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거래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겁니까? 이 시간에?"
내 말에 김두혁 회장.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듣던 대로 예의는 없구나."
"남의 집에 멋대로, 그것도 한 밤중에 처들어와서는 담배부터 태우시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그 말에 김두혁 회장이 담배를 종이컵에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뭐 피차 잘한 것은 없으니 예의에 대해서는 그쯤 하기로 하고.... 그래서 왜 안오겠다는 게냐?"
"여태껏 남남으로 살았는데 굳이 제가 그 대단한 집구석에 기어들어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남이라. 나는 네 존재를 얼마전에 막 알았다만?"
"그러니 남남이지요. 회장님께서 둘 째 아드님께 관심이 없으니..."
내 말에 김두혁 회장이 내 말을 끊어 내곤 말을 이었다.
"네가 태어난게지."
나는 그런 김두혁 회장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저희 어머니 인생도, 제 인생도 이렇게 피곤한거 아닙니까?"
"한 마디도 안지는구나."
"제가 잘못 한 건 없으니까요. 인륜을 저버린 태균그룹인지 병균그룹인지가 잘못했지."
"...그 점에 대해서는 내 사과하마."
"저 말고 저희 어머니께 사과해주시죠."
그 말에 순간 멈칫하며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인 김두혁 회장은 나와 어머니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나를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 자식을 잘못 키워서 자네 인생을 망쳐놓았네. 미안하네."
"아니... 저.. 그.."
김두혁 회장이 순순히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를 하자 어머니가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꼈다.
'저 사과를 빌어먹을 김석훈 새끼한테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사과를 마친 김두혁 회장이 고개를 들자 나는 그 울컥함을 안으로 숨기고는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저를 찾은 이유나 들어봅시다. 뭐 태균씩이나 되는 곳에서 뭐하러 언론까지 통제해가며 저를 찾은 겁니까?"
"너를 찾은 이유라. 혈육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
나는 그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 천출 서자라고 욕이나 안하면 다행일거 같은데... 또 그건 아닌가 봅니다?"
전생에 당한게 그렇게 많은데.
천출이라 차별 받을 때도, 뒤에서 보기만 했던 양반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회장이라는 사람이었다.
물론 내 뒷배가 되어주었다고도 들었고, 나를 먼저 찾았던 인물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능력때문이었지 지금 같은 뜨뜨미지근한 애정같은게 아니었을터였다.
무엇보다...
'왕회장도 알았던거지. 지 자식이 형제 잡아먹은거. 아마 그래서 기를 쓰고 지 아들 뛰어 넘고 나한테 그룹을 상속하려 했을테고.... 당시... 아니 지금 시점엔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죽기 직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추측성이긴 하지만) 판단이 있었기에 나는 주저없이 비웃음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내 그런 말에 회장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공부좀 한다고 나를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우리 회사에 서울대 나온 놈들만 줄세워도 이 마을 어귀까지 닿을게다. 고작 이제 겨우 예비고사 수석 좀 한거가지고 지금 내 앞에서 유세떠는게냐? 아직 졸업은 커녕 입학도 안한놈이?"
"그렇게 무시하시는 제 실적. 예비고사 수석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세간이 시끄러워지는게 싫으신 거겠지요."
내 말에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담배를 다시 꺼내 불을 붙이고는 말을 이었다.
"뭐..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건 네 마음이니 더는 해명하지 않으마.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게냐?"
"뭘 말입니까?"
"진짜 안 들어올게야?"
"들어가봐야 굴러들어온 돌될거 뻔하고... 그 집안엔 어머니를 버리고 간 개새끼가 있지 않습니까?"
"네 어미는 내 따로 좋은 집을 구해줄 생각이다. 생활비도 지원해줄 생각이고. 본가에는 들이지 못해도... 어쨌든 내 며느리 같은 아이니. 넌 들어오기만 하면 돼."
"그럼 더더욱 들어갈 필요가 없지요. 애초에 어머니도 못들어가는 집에 제가 들어가서 뭐한답니까?"
