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20)
정리하면 다음 일감
이른 아침.
나는 침실 옆의 방, 응접실의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서 피곤했다.
“으음.”
내가 눈을 감으려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러운 발소리, 유하였다.
몸의 선이 드러나는 얇은 잠옷 하나만 걸친 유하는 나직하게 불렀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이리 와.”
나는 대답 대신에 팔을 들어 올리면서 불렀다.
유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기척.
나는 앉은 채로 팔만 뒤로 뻗어서는 유하의 손을 붙잡았다.
내친김에 양손 다.
내 뒤에 선 유하는 멈칫하고는 내려다보았다.
“…….”
나는 말없이 유하의 손을 누르고, 주무르다가 풀어서 어루만졌다.
한참 그러자 유하가 먼저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매랑 같이해서 무척 기분 좋았는데? 음, 이거 신하들이 알면 황제가 난잡하게 군다고 상소라도 올리려나?”
물론 농담이다.
나는 가족 관계, 사생활을 외부에서 간섭하는 것에 질색했고 알 놈은 다 안다.
하지만 유하는 목까지 붉어져서는 침묵했다.
간밤이야 분위기에 휘말려서, 내가 원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나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하시아도 평소보다 엉망진창이었지. 원래도 그런 여자지만 동생 앞에서 그런 게 부끄러웠나 봐.”
“…….”
“하시아가 싫냐?”
나는 고개를 뒤로 꺾어서 올려다보며 대놓고 물었다.
유하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자 나는 짐짓 놀란 척을 했다.
“뭐? 하시아가 좋다고? 거 취향 참 이상하네.”
“……폐하.”
“예전에는 당신이라거나, 시릭 씨라고 불렀으면서 갈수록 예의를 차리네.”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유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사적인 자리, 가족 사이에서 폐하라고 불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황실 예법대로라면 내 자식들도 나를 아바마마라고 불러야겠지만, 일부러 그런 경우는 배제했고.
아내들도 마찬가지, 사석에서는 이름을 부르거나 심지어 반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들은 황제와 황후이면서도, 전우였으니까.
한데 유하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나를 황제로서 대하고 있었다.
“칠죄신을 추방하고 나를 단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더군.”
“…….”
“왜인지는 알아서 이제까지 이야기 굳이 안 했다만.”
자격지심.
유하는 언니가 죽은 이후에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예민한 부분이라서 나도 섣불리 파고들지 않았고.
“이제 하시아도 돌아왔고 모든 일은 끝났다. 예전처럼 부드럽게 불러도 돼.”
“……잘 모르겠습니다.”
유하는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잡은 손, 손등을 엄지로 무심코 문지르면서.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요? 언니는 그래도 된다는 식이지만 나는 쉽게 그럴 수 없습니다. 언니와 이야기할수록, 폐하에 대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때때로 갑갑해집니다.”
“…….”
“폐하도 아시겠지만 마녀들에게 친자매는 드뭅니다. 저와 언니는 초능력을 승계할 후보였고…… 누가 봐도 제가 더 우수했습니다. 사실 언니는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 같았죠. 초능력이라는 비밀스러운 힘을 이어받기에는 너무 철이 없었습니다.”
유하는 씁쓸하게 말했다.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제가 언니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만했지만…… 그 오만함은 금방 부서졌죠.”
“아니, 네 생각이 딱 맞아. 나한테 물려줬으니까.”
하시아는 매력적이지만 다소 엉뚱하고, 사고 치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외부인, 인간인 나에게 초능력을 전수해 버리는 초대형 사고를 쳐 버렸고.
“칠죄신을 추방하고, 마침내 쓰러트렸으니 잘 됐다는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동기와 의도를 무작정 무시할 순 없지.”
“…….”
유하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내 손을 꼭 잡았다.
“……폐하를 사모하게 된 건 사실입니다. 언니와 비슷한 시기에, 아니, 어쩌면 제가 언니보다 더욱 빨리.”
