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7)
그러니까 책임지라고?
결혼은 장사다.
미사여구를 더하고 빼 봐야 이 명제는 진실하다.
지참금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었겠어?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는 더 그랬지.
나는 호랑이 수인 랑에이와 결혼하면서 수인들의 지지를 얻어 냈고, 다크엘프의 여왕인 이셀렌을 아내로 맞으면서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을 손에 넣었다.
폐쇄적이라 유명한 천족의 지원을 끌어내는 것도 나와 렌시엘의 결혼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물론 나는 그저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 과정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아내들 역시 나를 사랑했고, 아이들을 낳았고.
이 정도면 굉장히 성공적인 정략 결혼일 것인데…….
“뱀 새끼가 이젠 개소리도 하냐?”
내 물음에 오드벨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는 모르시겠지만 세간에서 이런저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괜히 연혼식을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몰라?”
“예, 모르십니다. 폐하에게 감히 이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고할 자도 없고, 또 3황후가 입에 올리지도 않겠지요. 제 덜떨어진 여동생이 말할 리도 없고요.”
오드벨이 흘겨보자 나비린은 발끈했다.
“아닌데? 오늘 폐하에게 긴밀하게 논의할 생각이었거든요?”
“이해 당사자는 빠져 있어라. 그리고 너는 결국 엘프의 입장에서 말할 뿐이지.”
“그런 오빠도…….”
“종족 안에 갇힌 사고방식으로는 폐하를 곁에서 모시고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 나비린, 언제까지 그렇게 갑갑하고 닫힌 사고로 살 거냐!”
오드벨이 꾸중하자 나비린은 분한 얼굴이 되어서는 빽 소리쳤다.
“오랜만에 얼굴 비치더니 자꾸 삿대질만 하는데 나도 다른 황후들과 잘 지내거든? 특히 이셀렌하고도 사이좋게 지낼 정도면 할 만큼 하는 건데?”
“그건 그저 아녀자의 셈법이다. 네가 정말 황후라면 다른 종족을 적극적으로 포용…….”
“남매 싸움은 좀 관두고.”
내 말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드벨을 재촉했다.
“오드벨,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해 봐라.”
“폐하, 4황후의 폐위가 수면 아래에서 공공연하게 오간다는 건 아실 겁니다.”
“그래.”
4황후, 마족 엔라.
지금 재판을 기다리면서 구금 중이다.
그 재판 결과에 따라서, 황후의 자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나와 마족의 연결 고리가 느슨해지니, 대신할 마족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이전에도 한 번 있었던 일 아닌가?
오드벨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1황후 하시아 전하와 8황후 유하 전하가 마녀라는 사실, 마녀에게 너무 권세가 집약되고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 무슨…….”
“더욱이 하시아 전하는 폐하가 남달리 총애하신다고 여론이 많이 돕니다. 굉장히 지극하셨죠.”
“…….”
나는 하시아에게 보통 경어를 쓰고,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까끌까끌한 화두에 나는 오드벨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뭐? 내가 입방정 떠는 놈들이 무서워서 하시아에게도 말 까고, 머릿수 맞춰서 결혼해라 이거냐?”
“말씀만 하신다면 제가 그 불경한 놈들의 목을 베고 가산을 몰수해서 전하에게 바치겠습니다. 이미 목록도 작성해 뒀습니다.”
“…….”
가족과 정치를 결부시키려는 말에 반사적으로 정색했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난 아래 애들이 내 가족에 관여하면 눈살부터 찌푸린다.
오드벨도 굉장한 각오를 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오드벨이 계속 말했다.
“다시 돌아오신 폐하의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한편, 황후들의 자리는 더욱 불안해지고 예상할 수 없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 3황후의 처소를 자주 찾는다는 풍문이 있지만 아직은 소문, 또 이야기가 많이 퍼진 게 아닙니다. 제가 연혼식을 기획한 건 이 모든 불경한 추측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알겠다. 그리고?”
나는 결국 다시 아내들과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이 결의는 가족들 사이에서만 오고 간 이야기, 아직 신하들과 백성들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도장 효과, 연혼식은 결국 필요한 절차였다.