전생에는 희망을 품고 들어간다는 결정을 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내가 미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뭐하러 그 집구석에 기어들어가겠어.'
이번 생에는. 절대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들어갈 필요도 없지만.
"그런 놈이 왜 언론 통제는 풀어달라고 하는게야?"
"그야. 저 먹고 살 길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국 수석 타이틀이 어디 그냥 타이틀입니까?"
"고작 그 뿐이다?"
"뭐. 여차하면 다 까발려 버릴 수도 있구요."
".... 이놈이...!"
애초에 박승철 전무가 왔을때 왕회장을 들먹였던 이유.
그건 바로 내 입을 다무는 대가를 받아 빌어먹을 TQ그룹과 엮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처음에야 아예 안엮이고 내 앞가림 내가 알아서 할 요량이었지만.
'돌아올 시점이 이렇게 된 이상 받을건 전부 받아내야지. 최대한.' 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세운 계획이 바로 입을 다무는 대가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게 싫으시면 적당한 값을 치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첫번째 단계가 내 입에서 던져졌다.
내 제안에 회장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내리치며 반쯤 호통치듯 말했다.
"그래서 들어오라지 않느냐!"
"그게 값이나 된답니까? 그 빌어먹을 집안에 들어가면 평생 천 것으로 살면서 노비같이 부림이나 당하다 끝날게 눈에 훤한데."
'정확히는 이미 그렇게 한 번 살다 왔죠.'
내가 툭하고 말을 던지자 회장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그 순간.
나는 회장의 입을 내 말로 다시금 틀어막았다.
"아니면. 회장님이 저를 손자로 여기고 후계경쟁에 참여라도 시켜주실겁니까?"
"... 그룹은 첫째가 있으니 네게 갈 기회는 없을게다. 물론 네 아비인 둘째도 마찬가지겠지. 다른 계열사가 생겨 그룹 규모가 커진다면이야.. 또 모르지마는."
"그럼 제가 들어가서 얻는 이익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 쿨 하게 거래를 하자는 말씀입니다. 회장님이 안심하자고 저를 집에 들이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주시죠."
그 말에 회장이 눈빛을 빛내며 나를 보고는 말했다.
"다른 거? 지금 다른 걸 달라고 했느냐?"
"예. 어차피 제 아비되는 놈은 저를 책임질 생각도 없을거고 기왕이면 제가 안나타나는게 좋은 사람 아닙니까? 회장님도 그러실테구요."
그 말에 순간 뭔가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인 김두혁 회장은 이내 다시 고심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야...."
"당연히 이리 저리 뒷 말 나오는 것도 싫으실테고. 그럼 답은 하나 아니겠습니까?"
".... 돈을 달라는게냐?"
"예. 적당히. 10억만 주시죠. 먹고 떨어지겠습니다."
10억.
내가 죽은 2021년의 10억이면 집 한채도 못사는 돈이지만... 79년의 10억은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진다.
은마아파트를 사도 10억이면 50채를 사는 돈이니까. 그것도 34평 짜리로.
그런 내 요구에 회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 그 돈.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예. 압니다. 그냥은 주실 수 없으시겠죠. 입도 벙끗하지 않고 조용히 살겠습니다. 아, 기왕이면 일본에 나가있을까요?"
"... 그런게 아니다 이놈아. 그깟 돈 그냥도 줄 수 있다. 10억이면 어쨌든 작은 돈은 아니니 단기간에 마련하긴 어렵지만, 당분간 윗선에 상납하는 금액을 줄인다면 내 개인적으로도 얼추 모아줄 수 있는 돈이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네 태도! 할아비를 보고 그러는 네 태도가 문제다 이놈아!"
나는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설마... 진짜 저를 손자로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이놈아! 네 아비가 너를 어찌 생각하든 내 입장에서는 내 손자고 내 자손인데!"
전생때문이었을까.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운 시간을 40년이나 보냈는데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야. 그냥 하는 소리일거다. 저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억지로 인상을 쓰고는 말을 이었다.
"뭐...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그간 겪은게 있어서 진심이 안느껴집니다마는...."
