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3)
아이 찾아 삼만리
하시아의 제안.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나온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 반색하겠지만 스승님이 말하니 의심부터 드는데요. 이번엔 뭔 사고를 칠까?”
“너무하네.”
하시아가 웃었지만 나는 심각했다.
나와 하시아의 아이.
차원의 저편, 계면차원에서 지낸다는 그 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이 팔찌를 차고 지낸 것도 그래서고.
하시아는 구체적으로 말했다.
“계면차원으로 들어가는 건 비교적 쉬워. 문제는 돌아오는 거야. 계면차원의 시간 흐름은 여기와는 완전히 달라서, 자칫하면 100년 뒤, 1000년 뒤에 돌아올 수도 있지. 네가 돌아와서 겨우 막 안정되려는 제국에 또 황제가 사라지면 엉망이 되겠지? 그래서 벨을 보내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아직 어린애를 어떻게 보내요? 내가 그걸 허락할 것 같아?”
“그래, 화낼 것 같더라. 그래서 너를 보내되 최대한 빨리 돌아오는 세팅을 한 거야.”
하시아의 설명.
열반에 들었던 나로서는 대충 짐작이 갔다.
“계면차원 자체가 정신 오염 공간이라서, 계속 거기 있고 싶어진다고요?”
“그래, 사람, 인류의 정신은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강물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가 나오는 것처럼, 압도적인 정신을 만나게 되지. 그것과 대면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알죠.”
나는 제국민의 정신력을 끌어모아서 신검 천지신명을 다루고, 칠죄신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승천할 뻔했지.
하시아가 말했다.
“설사 최악의 경우에도 너는 죽지 않아. 시릭, 너는 재림 황제로서 이 카라카스라는 물질 차원에 묶여 버린 혼이니까, 결국 돌아오긴 돌아와. 하지만 귀환 시간이 1000년 뒤, 10000년 뒤가 될 가능성은 상당히 커.”
“둘리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나는 농담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칠죄신이 결국 돌아왔던 것처럼 나도 결국 돌아오긴 한다 이거군요. 칠죄신은…….”
“세상의 혼란이 그를 불렀지? 너 또한 너를 원하는 염원에 이끌려서 환생까지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그래서 마녀들을 모으고, 옛 기록들을 모아서 가설을 만들어 냈어. 바로…….”
하시아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네가 진짜로 이 세상, 제국으로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것.”
“나라고 빨리 돌아오기 싫겠어요?”
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하루라도 빠트리고 싶지 않다.
또 내가 사라지면 제국이 멀쩡할 리도 없고.
하시아는 정색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시릭, 정말 진심으로 돌아오고 싶어?”
“갑자기 무슨…….”
“네가 24시간, 365일 가족을 사랑할까? 단 한 순간도, 1분이라도 우리가 싫어졌던 적이 없을까?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 적은?”
나는 멈칫했다.
전생에 10년간 아내와 자식의 얼굴도 보지 않았으니까.
하시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건 마녀들끼리 토론해서 얻은 결론이야. 시릭, 네 그런 마음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야.”
“…….”
“아무리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혼자 말 타고 달려 나가서, 조용한 데서 낚시하면서 멍하니 있고 싶을 때가 있는 거지. 혹은 주말에 캠핑 도구만 달랑 들고 혼자 산속에 틀어박히고 싶을 때도 있고.”
하시아의 지적.
사람의 깊은 무의식 속에, 가족이나 친구와 떨어져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열망이 없을까?
나는 한참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도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죠. 물론 그런다고 애들을 안 사랑한다는 건 아닙니다.”
“알아, 네가 애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거.”
하시아는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인생은 길고, 삶은 고즈넉하지. 아무리 뜨거운 축제라도 식어 버리면 회한이 찾아오고, 마음의 빈 공간에 스며드는 허무함은 피할 길이 없는 법이지. 토끼 같은 마누라와 여우 같은 자식도 때로는 보기 싫어지는 법이고. 그게 사람이 사는 것이고, 어쩔 수 없는 마음인 법이고, 시릭 너도 그래. 사람이니 당연한 거야.”
