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7)
같은 마음으로
초저녁.
황성의 응접실.
나는 알리시아랑 미레이와 마주 앉았다.
돌아오자마자 국정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지만…… 이 문제가 더 급하다.
“내가 다시 황위에 오르는데 음과 양으로 보좌해 준 이들이니 미뤄 둘 수 없지.”
“예?”
“특관님, 왜 또 어려운 말 하세요.”
미레이는 음료수를 마시면서 눈을 찌푸렸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아멜리아도 그냥 좀 자리에 앉지.”
“괜찮습니다.”
메이드복을 입은 아멜리아는 내 옆에 서서 자리의 세팅, 시중을 드는 중이었다.
메이드답긴 한데…….
어차피 이런 이야기는 질질 끌어 봐야 구차해진다.
지금부터 높은 분들의 필살기, 전가의 보도를 휘두를 때다!
“음, 아까 이셀렌이 이상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그냥 잊어 줘라. 황실 안에서 소통의 부재가 있었다.”
“…….”
소통의 부재!!
뭔 사건이 일어나건, 뭐가 잘못되었건 저 단어 하나면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뭉개 버릴 수 있는 마법의 단어다.
부하들을 감싸 주면서 황제인 나도 책임 회피!
너무 효과가 좋아서 남발은 금물이지만(책임 소재가 붕 떠 버리는 게 반복되면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다.) 이번에는 좀 쓰자.
한데 알리시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와 결혼 문제 말인가요?”
“서로 예전부터 아는 사이인데 새삼스럽게 격식을 차리네?”
“상당히 당황스러운 화두긴 했습니다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이해가 가더군요. 폐하를 기다리는 동안 셋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음, 그러니까 소통의 부재였다니까?”
내가 애써 웃는데 알리시아는 계속 말했다.
“풍문에 따르면 저희 세 사람 다 이미 황제 폐하의 여자라고 낙인이 찍혀 있더군요.”
“후루루룩!”
눈을 크게 뜬 미레이가 주스를 빨대로 힘차게 빨아들였다.
……진짜 한 대 좀 쥐어박고 싶다.
알리시아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3황후 전하가, 그런 기미를 읽고 저희들을 불러들여서 조치를 하려고 한 건가요?”
“뭐 대충은 그래. 아무튼 소통의 부재였다.”
“…….”
툭, 툭.
알리시아는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나를 복잡하게 바라보았다.
알리시아 크로셀, 리젠 리브라타로 태어난 내 약혼자였지만 파혼한 상대.
아름답고도 영민한 여자지만…… 사실 내 팬이기도 했다.
내가 사실 시릭이었다는 걸 알고 보는 게 처음인가?
알리시아는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는 물었다.
“그럼 폐하의 진의는 뭔가요?”
“그야 잘 먹고 잘사는 거지?”
“전 이미 잘 먹는데요!”
미레이가 기운차게 외쳤다.
……도저히 안 되겠다.
한숨을 푹 쉰 나는 미레이를 향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예? 왜요?”
용케도 손짓을 알아들은 미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아멜리아가 좀 놀란 얼굴이었지만 나는 눈짓으로 제지했다.
본래 황제에게 식사 중에 일정 반경 이상으로 접근하는 건 금지다.
식탁의 나이프와 포크는 암살에 써먹을 수 있으니까.
“예? 특관님, 대체 왜…….”
“아오! 진짜!”
나는 대뜸 미레이의 목에 팔을 감고는 주먹을 머리에 비볐다.
마사지하듯이 아주 정성스럽고 힘차게!
“꺄아아악! 아아악!! 아파요! 특관님! 아파요!”
“아프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너 폐하라고 안 부를래? 폐하라고 해! 폐하라고!”
“시, 싫어요!!”
“뭐? 너 진짜 혼날래?”
나는 꾸중하면서 계속 미레이의 머리를 주먹으로 꾹꾹 눌렀다.
“으아앙! 아프다니까요! 놔 줘요! 살려 주세요!”
미레이가 울먹거리건 말건 나는 열과 성을 다해서 머리를 북북 긁었다.
이것은 가마도 예뻐서 성질나네!
“아, 진짜 내가 갈굴 만큼 갈궜는데도 애가 발전이 없어! 너 대체 커서 뭐가 될래?”
“이미 다 컸는데요! 아르센 대장님은 계속 특관님 옆에서 이렇게만 하라고 하셨는데요?”
“……뭐? 아르센이 뭐라고?”
나는 순간 주먹을 멈추고는 물었다.
내 옆구리에 낀 미레이는 울먹거리면서 토로했다.
“진짜예요! 아르센 대장님은 제가 잘한다고 하셨어요! 원래 특관님은 마음에 드는 부하 잘 괴롭히니까 참으라고요.”
“그래! 총애받아서 좋겠다! 황제의 은총 받아 봐라, 이것아!”
