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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22화 (222/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2)

안녕히 주무세요

엔라의 재판이 끝났다.

주모자인 엔라에게는 징역 170년.

그 외 제국해방군의 가담자, 협력자들의 경중 여부를 따져서 각자 처분을 내렸다.

지쳤다.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원래 재판이라는 게 진이 빠지는데, 상대는 내 아내다.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처결하느라 힘이 들었다.

“아, 진짜 죽겠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안 온다.

시간도 초저녁이고.

“음, 식욕도 없고…….”

그냥 아무나 끌어안고 싶다.

반사적으로 아내들을 떠올렸지만 안 된다.

오늘은 엔라의 처분을 결정한 날, 신하들 사이에서 온갖 잡음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 앞에서야 입을 다물어도 속으로 별생각을 다 하겠지.

바로 다른 황후를 가까이하는 건 괜한 오해를 부른다.

“아, 내가 눈치 보고 살아야 하나?”

물론 볼 필요 없다.

내가 맘대로 굴어도 다들 알아서 눈 깔고, 설설 기지.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결국 내 신하, 내 백성들이라서…… 되도록 잡음을 줄이고 싶다.

하루 이틀 정도는 좀 참는 게 낫다.

“……그냥 이대로 잘까.”

내가 혼잣말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황제의 집무실이 편의점도 아니고 24시간 상시 오픈이네?

아무리 내가 격식을 안 차려도 시종들이 미리 고해야 하지 않나?

“아하하! 아빠! 아빠!”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통통 튀는 걸음으로 달려온 소녀가 대뜸 뛰어들자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양팔을 벌렸다.

가슴으로 받으려고 하는데…….

퍽!

“으헉?!”

애가 무릎으로 내 가슴을 찍는가 싶더니 공중제비를 넘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쿨럭거리는 틈에, 훌쩍 내 등 뒤로 돌아간 아이가 내 목을 감고는 매달렸다.

“아빠!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그, 그래. 라온.”

장녀, 용족인 라온은 원래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이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네.

이어지는 발소리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장남 세탄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뒤에는 오르카, 메이호에 리세라.

내 아들과 딸이 전부 들어왔다.

“으, 으음? 무슨 일이냐?”

“저녁 문안 인사드리러 왔어요.”

리세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메이호의 손을 잡은 미리엘이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았다.

무척 부러운 시선이다.

“……음, 미리엘도 올래?”

“그래! 미리엘도 아빠한테 와!”

내 목을 붙잡고 찰싹 달라붙은 라온이 크게 소리쳤다.

미리엘은 반사적으로 다가오려다가 멈칫하고는 도리질을 쳤다.

동생들 앞이라서 사양하는 건가?

나는 손을 뒤로 돌려서 라온을 아예 목말을 태워 버렸다.

라온은 신이 나서는 내 머리카락을 헤집고 간질이고, 꼬집었다.

원래 애들은 신기하면 무작정 만져 보지.

“다들 얼굴이 어두운데 무슨 일이냐?”

“아버지, 좀 어떠세요?”

리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엔라의 판결을 보고 찾아온 것이겠지.

보통 사극에서야 어마마마를 용서해 주소서~ 하겠지만.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몇 번에 걸쳐서 설명했고, 아이들도 알아주었다.

또 극형은 아니라 징역이고.

“괜찮다. 그리고 엔라에게는 가끔 문안 가라.”

엔라가 징역을 사는 장소는 감옥이 아니다.

황도의 교외, 저택에서 지내고 면회도 할 수 있다.

“물론 엔라도 일할 거다. 텃밭을 가꾸고, 양봉도 시키고, 오라지게 굴려야지. 군사학 서적도 집필하게 하고, 검수도 맡기고.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걘 앞으로 100년 넘게 죽어라 일만 할 거야. 이렇게 된 거 내내 부려 먹어야지.”

“…….”

내가 웃으면서 말하는데…… 미리엘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손을 꼭 잡아 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빠, 힘내요.”

“음, 힘내야지.”

많은 감정이 담긴 말에 나는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목이 막히면서 말이 잘 안 나왔지만.

그걸 애들 앞에서 보일 수는 없다.

나는 미리엘과 맞잡은 손을 흔들면서 애들에게 말했다.

