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6)
수습은 내 몫이지
나는 시릭 카라카스고, 여기는 물질계 카라카스다.
좋아, 지식이나 자아에는 영향이 없군.
정신 오염은 안 당했다는 걸 확인한 나는 옆에 앉은 딸아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링, 마녀의 모습을 취한 딸아이는 정좌하고는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린 내 눈에 보이는 건 은발의 다크엘프.
이셀렌이었다.
“……시릭, 지금 뭐라고?”
눈가가 촉촉해졌던 이셀렌이 갑자기 돌변했다.
착 깔린 목소리.
물론 평소에도 이러지만 나에게는 좀 부드러운데?
주변을 둘러본 나는 이셀렌의 옆에 하시아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아, 귀환 과정에서 시간이 별로 안 지났다 싶어서.”
“지금 뭐라고 했어.”
“…….”
아, 이셀렌은 나이 이야기하면 진짜 상처받지.
겉만 보면 20대 초중반 미녀지만, 그녀는 자기가 인간인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몹시 신경 쓰고 있었다.
물론 아내들은 장수하는 종족이라서,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독 이셀렌은 민감하게 굴었다.
인간 남자는 보통 자기보다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않냐면서.
나는 얼렁뚱땅 말했다.
“……음, 며칠 만에 보는지 몰라도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했지?”
“시릭, 아니었는데?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원래 한국말이 뉘앙스가 미묘해.”
하시아의 말참견을 무시한 나는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아멜리아가 적잖이 놀란 얼굴로, 눈이 동그래져서는 나를 보고 있었다.
“아멜리아, 나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웃으면서 아멜리아의 손을 잡아도 반응이 없다.
내가 장난스럽게 아멜리아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는 모양새다.
“……도련님, 사람 걱정하게 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아멜리아가 걱정해 준 덕에 빨리 돌아온 것 같은데?”
“저도 걱정했는데요, 특관님!”
“넌 입가의 크림이나 닦고 말해라. 알리시아도 오랜만이네. 귀족들 상대하느라 바쁘지 않았나?”
내 인사에 알리시아는 어물거리다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자리의 인원 구성이 희한하군.
나는 손사래를 치고는 이셀렌을 돌아보았다.
“일단 상황 정리부터 하자, 애도 좀 씻기고.”
“……누구야?”
이셀렌은 그제야 내 옆에 앉은 링을 보고는 당황했다.
마녀라는 걸 알아보고는.
“하시아가 숨겨 놨던 내 딸.”
“……뭐라고?”
“예?!”
다들 깜짝 놀란 목소리.
앞으로 할 일이 많겠다.
일단 가족 관계 정리가 우선.
아멜리아와 미레이, 알리시아를 다른 방에서 기다리게 조치했다.
그리고 나는 하시아와 이셀렌, 링과 마주 앉았다.
“인사해, 내 막내딸……은 아니군. 앞으로 호적 정리를 좀 해야겠는데, 5녀 링 카라카스다.”
“…….”
이셀렌은 매우 복잡한 얼굴로, 의심스럽게 하시아를 돌아보았다.
하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나랑 안 닮았지?”
“엄마 닮았으면 큰일 났죠. 아빠가 속 터져서 죽을 테니까.”
링이 되바라지게 굴더니 이셀렌을 보면서 빠르게 말했다.
“그야 당연히 의심하실 거 압니다만, 칠죄신과 최종 결전 직전에 하시아 씨가 임신 상태였죠? 그때 태어난 아이가 저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좀 떨어져 있었어요. 초면이라서 당황스러운 건 아실 텐데 앞으로 정보 관제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하시아 황후가 돌아오면서 그 딸도 데려왔다는 식으로 윤색해서요.”
“……할 수야 있지만 다들 쉽게 믿기는 힘들 텐데?”
이셀렌은 좀 놀라면서도 대꾸했다.
친아들인 오르카도 어려워하는 그녀에게 대뜸 파고드는 상대는 드무니까.
벨이 말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는 이후에도 계속 출생에 대한 의심을 받을 테니까요. 따지고 보면 하시아 황후가 100년 넘게 어디에서 뭐 했냐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도 없고,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는 의혹도 계속 수면 아래에서 맴돌겠죠.”
“내 딸 맞아, 초능력자니까.”
나는 얼른 거들었다.
벨의 경우를 보면 초능력은 부계로 계승되는 게 확실했다.