“꺄아아악!?!”
미레이의 비명이 높아지건 말건 나는 더 성질이 났다.
아니, 미레이가 뭔 배짱으로 자꾸 개기나 했는데 부추김까지 받고 있었네?
“아, 진짜 미치겠다.”
“……리젠?”
탁.
테이블을 치는 소리에 나는 앞을 보았다.
알리시아가 정색하고는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잠깐 말이 헛나왔네요.”
“아니, 리젠도 맞긴 하지. 둘 다 내 이름이니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그럼 혼인 제안은 무효가 되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요?”
“……음.”
나는 잠깐 셈해 보았다.
알리시아 크로셀, 이제 승계했으니 크로셀 후작이지?
크로셀 후작의 영지는 상당히 비옥하다. 귀족들 중에서 탐낼 이들이 많다.
그리고 귀족에게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알리시아도 마찬가지다.
알리시아는 하프엘프라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
즉, 계승권이 붕 뜰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알리시아의 영토와 재산을 노리고 온갖 귀족들이 들러붙겠지?
“환생한 황제와 약혼 관계였다는 사실 때문에 당분간은 조용하겠지만, 한 50년 뒤면 온갖 청혼들이 있겠지. 너는 골라잡을 수 있을 테고. 물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사실 하프엘프가 고위 귀족이 된 건 제국 역사에 처음 있는 일, 결혼을 안 해도 주변에서는 함부로 말을 못 할 테고.”
“…….”
“어이없이 보지 마, 지금 정치적인 설명 중이니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제국의 황후가 되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 너희들은 이미 잘 먹고 잘사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재산과 여유가 충분히 있겠지. 앞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내가 친구로서 도와줄 수도 있고.”
“…….”
“환생한 나와 약혼 관계였다는 사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덮어질 거다.”
또 다크엘프들의 정보 공작이 있을 테고.
나는 턱을 괴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결혼은 선택이어야지 강요여서는 안 된다. 내 약혼녀였다는 사실에 발목 잡혀서, 등 떠밀려서 결혼하면 행복할 리가 없지.”
“……어지러운 이야기네요.”
“그만큼 결혼 생활이 힘들다는 거지. 야, 꿈틀거리지 마.”
나는 내 겨드랑이에 낀 미레이의 머리를 향해서 쏘아붙였다.
미레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물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데 어떻게 참아요?”
“널 상대해야 하는 내 인내심을 본받아라.”
내가 투덜거리는데 알리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없던 이야기가 되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폐하.”
“음? 벌써 가게? 아직 이야기하는 중인데.”
“더 이야기하기 힘든 자리겠군요. 그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알리시아는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그제야 나는 미레이를 풀어 주었다.
턱을 어루만지고 눈가를 훔친 미레이가 나를 흘겨보았다.
“특관님, 너무 말이 심하잖아요? 알리시아 씨는 특관님 생각 많이 했는데.”
“분위기에 떠밀려서 결혼하면 애 인생 망친다. 그리고 너 진짜 폐하라고 안 부를래?”
나는 좀 진지하게 말했다.
사석에서야 넘어가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러다가는 미레이의 목이 날아간다.
황제 모욕죄라는 게 상당히 범위가 넓어서, 미레이는 나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불경죄로 걸릴 수 있었다.
한데 미레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자꾸 저한테만 그러세요. 미리나 세라는 아빠라고 부르고, 이셀렌 씨도 시릭이라고 부르던데.”
“야, 애들하고 너하고 같냐? 같아?”
나는 미레이의 코를 잡고 비틀어 버렸다.
미레이는 본바탕이 미녀라서, 헛소리를 해도 예뻐 보인다는 게 문제다.
이렇게 얼굴을 망가트려줘야지.
“아야야! 같죠! 저도 특관님을 사랑하는데요!”
“헛소리는 이제 적당히 하고. 진짜 화낸다.”
“특관님은 사랑하지만 황제 폐하와 결혼하고 싶진 않아요.”
“코가 삐뚤어지니까 입도 돌아갔냐?”
“특관님.”
미레이가 애타게 부르자 나는 손을 놓아 주었다.
빨개진 코를 훌쩍거리면서, 미레이는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저 특관님 사랑해요. 하지만 황제 폐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응, 나도 사랑했어. 헤어지자, 잘 가.”
“……아직 말 안 끝났는데요!?”
“아니, 레퍼토리 너무 뻔해서 그래.”
나는 턱을 괴고는 미레이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가 아니라 뭐, 리젠 리브라타라는 개인이나 철도헌병대의 특관으로서 너와 결혼해 달라 그 소리지?”
“……!?”
“뭘 그렇게 놀라, 레퍼토리 뻔하다니까.”
내가 제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염문이 안 났겠냐?
결혼을 8번 했다는 건 연애는 그 이상으로 많이 했다는 것이다.
