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1)
정리의 시간
내가 천년제국을 세우기 이전, 칠죄신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법률이 제멋대로였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고 뭐고 없었지.
나는 제국을 건국하면서 법률을 정비하고, 또 여러 가지 조치를 했다.
그중 하나가 유치장이었다.
칠죄신의 시대에는 용의자를 구금하는 시설 자체가 없었다. 그냥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거나, 감옥으로 보냈으니까.
황성의 적탑(赤塔)은 바로 그 유치장 중 하나였다.
황성 안에서 벌어진 사건 혹은 신분이 남다른 이를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곳.
나는 그 적탑 안에 있었다.
마주 앉은 건 푸른 피부, 붉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한껏 웃고 있는 미녀.
바로 4황후 엔라였다.
“그리고 제국해방군의 총지휘관, 대역죄인이시지.”
“뭘 갑자기 새삼스레.”
“…….”
딱.
나는 순간 발끈해서는 엔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제대로 정타가 들어갔다.
엔라도 비틀거리다가 이마를 누르고는 황당하게 나를 보았다.
“아, 아니. 시릭? 이게 대체…….”
“아, 조용히 해. 뭘 그렇게 뻔뻔하게 굴어? 철면피 깔면 다인 줄 알아?”
“……그냥 사실이니까?”
“그래, 내 주먹은 현실이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공격했다.
엔라는 바로 상반신을 틀어서 피하려고 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주먹을 날리는 척하다가 그녀의 다리를 걷어찬 것이다.
고통에 헛바람을 삼킨 엔라가 황당하게 나를 보았다.
“아니, 주먹이라며?”
“마음의 주먹이다. 이것아. 아, 빡쳐. 아, 짜증 나.”
나는 새삼스럽게 이를 갈면서 엔라를 노려보았다.
엔라는 그런 나를 보다가…… 뺨을 붉혔다.
“……으음, 저기, 그렇게 섹시하게 보면 곤란한데?”
“…….”
더 때리고 싶다.
진짜 좀 엎어 놓고 엉덩이 때리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쥐어박고 싶다.
이전까지야 제국군의 총수로서, 또 제국의 황제로서 엔라를 적대하고 꾸짖은 거고.
모든 일이 다 끝나고 이렇게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그냥 짜증과 빡침이 우선한다.
“아, 진짜. 이걸 콱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으음, 이제 죽어야지. 무슨 그런 소리를.”
엔라는 태연하게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내가 어이없어서 보자 엔라는 곱게 눈을 내리깔았다.
“……저기, 시릭. 그렇게 계속 유혹하면 나도 두근거려서 참기 어려워지는데?”
“안 참으면 뭐 어쩔 건데?”
“지금 문가에 경비병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
엔라가 수갑이나 족쇄를 찬 건 아니지만 엄연히 용의자 신분이다.
무장은 없고, 감시하는 병력이 있었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멀찍이 떨어진 천족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엔라는 나를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환생하고 생긴 게 엄청 내 취향이라서 참기 힘들거든?”
“…….”
모레 재판받을 여자가 뭔 소리야.
내가 멍하니 보는데 엔라는 갑자기 손으로 부채질하더니만, 슬쩍 앞섶 단추를 풀었다.
툭.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히는데 단추를 하나 더 푸신다.
……나도 모르게 가슴골을 봤다가 정신을 차렸다.
엔라는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예전에 한 이야기가 있었지? 죽은 사람 소원은 들어줘야 한다고.”
“아직 안 죽었어요. 그리고 시체랑 뒹구는 소원은 없으니까 좀 입 다물어.”
“어차피 죽을 텐데 마지막 밤 정도는 괜찮지 않아? 응?”
엔라가 야릇하게 속삭인다.
농담이면 좋겠는데…… 눈가에 뜨거운 열기가 어린 걸 보니 진짜 흥분한 모양이다.
나는 이마를 누르고는 한탄했다.
“이딴 걸 마누라라고 데리고 산 내가 한심하다. 아, 짜증 나. 몰라. 그냥 죽어. 나가 죽어 버려, 이것아.”
“그러니까 어차피 모레 재판에서 사형은 확정…….”
“아오!”
딱!
나는 또 폭발해서 엔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데 엔라는 내 공세를 읽었는지 팔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자못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데…….
“시…… 윽?!”
“웃어? 막으니까 좋아? 맞으니까 더 좋지?”
나는 멈추지 않고 연타로 후려갈겼다.
엔라는 앉은 자세에서 피하고 막으려다가 멈칫하고는 팔로 몸을 교차하고는 몸을 웅크렸다.
“…….”
빡!
드러난 정수리에 주먹을 한 대 먹인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진짜 상대하면 속 터져!”