“24시간 착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인생의 온갖 희비애락을 겪어 보니 하시아의 견해가 맞긴 맞았다.
“그리고 네가 계면차원으로 건너가면 그 마음이 솟아오를 거야. 퇴근하고 바로 집에 들어가기 싫어지는 것처럼, 일도 없는데 회사에 괜히 남아서 야근하는 부장님처럼. 이건 시릭이 한 말.”
“그런 건 일일이 기억하지 말라니까요.”
“네가 한 말들은 재미있어서 다 기억해. 하여튼……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네가 최대한 빨리 돌아오고 싶게 만들어 주는 거지. 칼퇴하고 바로 집에 올 수 있도록.”
하시아가 자신만만하게 웃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팔찌를 채워 놓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거죠? 뭘 준비한 건데요?”
“그게 바로…….”
하시아는 의미심장하게 뜸을 들이더니만.
“새로운 업데이트! 이제부터 새로운 결혼 생활이 추가된다, 시릭!”
“…….”
내 입은 벌어졌는데 말이 안 나온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하시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 이미 오드벨에게 이야기는 들었나? 구체적으로는 세 명과의 결혼이 더 추가돼. 원하는 여자 있으면 더 끼워 넣고.”
“……지금 그걸 설득이라고 하는 거야? 조기 퇴근이 아니라 해외 출장 가겠다! 이민 가겠어!”
내가 기가 막혀서 따지자 하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진심이지. 시릭, 아멜리아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기다리는 데 바람맞힐 생각이야?”
“자꾸 아멜리아를 걸고 넘어지는 데 무슨 만병통치약인 줄 알아?”
“대체로 치료되잖아?”
하시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시릭, 너는 이미 결혼을 했고 자식을 보았어. 결혼 생활에 찌들어 버린 남자지. 아니라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말하겠지만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야. 24시간 365일 행복한 결혼은 있을 수 없어.”
“…….”
“그렇다고 다 이혼해? 이혼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어질까? 아니지. 결국 네 영혼 깊은 곳에, 최대한 빨리 돌아오고 싶은 욕망의 심지를 꽂아 놔야 해.”
“그렇다고 새로운 결혼을 해? 칼퇴하면 집에 새로운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집에 가야지? 어떤 미친 새끼가 그래?”
내가 기가 막혀서 묻자 하시아가 정색했다.
“몰랐어? 원래 결혼은 미친 짓이야. 이건 시릭이 한 말, 그것도 나에게 청혼하면서 한 말이지.”
“…….”
젠장.
내가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쉬는데 하시아가 부드럽게 일렀다.
“결혼 생활의 상실감은 새로운 결혼으로 덮어 버리는 거지. 결혼은 다다익선이야. 이것도 시릭이 한 말.”
“……130년 전에 그냥 해 본 소리까지 기억하지 마요. 아, 진짜 황당하네. 제정신이야?”
“이미 결혼 생활에 찌든 남자를 붙들어 두는 법은 이거 말고 없다는데? 안 그래? 새로운 미녀와 새로운 결혼 생활에 대한 설렘을 간직하는 거지. 아멜리아 씨와 두근거리는 신혼 생활이 기대되지 않아?”
나는 신음만 흘렸다.
너무 황당한 주장인데…… 듣다 보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시아는 차분하게 일렀다.
“이건 총의(總意)야.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내놓은 결론이지. 통계상, 남자는 결혼 직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더라고.”
“……진짜 반박할 수가 없네.”
어이가 없지만 설득이 되기 시작한다.
내가 만약 애 데리러 갔다가 안 돌아오면?
아멜리아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어 버린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네. 진짜 내가 인간쓰레기잖아. 무조건 돌아와야 하네.”
“그렇지? 칼퇴하고 싶어지겠지?”
하시아가 자랑스럽게 웃자 나는 쏘아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어요. 이론은 알았으니까 일단 준비부터 하면서 생각합시다.”
“아니, 안 돼. 지금 당장 가.”