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이리 두둔하지만 그래도 의심이라는 건 지워지지 않는 법이죠. 완벽한 처리는 바라지 않아요. 그저 대놓고 말이 안 나올 수준으로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사실 난 의심받아도 별 상관없는데, 아빠가 괜히 신경 쓸 것 같거든요.”
“……일단 처리하지.”
이셀렌은 동요를 억누르고는 말했다.
그러고는 나를 복잡한 시선으로 본다.
하시아의 딸을 데리러 간다는 사실을 왜 사전에 이야기 안 했냐고, 또 그 외 감정을 담아서.
링은 빠르게 말했다.
“어차피 연혼식은 준비되고 있죠? 이제 와서 중지하면 비용이 더 들 테니까 그냥 강행하는 게 낫겠네요.”
“잠깐.”
나는 손을 들어서 링의 말을 막았다.
링이 의아하게 보았지만 나는 웃기만 했다.
링은 지금 텔레파시로 우리들의 생각을 읽어 내고는 전광석화처럼 처리하는 것이다.
“링,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국사는 내가 처리하마. 너는 어머니와 회포라도 풀어.”
“오, 마이 마더?”
링은 하시아를 뚫어져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오, 마이 숄더는 밈이라도 됐죠. 저 사람하고 무슨 이야기를 더 해요?”
“큰일이네. 자식 교육을 누가 어떻게 시켜서 애가 이렇게 반항기지?”
“당신이잖아.”
“엄마잖아요.”
나와 링은 순간 기가 막혀서 하시아를 공격했다.
하시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링. 아빠랑 같이 있으니까 좋아?”
“……모르겠는데요.”
“마녀도 아니면서 왜 감정을 모르는 척해? 사실 좋지?”
“……시끄럽고요. 엄마가 입 열어 봐야 방해만 되니까 조용히 하고 아빠 일이나 도와드려요.”
링은 정말 쌀쌀맞게 딱 잘랐지만 하시아는 웃기만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링. 그래도 어머니잖아. 잘 해드려라.”
“어머니라서 이 정도로 넘어가 주는 거예요.”
“그래도 보는 아빠 마음이 좀 착잡하다, 응?”
내가 부드럽게 이르자 링은 입을 다물었다.
살짝 붉어진 뺨.
딸아이가 복잡한 표정이자 나는 가볍게 일렀다.
“하시아, 링에게 벨을 소개해 줄래?”
“그래, 그럴까? 아빠가 직접 링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딸, 얼른 따라와.”
“……됐어요,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게요.”
링은 하시아의 제안을 거절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 하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애가 머리는 좋은데 너무 예민하네.”
“그야…….”
텔레파시가 너무 강해서 남의 생각까지 읽어 버려서 그런 거 아닌가?
벨도 그러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링이 훨씬 더 능력이 강했다.
벨이 지표를 어루만지는 식이라면, 링은 드릴로 내핵까지 뚫고 들어갈 정도다.
하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대해 본 경험의 문제지. 똑 부러진 것처럼 굴어도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도 변변하게 못 해 본 애라서. 나 말고는 상대도 없었고.”
“하긴…….”
“내가 가 볼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
하시아는 일어나면서 빙긋 웃었다.
“그럼 시릭, 결혼 준비 잘하자?”
“…….”
하시아가 나가 버리고 남은 건 이셀렌.
이셀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애가 무척 머리가 좋은 것 같네? 까다롭지만.”
“하시아의 딸치고는 굉장히 잘 자란 거지. 이셀렌, 나도 부탁하마. 링에 관한 정보통제, 잘 부탁한다.”
세상이 보기에 링은 내가 숨겨 놨던 딸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이런저런 추측, 근거 없는 소문이 달라붙지.
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내 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흘러 다니는 걸 최대한 막고 싶었다.
황명으로 무작정 찍어 누르면? 오히려 의심이 더해진다.
이런 건 정보전에 능한 이셀렌에게 맡기는 게 낫다.
“알겠어, 최대한 빠르게 조치할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완벽을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뭐든 지원하지.”
“그러면…… 연혼식은 치를 거지?”
이셀렌이 조심스럽게 묻자 나는 멈칫했다.
아까 확인해 보니 내가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3주다.
앞으로 2주 뒤에 연혼식이 치러질 예정이고.