“으으음, 진짜 아픈데? 이거 엄연한 가정 폭력인데?”
“이게 가정이면 풍비박산도 산이다!”
나는 짜증이 팍 나서는 쏘아붙이고는 숨을 골랐다.
쥐어박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엔라는 가드를 풀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시릭, 몇 번이고 말했지만…….”
“패배자는 닥쳐.”
나는 딱 잘랐다.
“내가 널 꺾었고 내 뜻이 너보다 우선한다. 그러니까 자질구레한 변명은 집어치워라, 들으면 속만 뒤집히니까.”
“변명이 아니라…….”
“변명이다. 너는 설명이고 이유라고 하겠지만 변명이야.”
엔라의 가치관, 입장에서는 제국해방군을 만든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머지않아 돌아올 칠죄신, 자기나 제국이 그나마 건재할 때 봉인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
자기가 군 지휘관으로서 일을 망쳤으니까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겠지.
“내가 환생한 게 최대의 변수였지.”
“그건 누구도 계산 못 했지.”
내가 리젠 리브라타로 환생하고, 또 힘을 길러서 제국해방군을 막고 칠죄신까지 쓰러트린 지금 상황.
이성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내가 환생하지 않았더라면 엔라의 계획이 차선책은 될 수 있었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오래 가진 못했을 테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았겠지.”
“계획이 성공하건 말건 넌 죽을 생각이었고?”
내가 노려보자 엔라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제국해방군을 이끈 엔라는 결론이 어찌 됐든 파멸이었다.
제국해방군의 계획이 실패하면 역모죄로 죽을 테고, 성공하더라도…….
“우리가 일군 제국을 파괴해 놓고 어찌 살아남을까?”
“…….”
엔라는 진즉 죽음을 각오하고 이런 것이다.
그러니 재판받고 죽겠다는 것도 허세가 아니었다.
엔라는 나를 보며 산뜻하게 말했다.
“시릭, 내 목을 베어서 제국의 기강을 바로 세우게. 이제까지 흘린 피를 덮을 수는 없겠으나 정리는 해야지.”
“응, 아냐.”
나는 혀를 차고 말했다.
“너 하나 능지처참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시체 하나만 늘어나지.”
“국가의 기강이…….”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군인 아가씨. 법률 정비는 일일이 내가 다 검토했다? 니가 나보다 법에 대해서 잘 아냐?”
“…….”
엔라는 말문이 막혔다.
황제인 나는 초법적인 존재이고, 또 법률에는 내가 훨씬 더 밝다.
나는 가볍게 테이블을 치고는 말했다.
“대역죄는 황제가 친국하고 평결을 내리지. 그리고 빠르게 처결해야지.”
칠죄신과 싸우던 시절에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어지간하면 배신자도 용서해 주고, 다시 써먹는 일도 잦았다.
나는 이야기를 돌렸다.
“제국해방군에 암암리에 협조했던 반역 도당의 무리들, 리스트는 잘 받았다. 다 쳐 내야지.”
“그거야 당연히…….”
“조용히 들어. 사법 거래다.”
나는 대뜸 결론부터 말했다.
“너는 칠죄신에 대항하기 위해 제국해방군을 이끌면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피해가 발생한 거지?”
“……시릭.”
“그렇게 처리될 거다. 이후에 내 귀환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실제로 엔라는 파군의 조각을 나에게 넘겨줬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엔라는 탄식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네. 내가 죽어야 일이 제대로 마무리가…….”
“그만 좀 죽어라. 내가 시체 더 보고 살아야 하냐?”
나는 혀를 찼다.
화를 다 내고 나니 이젠 맥이 풀린다.
“제국 성립 이전에, 내 뒤통수 숱하게 친 놈들도 전부 다 용서해 주고 싸웠다. 이제 하나 더 늘어나서 뭐가?”
“…….”
“국가의 기강? 내가 알아서 정리할 거다. 그리고 너 무죄 아니야. 사법 거래를 하고, 이후 적극 협조한 걸 감안해서 극형만 면한다는 거지. 대충 400년 형은 나올 거다.”
인간에게야 400년 징역은 감옥에서 죽으란 소리지만.
마족인 엔라는 수명이 길다.
그래도 쉽게 버틸 기간은 아니지.
“나는 널 무죄 방면하는 게 아니야. 죄인이지만 공이 있다는 걸 참작하고 이후에 협조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뿐이다. 이 정도면 다들 납득하겠지.”
“……황후는 국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죄지었다고 덜컥 자살하는 게 모범적이냐?”
나는 이를 갈면서 노려보았다.
“내가 너 변호사 붙여 주고, 온갖 편의 다 봐줘야 해? 그걸 또 내가 직접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둘러치기 하느라 수고가 2배는 들었다. 내가 개입한 티 나지 않게 국선 변호사 붙여 주느라 힘들었다?”
