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4)
앞으로 태어날
1만 년이 지났다니?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또 염동결계를 발동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옷 두껍게 입고 바다에 빠진다고 몸이 안 젖겠는가?
이성과 달리 마음이 느긋해진다.
“으으음. 아예 잠수복을 입어야 했나?”
〈아주 정신 멀쩡한 거예요, 보통 여기에서는 입도 못 여니까.〉
한숨 소리.
돌아보니 시릭 카라카스의 외모를 한 남자가 나를 어이없이 보고 있었다.
……모습은 나지만 실체는 내 딸아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안녕? 약속대로 아빠가 데리러 왔단다.”
〈1만 년 지났다는 소리에 안 놀라요? 거짓말이라는 걸 텔레파시로 읽었나?〉
“…….”
다행이다.
진짜 좀 놀랐거든…….
하지만 딸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얼른 데리러 온다고 해 놓고는 내내 노닥거렸죠? 차라리 처음부터 말하지 말던가. 거짓말쟁이.〉
“음, 바로 오지 못해서 미안하단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아빠가 좀 바빠서…….”
“…….”
나는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 얼굴을 한 딸아이에게 사과한다는 건 너무 좀 낯설어서.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미안하다. 원래 모습으로 좀 돌아와 줄래? 아직 아빠는 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단다. 물론 너에게 사과해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제대로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단다.”
〈싫은데요, 비명 지를 테니까.〉
반사적으로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 딸아이, 아직도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이 아이는 정말 보통이 아니다.
온갖 정신이 도도하게 흐르는 계면차원 속에서 스스로 자아를 유지하고.
또 타락한 하시아를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에 카라카스로 돌려보냈다.
나 이상의, 아니 역대 최강의 소질을 가진…….
〈그래요. 내가 벨보다 강할걸요? 똑같은 초능력자 2세라도 성장 환경이 아주 다르니까.〉
하지만 말하는 걸 보면 토라진 딸아이다.
나는 웃으면서 달랬다.
“아빠는 네 얼굴에 수염이 나고, 다리털이 숭숭 났어도 받아들일 수 있단다.”
〈……아니거든요?〉
“괜찮아. 코털은 뽑으면 된단다.”
〈……진짜.〉
딸아이는 징그러운 걸 보는 얼굴이 되었다.
이딴 상스럽고 추잡한 소리를 하는 게 제국의 황제이자, 내 아빠라고? 질색하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이름도 받지 못한 딸아이는 나에 대한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전에 만날 때도 그랬고.
나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묘하게 삐지고, 토라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야…… 딸아이를 이리 위험한 곳에 오랫동안 혼자 놔 뒀으니까.
데리러 온다고 해 놓고 또 시간이 걸렸고.
아빠인 나에게 서운할 만하지.
하지만 다방면으로 화난 사람에게는 차라리 하나를 부각시켜서 집중하게 만드는 게 일이 잘 풀리는 법이다.
요는 몸통을 열어서, 적의 공격을 유발하고 카운터 치는 개념이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딸아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그래요. 이게 그렇게 보고 싶어요?〉
샥.
가벼운 일렁거림이 있고 나서.
처음으로 아이의 본모습이 나왔다.
이제 10살 전후,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녀,
금발에 붉은 눈, 정묘한 이목구비가 서양 인형처럼 사랑스러운데…….
머리에는 두 개의 뿔, 허리에는 꼬리가 달려 있었다.
내 시선에 딸아이가 쏘아붙였다.
〈됐어요? 만족해요?〉
“내 딸이지만 참 예쁘네.”
〈놀랐으면서. 사실 생각도 못 했죠? 엄마가 서큐버스이니 나도 서큐버스예요.〉
사실 전혀 상상 못 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묘하게 뿔이 난 이유, 본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했던 것도 이해가 가고.
하시아는 초능력, 비전을 써서 평소에는 마녀의 외모를 취하고 다녔다.
서큐버스는 일곱 이종족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들, 칠죄신의 종복이라고 오인하기 쉬우니까.
〈그래요, 이러면 안심이 돼요?〉
삭.
딸아이는 로브를 입고, 금빛과 푸른색이 섞인 머리카락으로 변했다.
하시아처럼 마녀로 의태한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낫겠다. 우리 딸 진짜 모습이 너무 예뻐서 별 미친놈이 다 꼬일라. 아빠는 아직 그런 거 허락 못 해요.”
〈…….〉
“왜 그렇게 의심스럽게 보니? 물론 지금 모습도 아름답지만 서큐버스의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라서 아빠도 눈 둘 데가 없을 정도였다. 한 200년은 그거 감추고 살아다오.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너에게 치근거릴 걸 상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구나.”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나중으로 미룰 말이 아니지. 앞으로 미모 조심해라. 너무 예쁜 것도 살기 힘들지.”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딸아이는 기막혀했다.