“예? 결혼할 거라면 준비를 해야죠.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에 국정은 어떻게 하고요?”
대리라도 세워 놓고 가야 하지 않나?
하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황제인 네가 사라진 자리를 채울 방법 따위는 없고 있더라도 그거 준비하면 대체 언제 끝날지도 몰라.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가면 오히려 돌아오는 게 늦어질 뿐이야. 집에 문단속했는지 긴가민가해야 빨리 돌아오잖아?”
“……그래요, 보일러 내가 껐던가?”
요는 내가 불안하고 초조해야, 돌아오는 시간이 단축된다는 거다.
나는 납득하고는 말했다.
“알았어요. 그래도 아멜리아에게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고 가야죠.”
“그것도 우리들에게 맡겨. 너는 지금 당장 가야 해.”
“……잠깐, 뭔 소리야? 이거 아멜리아에게 사전 동의 구한 것도 아니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하지만 웨딩드레스는 발주할 거야.”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하시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연애는 서로 잘 모를 때가 가장 설렌다고 하더라. 물론 나는 너와 함께 있으면 늘 설렜지만.”
“나도 당신하고 있으면 매번 두근거려. 속 터져서 죽을 것 같거든.”
이마를 짚은 나는 다시 확인했다.
“그래서 결론이라는 게 나라도 팽개치고 결혼식 준비와 상대 여자 설득은 모조리 당신들에게 맡기고 나는 애나 데리러 튀어가라?”
“우리들이 일을 망칠지도 모르지. 제국이 다시 어지러워지고 아멜리아가 화낼지도 몰라. 그게 걱정이 되면 빨리 돌아오는 게 좋겠지?”
“…….”
하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2중, 3중의 덫이다.
하지만 계획 자체는 맞다.
어차피 오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 내가 불안하고 초조할수록 빨리 돌아오게 될 거라니까.
“알았어요, 이해했습니다. 지금 갑시다.”
“그래, 그럼…….”
하시아가 정신을 내 앞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은 나 또한 같은 곳에 정신력을 부었다.
허공에 금이 가고, 억지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길이.
“내일 아침에 보자, 시릭. 속옷은 뭘 입고 기다릴까?”
하시아가 웃으면서 말하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위험한 곳에 사람 보내면서 하는 말이라는 게 그겁니까?”
“하는 행동은 이렇지.”
하시아는 문득 고개를 기울이더니만 나를 끌어안았다.
달콤한 입맞춤.
나도 반사적으로 끌어안으려는데, 하시아는 바로 입술을 떼고는 새치름하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 이상은 안 돼.”
“그런 게 어딨…….”
내가 무시하고 하려고 하는데, 하시아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눌러서 막아 버렸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하기 직전이 가장 달아오르는 법이라고 했잖아? 이것도 시릭이 한 말.”
“……그래요. 만족해 버리면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진다?”
미련과 불안감이 나를 빨리 돌아오게 한다는 의미.
찰나의 입맞춤도 그걸 위한 것이리라.
내가 마음을 다잡는데 하시아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편한 마음으로 보내는 건 아니야. 나도 한 번 다녀왔고,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활동하는 데에는 백 년이 넘게 걸렸으니까.”
“내일 당장 돌아오죠.”
하시아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모레 아침이면 좀 슬플 거야, 사흘 뒤라면 울지도 모르고.”
“알았어요. 울지 말고 기다려요.”
눈물을 몰랐던 마녀가 이렇게 말하면 마음이 약해지지.
나는 찢어진 공간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시간이 헝클어지는 계면차원으로.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곳, 내 아이가 기다리는 곳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오리라 다짐하면서.
그리고 어둠.
다시 빛.
푸르른 공간.
허공에 녹색과 푸른 아지랑이가 한없이. 일렁거린다.
바다 깊은 곳에 푹 잠겨 버린 감각, 몸이 한없이 둥둥 떠다닌다.
아늑하면서도 편안하다.
하염없이 위를 올려다보면서 표류하는 내 귀에 들려온 목소리.
〈1만 5천 년 지났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