“제 미욱한 동생을 꾸짖은 것처럼, 앞으로 폐하의 정치는 종족을 초월해서 하나의 제국을 꾸려 나가시는 게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런데?”
인류 통합.
내 아래 애들은 종족 사이의 알력 다툼으로 서로 사이 나쁜 경우도 많았고 그걸로 고생을 많이 했지.
지금 오드벨이 하는 이야기는 나도 이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황후 자리에 변동을 주시는 것부터 시작하셔야 하는 겁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곱 이종족에서 하나씩 골라서 혼인을 맺었다는 인식 자체를 파괴하는 겁니다. 반대로 폐하가 인간 중에서는 황후를 뽑지 않으셨다는 불만도 지워 버릴 수 있고요.”
“…….”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결혼을 더 하란 소리에 내가 질색하는 게 문제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벨, 무슨 저의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다만 나는 그저 정치적인 목적만으로 결혼할 마음은 없다. 새삼 선볼 생각도 없고. 좀 다른 방식을 생각하는 게…….”
“그럼 아멜리아 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이놈이 왜 아멜리아 이야기를 하지?
내가 경계심을 품고 바라보자 오드벨은 청산유수처럼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이 또한 폐하가 모르실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아멜리아 님은 굉장히 주목받는 여성 중 하나입니다. 환생한 폐하를 어린 시절부터 잘 돌보고 길러서 제국에 다시 돌려준 성모, 폐하가 각별히 아끼는 여성이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리젠 리브라타가 아멜리아의 손을 잡고 자란 건 사실이지만.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오드벨이 설명했다.
“대가 센 궁중의 메이드들도 그녀 앞에서는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황후들도 어려워하면서 각별히 조심하고요.”
“……그야 당연하죠? 폐하의 진노를 사지 않으려면요.”
나비린이 나직하게 말하자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감히 누가 아멜리아를 괄시한다는 상상을 한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이거 발작 버튼 같아.
오드벨이 유창하게 말했다.
“특히 제국군을 이끌고 출정하시는 열차 플랫폼에서, 두 분의 진한 키스는 이미 전설이 되었습니다.”
“안 했어, 미친놈아.”
“사실 여부가 뭐가 중요합니까? 다들 호들갑을 떨면서 그렇게 믿는데요. 더욱이 낭만적이지요.”
오드벨이 냉철하게 말했다.
“다시 돌아오신 시릭 카라카스 폐하를 어린 시절부터 열과 성을 다해서 길러 온 메이드, 이건 제국 시민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거리의 연극으로도 상연되고 있습니다.”
“…….”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내가 공무에 파묻혀 있는 동안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단 말인가?
이걸 왜 몰랐냐고?
내가 황제라지만 전지전능도 아니고, 또 최근에는 정말 일에 바빴다.
“아, 아니. 아멜리아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실 성품이 아니더군요. 제가 은밀히 알아본 결과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평소의 몸가짐을 유지하는 매우 참한…….”
“야.”
나는 반사적으로 정색했다.
“이 새끼가 진짜. 니가 뭔데 아멜리아에게 사람을 붙여서 감시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절차였습니다.”
“…….”
내가 계속 노려보자 오드벨이 부연했다.
“행여나 아멜리아 님을 누군가 해코지할 수도 있잖습니까?”
“뭐? 그런 정보가 들어왔어?”
“……만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폐하. 만에 하나요.”
나는 오드벨에게 눈을 부라리려다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아멜리아를 아낀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긴 하다.
감히 제국의 황제인 내 사람에게 누가 그러겠냐고?
정치에는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법이다.
“그래, 그래서 아멜리아가 황후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전에 제거해 버리자는 놈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
“알았다. 고맙다, 오드벨. 새겨두마.”
내가 상상도 못 한 이야기,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방책을 궁리하려는 데 오드벨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철도헌병대의 미레이 이관의 소문도 있습니다.”
“아, 걔는 왜 또. 말해 두는데 나 걔랑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 그리고 애당초…….”
왜 나비린이 듣는 데서 자꾸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한데 나비린은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이서 제칼의 풀장에서 즐겁게 노닐고 계셨던 걸 기억한답니다.”
