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9)
결혼식 전날밤
눈이 내리는 겨울.
가족들이 모인 저녁 식사.
처음에 어색하던 분위기는 술이 들어가자 풀어졌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가 사실 내 동생이었다? 군 통수권자였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통에 난리도 아니에요. 별 주렁주렁 단 장군님들이 나만 보면 굽실거리는데 정말 확 군복 벗어 버리고 싶을 정도라고요.”
“제국군을 관두시면 이쪽으로 오지 않으시겠어요? 요즘 일손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칼비나와 나비린의 대화.
칼비나의 옆에 앉은 로데릭은 고개만 절레절레 젓다가 나를 보았다.
“리젠, 아니, 폐하…….”
“그렇게 부르면 소름 돋아요. 사석에서는 그냥 리젠이라고 해요.”
내가 요란스럽게 팔을 북북 긁어 보였다.
로데릭 옆에 앉은 리브라타 백작은 정중하게 말했다.
“폐하가 정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못 불러서야 되겠어요? 가족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지내는 게 소망입니다.”
나는 그리 말하고는 계속 술을 돌렸다.
결혼식이 바로 내일, 황후들은 적당히 마시려고 했지만 내가 주는 건 거절하기 힘들지.
그리고 사람은 알콜이 들어가면 풀어진다.
적당히 분위기를 띄우는 데 성공한 나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슬쩍 빠져나왔다.
그리 멀리 갈 마음은 없다.
바로 옆방의 테라스, 벤치에 앉았다.
저쪽에서 흘러나오는 떠들썩한 분위기, 서로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잘 됐군…….”
밤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
황성의 정원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내일 연혼식은 광장에서 하는데, 상당히 아름다운 풍경이리라.
“…….”
차가운 겨울, 새하얀 눈이 쏟아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전생에 내가 사망한 다음, 혼란스러웠던 건 나랏일만이 아니었다.
황후들과 자식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다.
또 내가 돌아온 다음에는 새로 생긴 가족 그리고 서로 흩어졌던 시간을 메우는 작업이 필요했고.
이제 그것도 끝이다.
“완벽하려고 하면 안 되지.”
남에게 술을 권하다 보니 나도 취했다.
나는 혼잣말을 주워섬기면서, 주방에서 몰래 훔쳐 온 술병을 흔들었다.
물론 내가 원하면…… 세상에 못 구할 술은 없지만.
“술은 훔쳐 먹는 게 제맛이지.”
나는 실소하면서 마개를 땄다.
퐁.
가슴을 울리는 맑은소리.
눈 내리는 밤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면서 술병을 입에 가져간다.
홀로 술을 마시자니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른다.
그동안의 생사고락, 다시 볼 수 없는 전우들.
인류를 아우르는 제국의 황제로서 겪은 영광과 오욕.
행복과 후회.
“이제…… 정말로 다 끝났나.”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사악한 신에 맞서서 세상을 고쳐 보겠다고 시작한 일, 이제야 비로소 다 정리가 됐다.
걱정되는 문제들, 해결해야 할 일들은 다 끝났다.
이제 기다리는 건 내일 결혼식 행사인데…… 그건 아래 애들이 알아서 하고 있다.
내가 더 할 게 없다.
“……오래 걸렸군.”
나는 웃으면서 술을 마시고 달을 보았다.
하염없이.
“도련님, 춥지 않으세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나는 취한 중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멜리아, 어떻게 알고 나왔어?”
“좀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했었습니다.”
차분한 발소리.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내 옆에 섰다.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는 시선.
나는 취한 채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렇게 이상했어? 서로 어색한 분위기가 될까 봐 일부러 좀 떠든 건데.”
“옆에 앉아도 될까요?”
“…….”
나는 내심 좀 놀랐다.
아멜리아는 나를 비롯한 형제들을 업어 키운 사람으로 각별한 상대였다.
그러면서도 아멜리아는 늘 메이드로서 몸가짐을 고수했다.
내가 같이 앉아서 대화하자고 해도, 옆에 서서 이야기하는 게 보통인데.
“응, 물론이지. 얼른 앉아.”
나는 옆으로 비켜서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하는 김에 병나발을 불던 술병도 슬쩍 밀어 버리고.
아멜리아는 내 옆에 앉아서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아멜리아를 보면서 빙긋 웃었다.
“고마워, 아멜리아.”
“뭐가요?”
“있어 줘서 고마워.”
……음, 취해서 두서가 없군.
나는 이마를 눌렀지만 사실 지금 이게 본심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리브라타 가족이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좀 더 험악한 곳에서 환생했다면? 아멜리아나 로데릭이 없었더라면?
제국이 망하건 말건 그냥 나 몰라라 했을 수도 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집안이었기에,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친 내가 다시 일할 마음을 품었지.
내 감사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요.”
“음, 그래.”
침묵.
……둘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술이 올라서 그냥 기꺼워했지만 사실 나는 아멜리아를 은근히 버거워하던 중 아니었나?
입맛이 쓴 상황이라서 가급적 이런 자리는 피하려고 했는데.
나를 빤히 보던 아멜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해 듣기로는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멜리아랑 결혼하고 싶어.”
“…….”
술김에 튀어나와 버렸다.
실수한 나는 급하게 말했다.
“……고 칼비나 누나가 툭하면 이야기하지.”
아멜리아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마력 램프의 불빛 아래, 아멜리아의 붉어진 뺨이 보인다.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릴 분위기가 아니다.
그냥 내친김이다 싶어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아멜리아와 결혼하고 싶어. 아니, 나는 아멜리아와 결혼하고 싶어.”
