 찰나.
"외람되지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10억이라는 큰 돈을 받으려는 이유는 알겠습니다. 태균의 품에 들어오지 않으시려는 것도...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박승철 비서가 꽤 의미심장한 질문을 해왔다.
"돈을 어디에 쓸 지가 고민이겠습니까? 그만한 돈을 버는게 고민이지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이미 버시지 않았습니까?"
"예. 그러니 고민이 없지요."
물론 순순히 대답해줄 이유는 없었기에 대충 뭉개고 말았지만, 그건 내가 계획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계획은 있지. 그것도 아주 완벽한 계획이.'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마친 나는 그렇게 촌구석에서 서울에 입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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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는 잘 마쳤나?"
"예. 신축 은마아파트 말고 청실아파트를 요구하더군요."
김태준의 이사를 돕고 돌아온 박승철 비서를 부른 김두혁 회장의 질문에 박승철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잠시 미간을 찌푸린 김두혁 회장이 찌푸린 미간을 풀고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태준이가 요구했겠군."
"예. 도련님께서 은마아파트라는 말을 듣더니 바로 청실아파트를 달라고 하셨습니다."
"거 참. 그 시골에 있으면서 어찌 그렇게 옳은 결정만 쏙쏙 해댈까."
"예?"
"아닐세. 그래서 그렇게 처리해줬나?"
"예. 그리고 입금은 언제 되냐고 묻기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답해주었습니다."
그 말에 김두혁 회장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어디에 돈을 쓸지 말을 하던가?"
"아뇨. 하지만 눈치로 봐서는 어디에 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 그 녀석이면 그럴테지. 알았어. 나가 봐."
그렇게 보고를 다 들은 김두혁 회장은 박승철 비서를 내보내고는 집무실에 앉아 멀리서 찍힌듯한 사진을 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은마가 아니라 청실... 허허... 거참. 거기에 10억이 필요한 일이라... 10억이라.... 기대 되는구만. 기대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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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이사온 나는 10억이라는 돈을 받은 이후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서울대에 원서를 넣고 합격해서 다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여권을 생각 못했어.'
내 계획대로라면 해외를 오고가야 했는데 여권을 받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보다도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해서 그 방법을 찾을때까지 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어쨌든 돈은 있었고, 그 돈을 놀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이태원과 남대문을 전전하며 돈을 야금야금 달러로 바꾸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에 걸친 환전작업이 모두 끝나갈 무렵.
"뭐하는 놈이냐, 이놈아!"
"아, 오셨어요?"
할아버지, 그러니까 김두혁 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예?"
"내 10억을 준지가 6개월이 넘었다."
"그러셨죠. 예."
"그런데, 돈을 쓰지도 않고 이대로 그냥 골방에 처박아만 둘게야? 차라리 은행에라도 넣으면 이잣돈이라도 받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이미 준 돈을 안쓴다고 뭐라 하시는 건 좀... 좀스럽지 않습니까?"
"이놈이...! 그럼 직보는 왜 안해!"
"쓴 돈이 있어야 보고도 하지요."
'몰래 환전했는데 그걸 보고 할 수도 없구요.'
그렇게 내가 속으로 말을 삼키며 능글맞게 빤히 김두혁 회장을 바라보자 김두혁 회장이 헛기침을 한 번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고.... 이거 계약 위반이야! 계약 위반!"
"예... 뭐. 안그래도 슬슬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알아서 찾아와 주시기도 하셨으니.'
애초에 김두혁 회장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슬슬 내가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몸소 행차까지 해주시니 나로서도 편히 요구할 건 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
"그런데 움직이려고 보니 제가 한 가지 없는게 있더라구요."
"뭔데."
"여권이요."
전생에도 그랬지만 현생에도 70년대에 여권을 구하는 일은 정말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보다 힘든 일이었고, 혼자서 몰래 알아보고 써볼 방법들을 다 써봐도 도저히 구할 수 가 없었기에 김두혁 회장을 통해 구해야 겠다 생각하던 차였다.
'애초에 여행 자유화가 89년이 되어서야 이뤄지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 그나마 받을 수 있는 사유로 유학이나 사업등이 있지만... 그 조차도 단수 여권 밖에는 안되는 판이니. 회장님 덕을 좀 봐야지.'
그렇게 내가 당당히 여권을 요구하자 김두혁 회장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설마 외국에라도 나가겠다는 거냐?"
"예. 미국에 가려고 합니다."
"미국엔 왜?"
"말씀하신 그 돈 좀 쓰려구요."