“그거 그냥 잠깐 쉬는 거였어. 설사 그게 데이트였다고 해도 뭐? 나보고 책임지라고?”
“폐하.”
오드벨이 정색하고는 말했다.
“미레이 님과 아멜리아 님은 이후에 결혼을 못 하실 겁니다.”
“뭐?”
“위대하신 황제 폐하가 가까이하고 마음에 두셨던 여성에게 감히 누가 언감생심 그리하겠습니까? 불충도 그런 불충이 없으니까요.”
“뭔 말도 안 되는…….”
“폐하의 전(前) 약혼녀였던 알리시아 크로셀 후작 또한 독신으로 지낼 겁니다. 감히 누가 그녀에게 청혼하겠습니까?”
나는 기가 막혀서 반박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어이없지만 말이 된다!
제국은 황제 모욕죄가 존재하고, 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했단 이유로 살인도 벌어진다.
진실이야 어쨌건 아멜리아와 미레이, 알리시아는 내가 환생하고 가깝게 지내기는 했다.
서로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다?
이런 건 황제가 해명할 사안도 아니고, 설사 해명하더라도 대중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성은(聖恩)을 입은 여인이라는 소리나 듣겠지.
“아니, 뭐야? 그래서 나보고 손도 안 잡은 여자와 결혼하라고?”
“저는 그저 황후와 관련해서 돌아가는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결정은 폐하가 하실 일입니다.”
“…….”
세 사람이 나 말고는 결혼할 상대가 없을 거라니.
황당하지만 말이 돼서 더 문제다.
내가 골머리를 썩이는데 오드벨이 딱딱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더 문제가 되는 건 알리시아 님은 하프엘프고, 미레이 님은 엘프라는 사실입니다. 황후의 자리에 엘프가 너무 많아진다는 소리가 나오겠죠. 엘프 내부에서도 쓸데없는 분쟁이 일어날 공산이 크고 말입니다.”
그리 말한 오드벨은 나비린을 흘겨보았다.
나비린은 눈살을 찌푸리지만 반박하지는 않았고.
오드벨이 이런 민감한 이슈를 굳이 황후인 나비린 앞에서 한 이유, 알 것 같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그래, 오드벨. 그래서 연혼식을 치르면서 그 세 여자와 추가로 결혼해라, 뭐 그런 소리냐?”
“제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그게 효과적입니다만 폐하가 결정하실 일입니다.”
“…….”
결혼을 또, 더 한다고?
처음에는 황당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일에 파묻혀 있는 동안 대중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니.
오드벨이 말했다.
“그리고 8황후, 마령화비 유하 전하 말입니다만.”
“유하가 왜?”
“이번 연혼식에서 빠지고 싶다,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저에게 넌지시 비치셨습니다.”
“…….”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내 결혼 생활 중에서, 유하와의 결합은 정치성이 가장 강하다.
하시아가 사라진 자리를 메운다는 의미였으니까.
이제 하시아가 돌아왔고, 황후 중 마녀가 둘이라는 사실에 민심이 쏠린다면.
유하는 자기가 물러나서 공평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그거 아는 사람은 적지? 지금 유하는 어디에 있냐?”
“후궁에 하시아 전하가 가셨다고 합니다.”
“……아, 일 커지게 만드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시아가 가서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지.
“미안하다, 나비린, 차는 다음에 다시 마시자.”
“아니랍니다, 폐하. 사실 유하가 내심 불편해하던 걸 우리들도 알고 있었답니다.”
나비린은 작게 웃었다.
“자기는 입장이 다르다고, 한발 물러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걸 해결해 줄 사람이 폐하 말고는 없답니다. 유하를 잘 부탁드린답니다.”
“예쁜 척 코맹맹이 소리 좀 내지 마라, 들어 주기 힘들다.”
“……진짜 적당히 좀 하시죠, 재상님?”
오드벨이 눈살을 찌푸리고 나비린이 이를 갈면서 화를 낸다.
흔한 남매 다툼에 나는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다음은 오래 묵은 자매 다툼.
해결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