“……음, 엄청 빨리 진행했네. 이걸 1달 만에 해치운다고?”
“5주야. 돈과 인력으로 시간을 단축한 거지. 네 부재를 오래 감출 수는 없고, 그쯤이 한계라고 생각했어.”
이셀렌이 쌀쌀맞게 말했다.
서운해하는 시선으로 나를 흘겨보면서.
나는 웃으면서 달랬다.
“미리 말하지 않고 떠나서 미안하다.”
“아니, 됐어. 돌아왔으면 됐어.”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는 거지?”
“그래, 이제 정말 끝이다.”
나는 홀가분하게 말했다.
더는 내가 자리를 비우고 가 버릴 일은 없다고.
이셀렌은 그제야 얼굴을 풀고는 말했다.
“그러면 연혼식을 치르면서 링에 대한 세간의 의심을 걷어 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사실 연혼식 자체가 하시아의 제안이다.
링을 데리러 간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오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술책.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꼭 치를 필요는 없는데.
“하객들에게 이야기는 아직 안 돌렸지?”
“……먼 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밀하게 전했지만 지금이라면 취소할 수 있어.”
이셀렌이 은근히 불안하게 나를 보는 건 내가 그만두라고 할까 봐서다.
뭐 여전히 불안한 황후들의 입지, 내 아이들의 기반을 다지려면 치러야지.
또 올해 내내 부족한 국고를 보충할 수 있고.
“너희들이 힘들게 준비했는데 해야지.”
“……응.”
내 허락에 이셀렌은 겨우 표정을 풀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나 보다 싶었는데, 내 옆에 다가와서는 의자 등받이를 짚고는 고개를 숙인다.
“……아까 뭐라고 했어?”
“…….”
그냥 넘어가 주는 거 아니었냐.
요염한 미모의 다크엘프가 불안한 표정으로, 섭섭해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차라리 화내면 모를까, 상심하는 게 더 난감하다.
나는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오가는데 후유증으로 좀 어지러워서 말이 헛나왔던 거야.”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라그리즈.”
나는 짐짓 한숨을 쉬고는 이셀렌의 손을 잡았다.
쪽.
이셀렌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꼭 맞잡은 나는 부드럽게 일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더 매력적이라서 눈을 뗄 수가 없어.”
“……거짓말.”
“진짜야, 둘만 있으면 감정을 풍부하게 드러내니까. 그 무시무시한 암살여왕이 남편과의 나이 차이에 굉장히 신경 쓴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까?”
“…….”
아무도 안 믿지.
나는 다시 이셀렌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일렀다.
“나만 아는 비밀이 생겨서 즐거운데?”
“……응.”
쪽.
이셀렌이 고개를 기울여서는 가볍게 키스했다.
겨우 마음이 풀린 모양이다.
이셀렌에게 나이 차이는 금기라서…… 내가 건드리면 정말 상심한다.
이리 울적해 하니 달래 줘야 한다.
이셀렌은 나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시릭, 연혼식 전에 준비해야 할 게 있는데.”
“뭐가 더 있어? 나는 이제부터 밀린 국정을 정리할 생각인데.”
“결혼할 여자부터 정리해야지.”
……황제가 아내에게 이런 소리를 다 듣게 되는군요.
나는 생각하곤 말했다.
“아, 뭐 추가로 결혼하라는 거? 그거 그냥 하시아가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세워 둔 방책이야. 그냥 없던 일로…….”
“이미 다 말해 버렸는데?”
“잠깐, 전부 다?”
나는 멈칫하다가 아까 인원 구성을 떠올렸다.
하시아와 이셀렌이 나란히 앉아 있었지?
마주 앉은 건 미레이에 알리시아 또 아멜리아였다.
“……강압적으로 말했어?”
“그래야 했어.”
“…….”
이셀렌이 이런다는 건,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곤욕을 치를 거라고 협박했단 소리다.
지금 다른 방에서 기다리는 세 여자에게.
내 전 약혼자인 알리시아, 바보 미레이는 둘째치고.
……아멜리아에게?
나도 모르게 그 광경을 상상하고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셀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될지는 몰랐어. 내가 무마할게.”
“……아, 아냐. 내가, 내가 수습한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아멜리아가 더 상심할 거다.
아멜리아에게는 제대로 설명해야지.
나는 각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낙제점 시험지를 부모님에게 바치는 자식이 된 기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