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초대
정신이 들고.
살아있음을 깨닫고,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깨닫기 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곰팡이 핀 벽지.
덜컹거리는 철제 샤시가 있는 단칸방.
이 공간. 이 시절을 추억삼아, 버틴 40년이었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주마등이 다시 제대로 흐를리는 없고... 다시 돌아온게 맞겠지. 아니, 예지몽을 꾼건가?"
"뭘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어. 사내새끼가 실없이 혼잣말 하면 못쓴다."
나는 멀리서 냄비를 들고 오는 어머니가 내뱉은 핀잔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웃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된장찌개야?"
본능적으로 이어진 말에 혼란했던 기억들이 다시 정돈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뭐 특별한 거라도 했을까봐."
"아들이 서울.... 아."
'아직 원서도 안넣었지.... 지금 이 시점은 예비고사만 보고 온 뒤... 당연히 어머니는 내가 취직을 준비한다고 생각하신다.'
그렇게 내가 정돈된 기억들을 떠올리며 말 끝을 흐리자 어머니가 날 보고는 되묻기 시작했다.
"서울?"
"아니.. 아니야."
"싱겁기는 밥이나 먹어."
내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젊은 얼굴의 엄마.
그런 엄마의 입에서 비교적 최근까지 들었던 그 구수한 말투가 보이자 나는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 뚜.뚜. 뚜. 뚜우우- 일천구백칠십구년 1월 3일. 9시 뉴스 시작합니다. 백희정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어색함을 감춘채 깜박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조용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은 나는 복잡한 감정을 단숨에 정리했다.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예지몽인지. 혹은 개꿈인지. 뭐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 기왕 다시 시작한 인생. 이제라도 제대로 살면된다. TQ.. 아니 지금은 태균인가. 그 집구석하고는 엮이지 않으면 될 일이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것도 잠시. 라디오를 타고 전해지는 이름모를 앵커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소식입니다. 이번 1979년 예비고사 전국수석을 찾지 못한 가운데 각 대학의 원서 마감시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TV에서는 예비고사 전국 수석을 찾지 못했다는 앵커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질.....
-쾅쾅쾅.
그와 동시에 낡다못해 위태롭게 흔들리는 대문의 거친 비명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계십니까?"
아버지의 비서이자, 내 훈육담당이기도 했던 박승철 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들고있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다시 돌아온 날이 그 빌어먹을 날이었다니.'
나는 이 운명의 장난에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기어이 태균으로 날 끌고가겠다? 절대로 그렇겐 안될거다. 절대로. 전생처럼 놀아날까보냐.'
60년의 전생. 그중 집안의 노비로, 천 것으로 산 생활만 40년이다.
'이번 생에는 천 것으로 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줄 아시라고들.'
.
..
...
박승철 전무의 행동은 기억 속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정해진 대사만 읊어대는 그의 모습부터.
전생에서부터 뱀파이어니 하는 별명이 붙은 그 특유의 동안까지도.
다른 것이라면...
"박승철 비서입니다. 도련님."
그의 직책과 그가 입은 양복 브랜드 정도이려나.
나는 그런 박승철 전무, 아니 전생의 내 스승님인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김태준입니다."
"예. 성함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막내동생뻘쯤 되는 나에게도 깍듯이 존대하는 박승철 전무.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죽은 후에 영혼으로 잠시 이승에 머물며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김민식 제 딴에는 어차피 죽은 놈한테 죽는 이유랍시고 전해준 거였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인생을 바꿀 힌트란 말이지.'
그렇게 떠올린 내용을 토대로 나는 박승철 전무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찾으십니까?"
"그... 아닙니다. 도련님의 아버님 되시는 분께서 찾으십니다."
'역시. 스승님은 스승님이군.'
미래를 알고 있는 나.
그런 내가 집안이 숨기고 싶어하던 그 내막을 까발렸음에도 찰나의 순간 다시금 원래의 표정을 되찾는 것이 과연 박승철 전무 다웠다.
"자세한 상황은 두 분 가시면서 설명을 듣기로..."
'거기에 은근 슬쩍 다시 자기 목적 대로 휘두르려고 드는 것 까지... 수완...은 지금 시점에 어떤지 모르지만 말재주 하나는 젋을 때 부터 좋았었구만. 과연 스승님이라 해야할지....'