“자, 난 괜찮다. 괜찮으니까 다들 돌아가서 자라. 시간 늦었다.”

“여기 조금만 더 있을게요.”

눈가가 붉어진 메이호가 애써 말했다.

목말을 탄 라온이 탄성을 질렀다.

“아빠! 메이호 울어! 메이호 울어!”

“아, 아니거든요? 언니는 이상한 트집 잡지 말죠?”

메이호는 얼굴을 붉히면서 항변했다.

리세라가 웃으면서 거들었다.

“걱정 마세요, 라온 언니. 메이호 언니는 좋아서 우는 거니까요.”

“……안 울었거든? 그냥 좀 따가워서 눈 비빈 건데?”

“아버지, 괜찮습니다.”

세탄이 묵직하게 말했다.

“가족이 변할 리도 없고 저 때문에 걱정하실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

황후이자 친모인 자기 어머니는 마땅한 벌을 받았다고.

친아들인 그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또 아버지인 나에게 걱정을 끼칠 마음은 없다고.

세탄은 함축적으로 말했다.

나는 마음을 놓고는 말을 돌렸다.

“음, 그래. 오르카는 좀 어떠냐?”

“……아버지랑 말도 하기 싫거든요?”

오르카는 골이 난 오소리처럼 항의했다.

딴에는 무척 화났다는 투, 옆의 메이호가 눈가를 훔치고는 말했다.

“아, 오르카. 그만 좀 풀어. 넌 아빠를 그렇게 몰라? 이셀렌 어머니 막으려다가 그렇게 된 거지.”

“……그래도 사전에 귀띔 정도는 해 줄 수 있었잖아요?”

자기 애인에 관한 건 남자끼리의 비밀 아니었냐고.

오르카는 나에게 항의했다.

이셀렌이 먼저 알아내고 선수를 친 거지만 이건 그냥 내가 책임지는 게 낫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아빠가 잘못했다.”

“이셀렌 어머니가 선수를 치셨어요.”

갑자기 날아온 말.

다른 아이들과 좀 떨어져 있던 막내딸, 벨이 침묵을 깬 것이다.

“제가 그 자리에 있어서 알아요.”

“지금 폭로하면 수습이 안 되는데? 화내던 오르카가 무안하잖아.”

내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자 리세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오르카는 행복하게 지낸단 소리 많던데요. 다른 가족들보다 그 사람하고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요.”

“……그렇게 자주 안 봐요.”

오르카는 한숨을 쉬고는 나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행복하게 지내면 됐지. 그리고 가끔 이셀렌에게도 좀 찾아가라. 아들 뺏겼다고 적적해하더라.”

“…….”

“왜 안 믿는 얼굴이냐? 내가 달래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남편은 남편이고, 아들은 아들이지.”

오르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다들 포근한, ……사실 매우 놀리고 싶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뭔데요? 다들 왜 그래요?”

“다음에 한 번 데려와. 나도 얼굴이 궁금한데. 오르카는 절대로 안 데려오려고 한다니까?”

메이호의 말에 리세라가 맞장구를 쳤다.

“섭섭하네요, 오르카. 우리도 친해지고 싶은데 그럼 안 되나요?”

태어난 순서를 따지면 오르카는 벨의 바로 위, 즉 막내 라인이다.

남동생이 연애한다니 다들 귀여워서 장난치고 싶어지지.

“아니, 그게 저…….”

리세라에게 약한 오르카는 쩔쩔매며 말을 못 했다.

“으응.”

그때 내 손을 잡고 있던 미리엘이 졸린 신음을 냈다.

반쯤 감긴 눈, 피곤한 모양이다.

나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정리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밤이 늦었구나. 다들 돌아가서 자라. 남은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다시 하고.”

“예, 그럼…….”

메이호가 갑자기 헛기침하더니만 내게 다가왔다.

쪽.

뺨에 입맞춤.

잘 자라는 의미다.

“……그,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메이호는 자기가 해 놓고 부끄러워하더니만 후다닥 나가 버렸다.

내가 웃는데 리세라가 와서는 말했다.

“그럼 미리엘 언니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아버지.”

“그럴래?”