".... 후.... 이 쥐방울 만한걸 쥐어박을 수도 없고....!"
"뭐 회장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오는게냐?"
"아뇨.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전 어쨌든 그 잘난 태균그룹에 들어갈 생각이 일절 없으니 돈으로 주시죠."
평행선을 달리는 내 말에 결국 회장이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쥐어 들어 올리자, 옆에 시립해 있던 박승철 비서가 회장을 말리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 잠시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크흠...."
회장의 헛기침에 박승철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는 10억이라는 돈이 필요하시고. 회장님께서는 손자를 곁에 두고 싶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제 생각이 맞습니까."
"그래. 맞아."
"그러면 이런 방법은 어떠십니까?"
"말해봐."
"도련님께서 원하는 10억을 내어주시지요."
"뭐?"
"그리고, 회장님께선 도련님께 매달 직보(直報)를 받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단, 이 경우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손자에게 용돈을 준 할아버지로서 받는 보고인만큼..."
박승철 비서가 뒷말을 흐리더니 나를 쓱 보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도 회장님께 그에 걸맞는 예의를 갖추셔야겠지요."
박승철 비서의 제안에 회장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월 2회. 호칭은 할아버지."
".... 후... 좋습니다. 거기에 더해 제 안전,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보상도 해주시죠. 집이랑 생활비... 그리고 그간 저를 양육하기 위해 든 양육비까지 전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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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김태준과 협상 아닌 협상을 마친 김두혁 회장은 차에 오르자 마자 박승철 비서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잘 했어! 잘 했어! 박비서."
"과찬이십니다."
"놈이 보통이 아니라 애 먹을 뻔 했는데 어쨌든 설득하는데 성공했구만. 반감도 얼추 줄인 거 같고."
"그저 조율을 했을 뿐입니다."
김두혁 회장의 극찬에 박승철 비서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겸양의 말을 하자 김두혁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난놈은 난놈일세. 어떻게 저리 당당하게 거래를 요구하는지. 지 애비랑은 완전히 딴판이야. 그 놈은 날 보면 눈치보기도 바쁜데 말이지."
"격세유전이지 않겠습니까?"
박승철 비서가 어울리지 않게 너스레를 떨자 김두혁 회장은 더욱 신이 나 껄껄대며 말을 이었다.
"푸하하하... 나를 닮았단 말인가?"
"회장님의 손자분이시니까요. 그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쨋든 마음에 드는 구만. 마음에 들어. 머리 좋은 것도 그렇고... 생긴 것도 제 외탁했는지 잘 생겼고 말이야. 제 어미가 가수 출신이라더니 아주 여자 여럿 울리게 생겼지 않은가. 거기에 배포도 크고 말이야. 10억을 내놓으라니...하하하."
"예. 도련님께서 두... 집안의 좋은 점만 쏙 빼서 물려받으신 모양입니다."
계속된 김두혁 회장의 말에 박승철 비서는 회장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답을 자아냈다.
그 말에 김두혁 회장이 '옳거니!'하며 연이어 했던 말을 또 하다가 뚝 하고 말을 멈추고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휴... 그러면 뭐하나. 저런 놈이 내 손자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또 체면상 그럴 수도 없고.... 에잉."
"그래도 곁에 두시는데에는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곁에 둬야지. 당연히 내 손자니 곁에 둬야하는 것도 맞지만, 저 머리로 다른 데 가봐. 아까워서 배 아플게 아닌가."
그렇게 한참동안 이어지는 김태준에 대한 칭찬을 듣던 박승철 비서는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둘째 도련님께는...."
"그 놈한테는 내 알아서 잘 둘러대지. 그 놈 성격에 지 마누라한테 일 닥칠때까지 입도 벙끗 안할테니 아마 내 선에서 잘 정리했다고 하면 지도 조용히 있겠지. 안 그래도 요즘 지 형 보는 눈초리가 별로 좋지 않아서 적당히 돈이나 떼 주고 독립시킬까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야."
그 말에 안심한 박승철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평창동으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