나는 그런 박승철 전무의 속내를 읽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씨뿌린 양반이 찾는다고 제가 가야할 이유는 없지요. 전 안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뒷말을 길게 빼며 말끝을 흐린 나는 주어진 정보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 예비고사 전국 수석이면 말 다했지 뭐.
- 1979년 예비고사 전국 수석을 찾지 못한 가운데...
나조차도 내가 수석인지 몰랐는데, 김민식 놈이 알고 있다는 사실과 올해 수석은 언론조차 모른다는 사실.
그 두 사실이 머릿속에서 이어지자 내 입이 생각을 앞질러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언론 조인거 풀어주시죠."
"무슨 말씀이신지."
"연 끊고 산지가 벌써 20년입니다. 태어날 때 부터 지금까지 가족이라고는 어머니 뿐이었는데, 갑자기 아버지라는 사람이 날 찾는다? 지금 시점에?"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은 박승철 전무.
그 표정을 보며 나는 씩 웃고는 말했다.
"제가 79학년도 예비고사 수석이라 그런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본고사 성적이 어떤지는 잘 모르고, 애초에 서울대 입학은 아직 원서도 안넣었으니 아직 모를 일이지만.... 예비고사 수석인 건 확실하거든요.
적어도 틀린건 없을테니까. 그런데... 우리 동네가 조용하단 말이죠. 너무.
언론사가 호구도 아니고 매년 잘만 찾아내서 강원도 두메산골부터 제주도까지 전국 수석이란 수석은 다 찾아내서 인터뷰 따내던 인간들이 왜 올해는 이렇게 조용할까요?"
"뭔가 오해가..."
"오해일리가 없죠. 그쪽에서 일부러 막은 걸테니까. 왜? 저한테 순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면 곤란하니까. 척보니.... 내 아버지는 태균그룹 망나니 둘 째겠네요."
"... 자의식이 너무 높으신 분이었군요."
"자의식이 높다기 보단 죽기 전에 들은 소리가 있어서." 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자의식이 높다기 보다는 머리가 잘 굴러간다고 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도련님의 지성이 출중하신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추측하신 것도 전부 맞습니다."
"그럼...."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을 내뱉고 한참을 나를 뚫어지게 보는 박승철 전무.
그렇게 나를 빤히 보던 박승철 전무는 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 건방진 언행. 태균에서는 위험할 겁니다."
".... 죽이지 않은 것 만으로 감사해라 뭐 그런겁니까?"
"도련님께선 아직 정식으로 태균의 혈육으로 인정받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제가 회장님 명이 아니라,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김석훈 상무의 명으로 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박승철 전무. 아니, 지금 이 시점에는 그저 박승철 비서로만 불리던 그의 말은 내게 전생을 떠올리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거 참.'
그 짧은 감상을 뒤로한 채 나는 박승철 전무에게 배운 그대로 박승철 전무의 말에 답...하려던 찰나.
'너무 능숙하게 받아쳐도 문제겠네. 일단 난 표면상 평범한 고등학생 이니까.'
순간 스쳐간 생각에 나는 고등학생이 할 법한, 반항심 섞인 말을 짜냈다.
"....협박합니까 지금?"
"협박이 아닙니다. 조언이지요. 태균은 그런 곳입니다."
'예. 잘 알고 말고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스승님. 아무런 무기 없이 그 호굴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서 가서 회장님께 보고 드리시죠. 스승님, 회장님 사람이잖아요?'
나는 당황을 연기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박승철 전무에게 속으로 말했다.
들릴리 없는 소리.
하지만...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행히 전 회장님 사람인지라. 우선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내 속마음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이어지는 박승철 전무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될 줄도 알았고 이렇게 나올 줄도 알고 그런 거지만 막상 진짜 되니 당황스럽네.'
그렇게 돌아가는 박승철 전무. 아니 지금은 박승철 비서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뒤에서 바짝 얼어붙은 어머니를 향해 다가가 말했다.
"다 잘될거예요. 전부."
"언...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어젯밤에 자고 일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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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시끄러워! 어디 할 지랄이 없어서 자식을 버려!"
그날 저녁. 태균그룹의 심장인 평창동 고택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그냥 술김에..."