〈……갑자기 황녀가 하나 더 생겼다거나, 그 딸이 사실 서큐버스였다는 게 폭로될 경우에 정치적 파급과 우려를 말할 줄 알았는데요?〉
“그런 일이 있으면 아빠가 다 처리해야지. 아빠는 그러려고 황제 한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공적으로 너는 천년제국의 은인이다. 네가 몇 번이고 개입한 덕분에 칠죄신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내가 다시 황제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제국민들은 너를 백 년 정도는 칭송해도 모자라지.”
〈…….〉
딸아이는 입을 다물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사실 진짜로 데리러 올 줄도 몰랐고요. 여기에 대한 설명은 엄마가 다 말하지 않았어요? 여기 와 버리면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고요. 엄마도 수십 년은 걸렸어요.〉
“내가 자리를 비우면 제국이 어떻게 될까, 그 걱정 말이니? 물론 걱정이야 하지.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제국은 내가 없어도 돌아가야 한다.”
물론 아직은 때가 아니지.
토막 나버린 정부 기관, 혼재하는 각종 난제들.
내가 앞으로 넉넉잡아 10년, 아니 30년 정도는 일해야 그나마 구색을 갖출 정도다.
얼른 돌아가고 싶다. 또 망가지지 않을까 불안하다.
“하지만 널 데리러 오는 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단다. 그러니 데리러 왔지.”
〈엄마도 있는데…….〉
“그 여자는 못 믿겠다, 이런 중한 일에는 더욱.”
딸아이는 어이없이 보았다.
〈……자식 앞에서 엄마 흉보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자식에게 거짓말을 할까? 하시아가 나사 빠진 여자라는 거야 누구나 다 알지. 그렇다고 네 동생을 이런 위험한 일에 보낼 수도 없고. 결국 내가 직접 와서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 게 사리에 맞다.”
〈서두를 필요 없다니까요. 한 50년 뒤에 오셔도 됐는데…… 어차피 계속 혼자였고.〉
딸아이가 묘하게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딸을 이런 데 혼자 놔 두고 나랏일이 손에 잡히겠니? 이제 그만…… 함께 돌아가자.”
〈…….〉
“네가 있다는 걸 다른 가족들에게도 알려 주고, 또 함께 살고 싶구나.”
나는 진지하게 이르면서 딸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나를 보던 딸아이가 말했다.
〈이름은요?〉
“…….”
〈내 이름은 생각해 왔어요?〉
안 했습니다.
어린 딸아이가 부탁한 선물을 잊어버리고 집에 들어왔는데, 애가 달려와서는 손을 내민 상황이다.
하지만 이 딸아이는 사람 마음을 읽어 버릴 수 있다!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주워섬겼다.
“링.”
일단 말한 다음에 이유를 창출한다!
“가족들을 이어 주는 고리라는 의미를 담았는데. 사실 이름이라는 게 외모하고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거든? 그래서 네 본모습을 보고 나서 결정할 생각이었다.”
〈검색하기 힘들 것 같은 이름이네요. 하지만 엄마보단 센스가 나아요.〉
“다시 말하지만 확정은 아니고 아직 좀 더…….”
〈링 카라카스,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한 것치고는 마음에 드네요. 벨하고 똑같은 외자라는 건 좀 거슬리지만. 동생에 대한 아량으로 넘겨주죠.〉
역시 즉석에서 만든 게 들켰네.
그래도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지만.
침묵.
갑자기 딸아이가 입을 다물자 나는 안색을 살폈다.
“막상 돌아가려니 초조하고 불안하니?”
〈…….〉
딸아이는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약간은요. 나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고, 실체를 가지고 물질 차원으로 돌아가는 건 처음이라서요. 앞으로 벌어질 일이 불안하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아빠가 옆에 있을 거다.”
내 말에 딸아이는 쓴웃음을 흘렸다.
〈……엄마는 이상하고 미덥지 못한 사람이지만 의외로 맞는 말을 해요. 아이는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데에 동의할 수 없는 법이니까,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으로 받아 줘야 한다고 했었죠.〉
“하지만 너는 선택할 수 있지. 나와 함께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걸 거부하고 여기 혼자 남을 수도 있다.”
〈……내가 돌아가기 싫다면요? 여기서 지내는 게 훨씬 더 행복하다면요?〉
딸아이는 아직 내 손을 잡지 않았다.
이 안온한 곳에서 태어나서 100년이 넘는 시간을 홀로 보낸 아이.
부모에게 이름도 받지 못하고, 아버지인 나조차도 그 존재를 모르면서 홀로 있었던 아이.
머리는 좋으면서도 서큐버스라는 이질 분자.
다른 가족들이 자기를 견제할 거라고, 또 내 발목을 잡게 될 거라고 사서 걱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앞으로 영원히 혼자 지내겠다고 선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짜 하시아는 막장이야.”
그리고 이제 알았다.
하시아가 나를 직접 보낸 까닭 중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거였다.
우리 아이에게 같이 살자고 설득해 줘.
세상에 태어나 달라고.
“아니, 진짜 이런 소리 하기 싫었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말이야. 남편을 이런 데 보낼 거라면 설명이라도 제대로 하던가!”