“…….”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습니다. 남자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고, 또 철없는 언니가 이상한 남자에게 책임질 수도 없는 엉터리 짓을 했구나 싶어서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언니와 마녀들 사이를 조율하는 한편, 당신이 엇나가지 않게 옆에서 감시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사고를 치면 그건 하시아의 관리 책임이 된다고 했었지.”
오래전 일, 내가 그때의 대화를 꺼내자 유하는 뺨을 붉혔다.
철없던 시절이라고 여겨서 부끄러워하는 것이리라.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그게 되게 안심이 됐는데. 사실 하시아가 너무 철없이 군 거지. 너처럼 상식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 마주하니 진짜 기뻤다. 마녀들이 하시아처럼 다 이상한 건 아니구나 안심도 됐고.”
“언니는 마녀들 중에서도 이상한 사람입니다.”
유하는 나직하게 웃어 버렸다.
하시아의 죽음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맑은 미소.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이걸로 됐다.
최종 결전 이후, 나와 유하는 결혼을 하고도…… 우리 둘은 다소 서로를 낯설어하고 어려워했다.
서로에게 다른 의미로 소중했던 상대, 하시아의 죽음은 우리 둘을 더 가깝게 하면서도 더욱 멀리하게 했다.
자식까지 낳은 다음에도 하시아의 이야기는 꺼내서는 안 되는 터부였고.
하지만 이제 서로 웃으면서 흉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처럼.
칠죄신과 맞서겠다고 여러 군데서 싸우던 나, 그런 나를 따라다니면서 이래저래 상식적인 조언을 하던 유하.
그 시절로.
소리 내서 웃던 유하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제가…….”
침묵.
말끝을 흐린 유하가 한참 시간이 걸려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어젯밤에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내가 안 사랑스러워?”
“…….”
유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시무룩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고 하자 나는 웃으면서 유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알고 있었어, 이젠 더 잘 알고.”
“…….”
유하가 오래전부터 마음을 품었다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결혼하면서, 나를 복잡하게 본다는 것도 알았다.
언니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것도.
충분히.
나는 유하의 팔을 당겨서는 몸을 수그리게 했다.
검고도 붉은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질이고 우리의 시선이 가까워진다.
“……시릭.”
정말 오래전처럼 부르는 이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댄다.
달콤한 감각이 입술에 닿고, 온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낮은 호흡 소리.
우리는 길고도 길게, 입을 맞춘 그대로 있었다.
꼬옥.
유하는 내 손을 강하게 잡았다.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거 언제 끝나?”
달콤함에 푹 빠진 나에게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언니?!”
유하가 후다닥 고개를 들면서 정신이 깨어났지만.
가운 하나만 입은 하시아가 뾰로통해져서는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골이 난 고양이 같다.
“둘 다 없어져서 뭐하나 싶었는데 여기서 섹스하고 있었어?”
“……키스였어.”
“누가 봐도 섹스였는데?”
엉터리 주장을 한 하시아는 불만스럽게 유하를 노려보았다.
흠칫한 유하는 뒷걸음질 치려다가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았다.
“……아침부터 뭐 그런 상스러운 소리를 하는데요? 불만 있어요?”
“어젯밤에 징징거리던 때와 사람이 확 달라졌네? 원래 섹스라는 게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건 당연하지만.”
“…….”
아, 진짜.
누가 하시아 입 좀 막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하시아 나름대로 화났다는 표현이라서 못 들은 척할 수밖에.
나 대신에 유하가 쏘아붙였다.
“자꾸 철부지처럼 굴지 말래요? 폐하가 그러니까 언니에게 학을 떼는 거예요.”
“시릭이라고 불러야지, 방금 그렇게 열렬하게 속삭여 놓고.”
“……아, 안 했거든요?”
유하는 제 발이 저린 건지 움찔했다.
하시아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좀 상스럽게 굴었네. 미안, 시릭. 기분 나빴어? 용서해 줘.”
“아, 됐어요.”
“그럼 하나만 정정해도 돼?”