내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은 서울대를 자퇴, 내지는 휴학을 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다.
핑계는 당연히 유학. 기왕이면 바꿔놓은 달러를 합법적인 루트로 크게 보내려면 적어도 석사과정까지 전부 한다는 전제로 유학을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학,석사 유학을 핑계로 1985년까지 가진 돈 전부와 거기서 알바든 뭐든 해서 벌어들일 돈 전부를 IBM에 때려 박을 생각이었다.
왜 85년까지냐... 그것은....
"그 돈을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지 말이나 좀 해봐라 이놈아."
그렇게 내가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세운 계획을 복기하며 침묵하자 김두혁 회장이 답답했는지 내게 반쯤 성을 내듯 그 이유를 물어왔다.
물론....
"아니, 입막음 댓가로 준 돈인데 어디에 쓸지 말하라고 하는건 좀 치사하지 않습니까?"
"넌 나한테 매달 보고를 해야할 의무가 있어!"
순진하게 전부 말해줄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말꼬리만 빙빙 돌려댔다.
"그건 제가 돈을 어떻게 썼는지 보고드리는 거구요. 제가 사전에 보고드릴 의무는 없죠. 안 그렇습니까? 할아버지."
그렇게 내가 말꼬리를 빙빙 돌리며 약속한 호칭인 할아버지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말하자 한숨을 푹 내쉰 김두혁 회장이 말을 이었다.
"후... 그래. 그래서 미국에 가겠다고?"
"예. 그러니까. 여권 하고 비자 좀 받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 양심을 어디다 팔았는지...원."
"어차피 해주실 거잖습니까? 제가 뭘하나 궁금해서라도."
"그래! 이놈아. 해준다 해줘. 내 답답해서라도 해준다. 아주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구나!"
그렇게 여권을 받는데 성공한 나는 곧장 휴학계를 내고 곧바로 미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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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김태준에게 여권을 만들어 주고, 비자까지 받아준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어느날.
"박비서!"
참다 못해 폭발한 듯한 김두혁 회장이 거칠게 박승철 비서를 찾는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찾으셨습니까?"
그 울림에 박승철 비서가 태연한 얼굴로 들어서자 김두혁 회장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 달 보고도 없었지?"
"예. 없었습니다."
"따로 알아보라는 건?"
"별다른 특이 동향은 없었습니다. 곧바로 뉴욕주립대 컴퓨터 공학부에 입학하신 다음 아르바이트만 하시는 듯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잡일을 한 단 말이야? 그놈이 뭐가 아쉬워서!"
"예. 월가에 위치한 핫도그 가게입니다. 거기서 일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 덤으로 무슨 패션지에서 동양인 모델로도 활동한다고 합니다. 나름 모델 업계에서 인지도도 쌓이고 있다고...."
박승철 비서의 보고에 김두혁 회장이 주먹을 쾅하고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 날 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겐가? 핫도그 가게?! 모델? 그런 일을 돈도 많은 놈이 왜 하는게야!"
"하지만 이곳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그게 전부입니다. 애초에 미국에 있는 계좌를 까볼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 실제로 도련님의 동향이 그러하니...."
"직접 사람을 보내... 는 것은 이미 했고. 그 이상을 하려면..."
"예. 그건 무리입니다. 자칫 잘 못하면 되려 도련님이 눈치채고 반감만 가질지도 모를일입니다."
"후... 답답하군."
그 말에 박승철 비서가 잠시 생각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직접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뭐라? 내가 직접 가보라고?"
"예. 할아버지가 손자 사는거 궁금해서 미국에 가는게 흠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가신 김에 어떻게 사는지 또 뭐하고 사는지 직접 묻고 보시면 의외로 순순히 답해줄지도 모를 일이구요."
"....크흠.... 그것도 그렇구만..."
"그럼 그렇게 준비를..."
그렇게 박승철 비서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나 싶던 순간.
김두혁 회장이 인상을 확 구기며 서랍에서 거칠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여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후.... 아니지. 아니야."
"예?"
"일단은 두고 보지. 두고 보자고. 아직 고작해야 1년밖에 안된거 아닌가."
그 말에 박승철 비서는 보일듯 안보일듯 희미하게 미소짓고는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나며 생각했다.
'한동안은 이런 식의 대화가 끊임없이 오가겠군.'
그리고 그런 박승철 비서의 예상은 적중하여.
6개월 뒤에도,
"박비서!"
그리고 또 다시 3개월 뒤에도.
"박비서!"
이와 같은 대화가 수차례 반복된 끝에.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