〈너무 그러지 마세요. 본인도 자기가 이상한 거 알고 노력하고 있어요. 타락해서 한바탕 난리 친 다음에, 정신 차리고는 아빠에게 미움받을까 봐 마음 졸이고 끙끙거리던데요. 내가 옆에서 위로해야 했어요.〉
“……부모가 쌍으로 자격이 없다, 진짜.”
나는 한숨을 쉬고는 탁 터놓고 말했다.
“……그래, 이제 와서 아버지라고, 무작정 찾아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좀 뻔뻔하지? 세상은 따사로운 곳이고 행복한 곳이라고 속삭이는 것도 허튼소리로 들릴 테고. 황녀로 호의호식하고 있다고 꾀는 것도 너에겐 피부로 와닿지 않을 테고.”
여기가 현실 세계보다 더 낫지 않나?
따사로운 기운이 끝도 없이 몸을 휘감는다.
마치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 꾸벅꾸벅 조는 안온함이 계속 몰려온다.
지내기 좋은 곳이다.
“여기서 지내면 힘든 일도, 괴로운 일도 없겠지.”
〈예, 맞아요. 사실 그냥 여기 계속 남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요.〉
“네가 남으면 나도 남을 거다. 그리고 네가 마음을 바꿀 때까지 설득하고 기다릴 거야.”
딸아이는 멈칫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다른 가족들이 다 늙을지도 몰라요. 아빠 혼자만이라도 돌아갈 거라면 협조할 거고요.〉
“물론 다른 가족들도 소중하지. 하지만 그게 널 놔 두고 간단 이야기가 되진 않는다. 이런 건 선택할 수 없는 문제야.”
나는 리세라나 미리엘이 성장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
하지만 그게 지금 이 딸을 여기 내버리고 가도 된다는 건 아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최대한 빨리 마음을 돌리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겠지.”
〈……이거 공갈인데요?〉
“그래, 너는 몇 번이고 날 도와줬지. 네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무정한 아버지에게 호의를 갖고 있지. 지금 그걸 이용하는 셈이고.”
이 딸아이는 되바라지게 굴면서도 나에게 서운해 하고 있단 티가 난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나에게 아버지로서 기대하고 요구하는 게 있단 의미다.
“나와 같이 가면 힘든 일도 있을 거다. 하지만 여기와는 다르게 기쁜 일도, 즐거운 일도 있을 거다. 형제, 자매들도 생길 거고. 그리고…….”
〈그러고요?〉
“……아빠 노릇 좀 하게 해 주면 안 될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줄어들었다.
이건 좀 부끄러워서.
딸아이가 의아하게 보자 나는 말했다.
“……흔히들 부모가 없으면 자식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자식이 있어야 부모도 될 수 있는 거다.”
나는 딸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나에게 네 아버지가 될 기회를 주렴. 세상 모든 행복을 다 주겠다는 호언장담은 못 하겠지만…… 최대한 그럴 수 있게 하마.”〈프러포즈 같아요.〉
“…….”
말하고 나니 그러네.
무안하진 내가 입을 다무는데 딸아이는 내 손을 맞잡았다.
〈엄마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겼네요. 나는 엄마가 아빠에게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열렬한 프러포즈도 받았다고요.〉
“……으음, 괜찮은 거니?”
〈자기가 설득해 놓고 그런 걸 확인하면 안 되죠.〉
딸아이는 빙긋 웃었다.
〈한 번 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여기로 다시 와 버릴 거예요.〉
“그럴 일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야지. 그런데…….”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 현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으려나?
혹시 크게 흘러가 버린 건 아니겠지?
딸아이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돌아가는 시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시공 좌표는 대충 컨트롤할 수 있으니까. 너무 길게 흐르진 않았을 거예요.〉
내가 놀라서 보는데 딸아이가 빙긋 웃어 보였다.
〈링이라는 이름은 나쁘지 않아요.〉
“고맙다. 행복하게 해 주마.”
〈그거 프러포즈 같다니까요.〉
딸아이의 웃음소리.
나도 마주 웃는데 딸아이가 정색했다.
〈그리고 아빠, 돌아가면 서열 정리 제대로 해 주세요. 내가 오르카보다는 나이가 많아요. 물론 나도 주장하겠지만 아빠도 옆에서 거들어 주라고요. 괜한 시시비비 붙지 않게요.〉
“……음, 의외로 그런 걸 따지는 성격이구나?”
〈맞대면은 기선 제압이 중요하니까요. 그나마 엄마 얼굴은 알려졌지만 난 정말 처음 보잖아요? 내가 정말 엄마의 딸이 맞긴 한 건지 의심할 테고, 설사 그걸 믿어도 갑자기 굴러온 돌이라고 온갖 괄시를 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카라카스에선 DNA 친자확인도 불가능하니까요.〉
“저 세상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내 딸이 맞구나.”
내가 농담을 던지자 딸아이는 픽 웃었다.
다른 세계, 지구의 정보를 아는 거야 내 기억에서 읽어 낸 것이겠지.
“그럼 같이 돌아가자.”
〈익숙하지 않은 고향이라 불안하지만 아빠만 믿어야죠, 엄마만으로는 불안하니까.〉
이제 돌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