구해 준 여자가 나에게 반한 거? 수백 회를 넘는다.
전생의 내 인생 자체가 전투, 전쟁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리고 각지의, 각 종족의 미녀들은 툭하면 저렇게 말했다.
“나는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내 아내가 된다는 건, 곧 정치적인 책무를 짊어진다는 이야기야. 내가 신경 쓰겠지만 완전히 덜어 줄 순 없어. 금이야 옥이야 아껴 봐야 먼지가 달라붙는 건 막을 순 없다고.”
“…….”
“그리고 아내들도 그걸 알고 있다. 다 알고 있어.”
나는 씁쓸해하면서도 딱 잘랐다.
“미레이, 난 널 좋아해. 네가 미녀라고 생각하고 놀리면 재밌어. 사실 마음에 들어. 하지만 너와 결혼 안 할 거야.”
“…….”
“나는 결국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의 황제다. 죽어서도 다시 돌아온 자리인데 이걸 훌훌 털어 버릴 수 있겠냐? 그러니까 황제로서가 아니라 나 개인으로서 다가와 달란 소리 따위는 집어치워라. 천년이 지나도 그럴 일은 없으니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영부영하게 구는 여자 상대할 시간 없다. 나는 나와 함께 싸우고 나아갈 전우가 필요한 거지, 어리광쟁이를 업고 갈 여유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와 아내들의 결혼은 정략성이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들도 다 알았고.
그럼에도 사랑했고, 서로 멀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물론 신하이자 백성, 또 전우로서 너와 함께 하겠지만 가족이 되는 건 달라. 알겠냐?”
“…….”
미레이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나를 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
미레이는 눈만 깜빡거리면서 한참 보다가 말했다.
“……새, 생각해 볼게요.”
“머리도 나쁜 게 뭘 생각해. 그냥 생각하지 마.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살아.”
“……생각해 본다니까요! 저도 생각할 줄 알거든요!”
빽 소리친 미레이는 뒤돌아서더니 달음박질을 쳐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아니, 쟤 저러다 진짜 황제 모욕죄로 죽겠는데.”
“…….”
시선.
내내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아멜리아의 시선이 내 뺨에 박힌다.
내가 흘끗 돌아보자 아멜리아는 나직하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애랑 결혼 못 하지.”
알리시아는 똑똑하다지만 어리고, 미레이는 하는 게 귀엽긴 해도 철이 없다.
아멜리아가 빤히 보자 나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매정하게 딱 잘라 놔야 정신을 차리지.”
“두 분 다 쉽게 포기하시진 않을 거예요.”
“뿌려 둔 씨가 있으니까. 하지만 연혼식인가 뭔가 치르면 그 추측도 다 끝나겠지.”
내가 앉은 자세를 고치는데 아멜리아가 찻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쪼르륵.
흘러내리는 연한 찻물을 보던 나는 불쑥 말했다.
“아멜리아는 도련님이라고 불러도 돼. 아니, 그렇게 불러 줘.”
“예?”
“따로 조치했어. 음, 그러니까…….”
“예.”
아멜리아는 정갈하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뭐라고 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은회색 머리카락의 수인 메이드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손을 뻗었다.
쓱.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
“도련님.”
“……으음.”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 보여 주겠군.
아내는 물론 자식들에게도 이 순간은 비밀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면서 위로해 준다.
다시 황제가 되고서도 정신없는 나날, 있는 것도 몰랐던 딸을 데려와야 하는 여정.
앞으로의 국책과 정사.
그걸 떠올리면서도 나도 모르게 토로하고 있었다.
“아, 로데릭 형 보고 싶다. 칼비나 누나랑 백작님도. 가룰이야 친위대 들어갔으니 언제라도 볼 수 있지만.”
“연락할까요?”
“……아니, 뭐 다들 바쁠 텐데. 어차피 곧 다시 다 보겠지.”
나는 한숨을 쉬면서, 아멜리아의 허리를 안고는 끌어당겼다.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아멜리아는 내가 하는 대로 다가와서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이마를 누르고 쓰다듬는 손길.
“훌륭하셨어요.”
“……음, 칭찬받을 일은 안 했는데?”
“옛날과 다르게 매우 절도가 있어지셨습니다.”
“…….”
임자 있는 여자에게 치근거리던 시절에 비하면 양반이라 이건가.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하긴, 아멜리아는 내가 시릭이라 자각 못 할 시절부터 계속 옆에서 걱정하고 살펴 주었지.
그리고 황제가 된 지금도.
둘만의 자리에서 나를 위로해 주고 있다.
마주치는 시선.
나도 모르게 아멜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늑대 귀를 쫑긋거리는 메이드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계속, 계속 내 이마를 쓸어 주고 있었다.
그만두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겠다고.
물론 나는 그만두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아멜리아, 나랑…….”
그보다 더 가까이 있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