뭐지.
내가 묘한 불안감에 바라보는데 하시아가 다가왔다.
걸음걸이를 따라서 가운 앞섶이 벌어지면서 브래지어, 가슴이 드러난다.
나도 모르게 봐 버리는데.
쪼오오옥.
하시아가 덮쳐 누르듯이 나를 올라타고는 입을 맞춰 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유하가 크게 놀라 움찔하는 게 전해진다.
하시아는 내 턱을 손으로 잡고, 달아나지 못 하게 만들고는 길게도 키스했다.
내가 떨어지려고 해도 놔 주지 않고.
“……후우우.”
아주 길게 키스한 하시아는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나직하게 호흡을 골랐다.
상기된 얼굴, 뺨을 내 뺨과 맞대고는 가볍게 문지른다.
친애의 의미.
내 목을 끌어안고 무릎에 올라탄 하시아는 의자 뒤에 선 유하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시릭을 더 먼저 좋아했거든?”
“……뭐라고요?”
……왜 싸울 기세지?
유하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언니가 사랑을 알긴 알아요? 사람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 말해요?”
“시릭을 가장 먼저 만난 건 나지. 그러니까 내가 더 빨리 좋아했을 확률이 높은데?”
“무슨 주사위 놀음해요? 그런 확률로 따진다는 점에서 이미 말도 안 되거든요?”
자매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하시아가 황당한 계획을 주장하고, 유하가 기막혀하고, 둘 사이에 낀 내가 중재안을 내놓던 그 시절이.
칠죄신과 맞서겠다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즐거웠던 순간들.
온갖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여기로 돌아왔다.
“숫자는 정직해. 어제 시릭은 나하고 더 많이 했지.”
“중간부터 한 걸 카운트 하지 말라니까요?”
“억울하면 시릭에게 물어보던가.”
하시아는 내 목을 끌어안고는 코웃음을 쳤다.
유하는 약이 올라서 발까지 구르더니만 내게 물었다.
“시릭 씨, 아니죠? 제가 더 많이 했죠?”
“아니, 뭘 그걸 세고…….”
내가 적당히 마무리하려는데.
쪽.
하시아가 내 오른뺨에 키스하면서 짓궂게 웃었다.
“시릭은 나랑 하는 게 훨씬 더 좋대.”
“…….”
불 지르지 마, 이 여자야.
하지만 유하도 확 열이 받은 얼굴로, 내 왼뺨에 키스했다.
“어디서 유언비어를 퍼트려요? 언니가 그런 식이니까 사람들이 질색하는 거예요.”
“그저 사실을 말하는 건데? 내가 누구다? 서큐버스다.”
스으윽.
하시아는 도발적으로 서큐버스로 변했다가 다시 마녀로 돌아왔다.
그러자 유하는 확 결심한 듯이 내 턱을 잡고는 돌아보게 하는데…….
하시아는 그런 여동생의 어깨를 잡고 막았다.
자매의 치열한 싸움.
“…….”
중간에 샌드위치가 된 내가 상황을 정리할 말을 고르는데.
달칵.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희고도 붉은 머리카락의 마녀, 내 막내딸인 벨이었다.
“…….”
벨은 막 들어와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 시선에 나는 좌우를 돌아보았다.
가운이 벌어져서는 뽀얀 속살이 드러난 하시아, 유하 역시도 슬립이 흘러내려서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서로의 뺨을 잡고, 얼굴을 밀어대는 자매 사이에 낀 게 나.
누가 봐도 아수라장이었다.
그것도 부모와 이모가 이러는 걸 보면 보통 자식은 못 버티지?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 그게…….”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벨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보고도 못 봤다는 듯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황제 폐하.”
“아니, 그게…….”
설명하기 그렇지만 그래도 설명해야 하지 않나?
내가 당황하는데 벨이 짧게 말했다.
“엔라 전하의 재판 일정이 잡혔습니다.”
4황후 엔라.
제국해방군의 총지휘관, 그 처벌을 내릴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