내가 미리엘의 손을 넘겨주자 리세라가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여서 내 뺨에 키스.

설마 리세라까지 이럴 줄 몰랐던 나는 좀 부끄러워졌다.

물론 애들에게 종종 받았지만.

이렇게 다 모인 자리에서 하는 건 왠지 쑥스럽군.

정작 리세라는 살포시 웃으면서 졸린 미리엘에게 물었다.

“언니도 하실래요?”

“……응.”

비몽사몽인 미리엘이 발돋움하자 나는 얼른 몸을 숙였다.

쪽.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라.”

내가 인사하자 미리엘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리세라의 손을 잡고 물러났다.

“아빠! 아빠! 나도 쪽! 할래! 쪽 할래!”

내내 내 머리를 갖고 놀고 있던 라온이 내려오는가 싶더니만, 내 목을 잡고는 앞쪽으로 홱 돌았다.

내가 얼른 양손으로 받아들자 내 턱 끝에 입을 맞추고는 헤죽헤죽 웃는다.

“나도 했다! 나도 아빠랑 했다!”

“그래, 그래.”

내가 어르면서 눈짓하자 세탄이 얼른 라온을 데려갔다.

세탄은 내게 눈짓으로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아빠! 잘 자! 내일 봐! 내일 봐!”

세탄에게 안긴 라온은 가면서 양손을 붕붕 흔들었다.

참 기운차다.

남은 오르카는 눈치를 보다가 머리를 숙여 보였다.

“……음, 아버지.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아니, 괜찮다. 너도 이셀렌하고 루이사 사이에 껴서 힘들 텐데 뭘. 서로 힘내자.”

내가 웃으면서 넘기자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그래, 가서 푹 쉬어라.”

“예.”

오르카까지 물러가고 남은 건 하나.

벨이었다.

형제자매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거의 침묵하던 막내딸.

다른 애들이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벨 본인이 슬쩍 뒤로 물러나 있는 투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잘 자라는 뽀뽀 해 줄 거니?”

“명하신다면요.”

“음, 그럼 다음으로 미루자.”

벨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모호한 눈빛. 하지만 이런 스킨십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시키고 말고 할 게 아니다.

벨이 말을 돌렸다.

“시끌벅적하네요.”

“옛날부터 이러지 않았나?”

“전 그때 어려서요. 기억이 거의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다들 좀처럼 모이지 않았고요.”

벨이 철이 든 시점에, 나는 이미 죽은 뒤였다.

그다음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벨은 느릿하게 말했다.

“신기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그래.”

“……저도 좋고 싫고는 있어요. 아시죠?”

“물론 알지.”

벨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지,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지.

벨은 한참 나를 보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폐하.”

“그래, 조심히 가라.”

벨은 인사하고는 나갔다.

고요해진 방.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서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기운이 펄펄 넘친다.

아이들이 날 걱정해서 보러 왔다는 사실 하나가 마음을 들뜨고 충만하게 만들어 주니까.

“가만히 있어 봐.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이렇게 된 거, 아멜리아를 부를까?

아멜리아는 지금 황성에서 들어와서 내 주변을 돌봐 주고 있었다.

오드벨에 따르면 특별 대우, 아멜리아는 장래에 내 아내가 될 여자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면 이번에 만나서 이야기 정리를…….

위이잉.

그 순간 내 팔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차고 있던 팔찌가 빛난다.

“좀 싸구려 같은데?”

“그게 좋잖아?”

슈웅.

그 순간 갑자기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 다리가 나타났다.

이어서 무릎, 로브 자락, 팔까지 튀어나온다.

마녀복을 입은 백청발의 미녀, 하시아였다.

내게 이 팔찌를 채운 장본인이기도 하고.

검지를 세워서 마녀 모자의 챙을 들어 올린 하시아가 맑게도 웃었다.

“준비 다 됐네.”

“무작정 텔레포트 하지 좀 마요. 사람 놀란다니까.”

나는 투덜거리면서 시선으로 물었다.

남들 눈을 피해서 굳이 찾아올 이유가 있을 거라고.

“우리들의 아이를 데리러 가, 시릭.”

마녀가 말한다.

이곳이 아닌 머나먼 곳.

언제 돌아올지 갈피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내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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