“…….”
“몹시 당황스러운 이야기겠지만 나도 좀 당황스러워. 그냥 아멜리아가 계속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사실 아멜리아도 어리니까 언젠가 결혼하고 자식을 봐야 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떠나보내기 싫어. 그러면 나랑 결혼하면 되겠지?”
아멜리아는 묵묵히 내 말을 들었다.
빠르게 말하던 내 말이 조금씩 느려진다.
“하지만 그건 너무 멋대로잖아? 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게 주변에 알려지면 괜한 정치적 일들이 벌어질 테고. 그리고 아멜리아가 황실의 일원이 되면 구설수와 정치적 논제에 시달릴 거야.”
“…….”
“아멜리아랑 함께 있고 싶지만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내가 한 결혼들, 아내들도 나름의 각오와 책무를 분명히 알고 한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맺어지는 정략결혼.
하시아는 예외였지만…… 그건 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 맺어진 연이었고.
다시 황제가 된 내가 구애한다는 건 정말 완전히 이야기가 달랐다.
감히 거부할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걸 생각하면 사실 아멜리아와 꼭 결혼해야 하나? 그냥 내 욕심이니까. 계속 메이드로 옆에 있어 달라고 하면 안 될까 싶기도 하고. 또 결혼을 몇 번이나 하고 자식까지 본 놈이 결혼해 달라고 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고 그냥 그래.”
“…….”
“그냥 그러네. 마음이 복잡해.”
나는 한숨을 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나도 내 마음을 깨달았다.
전생부터 이어진 내 책무,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은 끝이 났다.
하시아도 돌아왔고,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도 하나가 되었다.
물론 앞으로 황제로서 국정을 계속 꾸려나가야겠지만…….
“이제 제가 대답하면 되나요?”
“……잠깐만.”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심호흡을 했다.
온갖 멘탈 터지는 일들을 많이 겪어본 나도 각오가 필요했다.
“말해 두는데 아멜리아, 이건 이 자리에서만 하는 이야기니까. 내가 황제라는 이유로 대답을 좋게 해 줄 필요는 없어. 그건 내가 괴로워.”
“예,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정말로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아멜리아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사실 황제 폐하셨다고 해도, 도련님은 제가 계속 봐 온 분이고 앞으로도 계속 뵙고 싶은 분입니다. 안 보이면 뭐 하고 계실까 걱정이 되고, 떨어지면 무슨 사고라도 당하셨나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
“그래.”
“그래서 계속 옆에서 모시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멜리아는 내 손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결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하겠습니다.”
“그냥 옆에만 있어 줘도 돼. 무리할 필요는 없어.”
아멜리아가 나를 정면으로 보는 시선에 나는 천천히 말했다.
“사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거든. 아멜리아와 함께 있고 싶지만, 그게 남녀의 애정인지는 모르겠어. 워낙 오래 본 사이기도 하고.”
“예.”
“그걸 확인해 보고 싶어.”
나는 속삭이면서 아멜리아를 향해서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거리.
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던 아멜리아의 눈도 주저하다가 스르륵 감긴다.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
나는 아멜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는 키스했다.
달콤하고 녹아드는 촉감이 입술에서 귓가로, 뺨이며 목으로 번져 나간다.
첫눈이 내리는 밤, 조용한 밤에 소중한 사람과 끌어안고 있다.
쪽.
긴 시간이 지나자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떨어지고서도 한참 눈을 감고 있던 아멜리아가 눈을 슬그머니 뜨고는 나를 보았다.
뺨에 도는 홍조.
“……어때?”
“뭐, 뭐가요?”
“또 하고 싶으면 결혼하는 게 맞아.”
“…….”
말도 안 되는 감별법이라고?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아멜리아는 무척이나 당황한 눈치였다.
복잡하게 엉킨 시선, 나를 보다가 주저하며 말한다.
“……이런 건 도련님이 어리실 때 졸라서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그게 대체 언제지?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세 살 되셨을 무렵입니다…… 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만.”
아멜리아는 말하기가 버겁다는 듯이, 띄엄띄엄 말하고 있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번지는지, 뺨이 도홧빛으로 물든다.
나도 아멜리아의 반응이 무척 가슴이 떨렸지만 침착한 척을 했다.
여전히 손은 잡은 채로.
아멜리아는 눈을 내리깔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무척 이상합니다.”
“으음, 그건 다들 그래.”
나는 아멜리아의 허리에 살짝 손을 대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또 하고 싶어?”
“…….”
아멜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시간을 끌다가.
끄덕.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겠다고.
“……아멜리아.”
그건 나도 그렇다.
본래 오래 같이 본 사이라면,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사이라면 이런 변화가 어색하고 낯선 법이다.
나도 사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냥 아멜리아를 자주 볼 수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굳이 꼭 결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 다사다난한 인생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일단 입술을 맞대고 나니 모든 생각이 뒤바뀌었다.
이 달콤한 시간을 위해서라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
그리고 그건 아멜리아도 마찬가지.
내 옷자락을 살짝 잡은 손끝이 떨리면서도, 저어하면서도 눈을 살짝 감는다.
아까의 달콤함을 다시 맛보고 싶다고.
“…….”
키스해 버린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그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이끌리는 걸 거부할 수는 없다.
내가 아멜리아를 향해서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탁.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
반사적으로 곁눈질을 한 내 눈에 보이는 광경.
안쪽의 창문에 꼭 붙어서 나를 보는 시선들.
메이호와 오르카, 리세라에 링.
내 아이들이었다.
……사랑도 롤백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