“……음, 라카엘이 붙은 게 우연이 아니었나?”
“그래, 천족 변호사가 마족을 변호하는 것만 해도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그림이 되거든?”
나는 딱 잘랐다.
“난 원래 구속한 죄인 사형 잘 안 시켜. 그냥 노동력 뽑아 먹고 말지. 너도 감옥에 앉아서 바느질하고, 인형 눈이나 붙이고 그래라.”
“…….”
“진짜야. 죄수들 다 그러고 있다? 아니면 채석장 갈래?”
내가 으름장을 놓자 엔라는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만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까지 떨면서 웃는다.
한참 웃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데 무작정 죽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예의는 무슨. 그냥 좀 살아. 감옥에서 쭉 있다가 살아서 나와. 섹스는 그때 해 줄 테니까.”
“…….”
“……아, 뭐. 왜? 나만 보면 몸을 배배 꼬아 놓고, 뭐?”
엔라의 시선에 나는 성질을 부렸다.
말하고 보니 좀 부끄럽군.
엔라는 조심스럽게, 은근슬쩍 손을 뻗어서 내 어깨를 만지려고 했다.
내가 질색하고는 팔을 걷어 내는데…….
파악!
순간 엔라가 내 팔을 잡아채고 꺾으면서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러 버렸다.
“떨어져라!!”
멀리서 경비를 보던 천족이 정색하고는 달려왔다.
하지만 머리가 테이블에 박힌 내가 손을 저어서는 말렸다.
“오지 마라, 괜찮으니까.”
“폐하! 하지만…….”
“이건 가족 일이니까 거기서 대기해! 아니, 뒤돌아 있어! 황명이다!”
내가 꾸짖자 쩔쩔매던 경비병은 결국 뒤로 돌아 버렸다.
엔라는 내 머리를 테이블에 누르고는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엔라가 마력까지 일으킨다면 나도 좀 위험하다.
물론 나도 초능력을 써서 대항할 수도 있지만.
경비병이 당황한 게 당연하리라.
“……400년 뒤에 하게 해 주겠다는 건 너무 긴 기다림 아닌가?”
내 머리를 꽉 잡아 누른 엔라가 달아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혀를 차고 말했다.
“어쩐지 계속 맞아 주더라. 너 이 한 방 노리고 일부러 설계했지?”
내가 성질이 나서 쥐어박는 거, 엔라가 이상하게 방어가 서툴렀다.
죄책감이라도 들었나 싶은데 아니었다.
막판에 한 번 휘어잡으려고, 일부러 밀리는 척 한 것이다.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누른 엔라가 왼손으로는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원래는 그냥 마지막 키스만 하려고 했는데…….”
“야, 너 이거 황제 시해 미수야. 아니, 불경죄다? 사실 지금 이 죄가 더 큰데?”
농담 아니라 대역죄 이상이다.
국가에 대한 반역은 재판의 여지가 있지만 나에 대한 살해 의도는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신하들이 입을 모았고.
괜히 황제 모욕죄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자 엔라가 내 귓가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지, 아니야. 이건 부부 행위지.”
“야, 정신 차려. 지금 낮이야. 아니, 사람 있잖아!”
“여자인데 뭘. 아니면 같이 끼워 줄까? 아니, 그건 좀 그렇군.”
“…….”
환장하겠네.
하지만 여기서 더 소동이 커지면, 일을 크게 벌이면 엔라의 입장만 불리해진다.
이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경비병은 이미 봤지만!) 엔라의 죄가 더 무거워지고 사법 거래고 뭐고 나가리다.
내가 궁리하는데…….
“으음…….”
갑자기 엔라가 내 귀를 깨물었다.
뜨거운 입술과 축축한 혀 놀림에 내가 움찔하자 엔라가 속삭였다.
“몸부림치지 말게, 3시간이면 끝날 테니까.”
“……아니, 이 여자야. 여기까지 하지? 화낸다? 남편 화낸다?”
“죽으려고 각오한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들었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거 추행이야! 부부 강간이야!”
“아, 그런가?”
엔라가 웃음소리를 내더니만 내 귓가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자기가 깨문 흔적을 확인해 보겠다는 것처럼.
“그러면 동의를 구해야겠군. 동의하지?”
“……이 상황에서 대답이 의미가 있나?”
“법정 증거로 채택될 수 있지. 그리고 내가 삶의 의욕을 불사를 수도 있고.”
“우리 그냥 키스만 하면 안 될까? 로맨틱하게, 헤어지기 직전의 키스만 하면 안 될까? 나도 사실 그 정도까지는 생각했거든?”
엔라는 상큼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에다 키스할지는 내가 고르지.”
“…….”
황제 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