"술김? 술김이라고 했냐? 이 미친놈아! 그래! 술김에 가수하던 여자를 덮쳐서 임신시키고 그대로 잠적해버린게 잘한 짓이냐!"
"그렇다고 막 결혼했는데 그년을 데리고 올 수는 없잖습니... 아니, 그리고 애초에 딴따라년을 무슨...!"
"닥쳐! 당당하지 못할 행동을 왜 해! 그리고 그렇게 딴따라거리면서 지랄할거면 애초에 덮치기를 왜 덮쳐!"
이유는 단순했다.
태균의 둘째.
태균의 망나니가 망나니 짓을 했고.
그 망나니 짓이 2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쨍그랑.
크리스탈 재떨이가 벽을 맞고 깨지고, 사방에 온갖 집기가 흩날렸다.
그렇게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거친 고성과 욕설이 오가기를 수십분.
태균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 김두혁은 치미는 화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후... 너. 지금 당장 방에 들어가 있어."
"예?"
"니 자식 새끼 찾아오라 시켰으니까. 들어가 있으라고! 걔 올 때까지는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꼼작말고 있어."
"아버지! 그런 천한..."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어!?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니 자식이니까 니가 책임져야 할거 아냐!"
"아버지...! 저 집사람한테..."
"노 장군하고는 내가 잘 이야기 할테니, 너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알았어?! 네가 찾으라고 시킨거고, 넌 지금부터 걔한테 아비노릇 하면서 사는게야!"
그렇게 한참을 으름장을 놓고 둘째 아들을 쫒아버린 김두혁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저.. 미친새끼. 저거. 첫째도 막내도 전부 멀쩡한데 왜 저놈만 저리 미친놈 널 뛰기 하듯이 저지랄인지..."
그렇게 물러간 아들의 욕을 한바가지 한 김두혁이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던 그 순간.
-똑똑
방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렇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김태준을 찾으러 갔던 박승철 비서였다.
"그래. 그 놈은 찾았어?"
"예."
"그럼 지금쯤 둘 째랑 만나고 있겠군. 그럼 가서 그 놈 뭐라고 하는지...."
"그게...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문제? 설마 같이 오지 않은게야?"
그렇게 이어진 박승철 비서의 설명에 허 하고 탄식을 내뱉은 김두혁은 들고있던 담배를 까닥였다.
그 모습에 박승철 비서가 빠르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거... 난놈은 난놈이네. 지 어미가 말해준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아보였습니다. 그... 작은 며느님 되시는 분께서는 제 설명에 상당히 당황한 기색을 보이시며 안절부절 못하셨으니까요. 계속 회장님 손자분 눈치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럼 대체 그놈이 무슨 근거로 그런.... 아."
그렇게 회장의 시선이 박승철 비서의 옷깃에 가 머물자 박승철 비서가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회사 핀을 바라보았다.
"하하하하하. 그놈 그거 자네 핀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상황을 전부 알아챘단 말인가? 자네. 그놈 아버지가 둘째인거 말 안했지?"
".... 예. 저는 그저 회장님께서 시키신 대로 '아버님 되시는 분이 도련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만 말하고 같이 함께 가달라고만 했을 뿐입니다. 그 말만 했을 뿐인데... 모든 걸 알겠다는 듯 말을 하더군요."
그렇게 박승철의 보고가 이어지자 김두혁 회장은 물고있던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말을 이었다.
"눈썰미에 상황판단까지... 상황판단이야... 그래 자네가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제 어미가 말해줬을 수도 있지. 자네는 아니라고 판단했어도 말이지."
"...."
"하지만.... 언론 막은 것까지 전부 자네가 나타난 것만 보고 알아채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야... 머리 하나는 비상하군. 아니, 그 정도라면... 거의 중간과정 없이 결과를 아는 수준이지 않나. 심지어 자기 능력에 대해서도 굳은 믿음이 있고.... 전형적인 천재인건가. 그런 천재라면..."
"..."
"원안대로 했다가는 반감만 사겠군."
그렇게 회장의 독백에 가까운 말과 박승철의 침묵이 오가고.
- 치익.
김두혁 회장의 손에서 재떨이로 담배가 처박혔다.
"하는 수 없군. 채비하게. 내 직접 가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