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6)
마지막까지 한결같이
너무 좋으면 일어나기도 싫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쾌청한 오후.
황성의 정령정원이었다.
6황후, 정령무희 나비린이 가꾸는 이 정원에는 계절에 맞지 않은 온갖 꽃들이 화사하게 피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벌레들도 득실거리지.”
“……폐하?”
“봄에는 송충이, 여름에는 매미, 가을에는 거미가 득실거리지. 꽃이 있는 곳에는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지.”
내가 나오는 대로 말하자 마주 앉아 있던 금발의 엘프가 난감해했다.
이 정원을 가꾼 나비린, 지금 모처럼 차를 마시는 중이다.
내가 눈가를 주무르면서 내려다보자 나비린이 애써 웃어 보였다.
“격무에 시달리느라 고단하신 모양이로군요. 저는 다 이해한답니다.”
“하하하.”
사실 그냥 혼자 쉬고 싶은데!
낮에는 공무, 먹는 것도 일하면서 먹는다.
물론 힘이 들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하나, 하나 찾아보고 이야기를 하면 피로가 풀어지고 에너지가 충전된다.
……황후들과 접촉 시간도 늘어났지만.
“으으음. 굳이 얼굴 보자면 저녁에 봐도 되지 않아? 꼭 지금 봐야 하나?”
내가 어색하게 말하자 나비린이 기품 있게 웃어 보였다.
“저와 함께하는 자리가 그리 불편하신가요? 좀 상처받는답니다.”
“나도 불편하니 너만 빠지면 딱 좋겠군.”
그리고 나비린의 옆에 앉은 엘프 남자가 뚱하니 말했다.
제국재상 오드벨이었다.
나비린의 오빠기도 하다.
“……오라버니? 부른 적도 없는데 왜 찾아오셨지요?”
“내가 폐하와 이야기하려는데 네가 끼어든 거다. 얼른 집에 가라.”
“황성이 제 집이랍니다?”
“정령수가 네 집이겠지. 얼른 가라. 가서 한 500년은 얼굴 보이지 마라. 아, 리세라는 폐하가 아끼시니 놔 두고 가고. 아니, 그냥 내친김에 이혼하지?”
오드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악담을 퍼부었다.
나비린도 기막혀서 받아쳤다.
“120년 만에 서로 얼굴 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그거랍니까?”
“괜찮다, 이혼하거나 별거한 이후에도 잠자리를 가지는 일은 나름 흔하니까. 네 구제 불능의 욕정도 가끔은 치료될 수 있겠지.”
“……자꾸 말이 도를 넘네?”
나비린도 눈살을 확 찌푸렸다.
정작 오드벨은 코웃음이나 쳤지만.
“폐하께서 다른 황후를 예뻐한다고 불러서 공박하려던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좋은 말을 할까? 황제 폐하께서 여자 수백 명쯤 품어도 그러려니 받아들여야지, 어디서 바가지를 긁으려고 들지?”
“아직 아무 말도…….”
“요즘 황후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마녀왕 하시아가 돌아오고 비어 있던 1황후 자리가 채워졌으며, 또 3황후 암살여왕이 유달리 총애받는다는 소문이 궁중에 떠도는 것쯤이야 꿰고 있다.”
오드벨은 따발총처럼 나비린을 몰아붙였다.
“보나마나 마음이 달아서 차나 한잔하자면서 신경 긁으려고 하는 거겠지. 그딴 잡짓거리, 폐하의 신하로서 절대 용납 못 한다! 이번 기회에 이혼해라!”
“……적당히 하죠? 재상님?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못 하는 소리가 없네요?”
“너만 없었다면 나도 훨씬 더 편하게 일했고 제국은 더 발전했을 거다! 이 암적인 존재야!”
“뭔 헛소리야! 정부의 다른 관료들도 오빠에게는 학을 떼거든?”
둘이 서로 눈을 부라리고 공박을 하자…….
보는 내가 웃음이 터져 버렸다.
오빠는 제국의 재상이고, 여동생은 황후인데 주고받는 대화는 으르렁거리는 보통 남매다.
내가 웃자 오드벨이 표정을 고치더니 나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기뻐하시니 다행입니다, 폐하. 이 촌스럽고 미련한 농촌 아낙도 폐하에게 아주 가끔은 보탬이 되는군요.”
“아까부터 자꾸 나를 깎아내리는데…… 엘프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도 몰라요?”
“그게 바로 문제인 거다.”
오드벨은 정색했다.
“동족인 엘프이자 재상이자 사적으로는 네 오빠인 내가 너를 평하는 데도 두려워하고 눈치를 살펴야 하나? 그게 바로 지금 제국의 문제란 말이다!”
오드벨은 여동생인 나비린에게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제국은 다종족 국가, 폐하께서 하해와 같은 관용으로 모두를 보듬어 주신다고는 하나 그 성총을 믿고 방자하게 굴고 있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도려낼 것은 도려내야지! 네가 미련한 거야 세상 모두가 다 아는 데 내가 두려워서 입을 봉해야 하느냐!”
“자꾸 무시하는데 나는 황후거든? 상호 존중이라는 말도 몰라?”
“황후가 아니라 엘프의 황후겠지! 그 의식이 바로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단 말이다! 폐하께서 돌아오시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고 하시는데 다시금 종족을 입에 올리는 그 고루한 사고방식!”
“야, 보는 나는 재미있지만 좀 진정해라.”
너무 과해진다 싶자 내가 끼어들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나비린의 심기가 상할까 염려도 되고.
“오드벨, 네가 뭘 말하는지는 알겠다만 그건 너무 빠른 이야기다. 제국이 세워진 지 겨우 100년이고, 내가 다시 돌아온 것도 이제 막이다. 벌써부터 앞질러 나가면 다른 애들이 못 따라온다.”
“예, 폐하.”
“그리고 서로의 종족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도 안 되지만, 하루아침에 터놓고 지내라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건 천천히 풀어 나가야 할 숙제 같은 거다. 엉킨 실타래를 무작정 풀려다가는 더 꼬일 뿐이야.”
나는 타이르고는 나비린을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나비린. 오드벨과 이제 좀 교류하고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불렀는데 괜한 소리만 듣게 되었구나.”
“아닙니다, 폐하. 이렇게 마음 써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린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나비린은 오드벨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말씀드리건대 모든 엘프들이 오빠 같지는 않답니다? 오해 마셨으면 합니다.”
“충성이 부족함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오드벨은 외려 당당하게 말했다.
자기가 아니라 다른 엘프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말을 보탰다.
“오드벨, 네 충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너처럼 못 해.”
오드벨은 재상으로 일하면서, 황후가 된 여동생 나비린과 사적인 교류를 딱 끊어 버렸다.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두른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단 이유로.
개결하지만 좀 극단적이다.
“제 몸가짐을 그르쳐서 저를 중용해 주신 폐하에게 행여나 심려를 끼쳐 드릴까 봐 염려한 것 뿐입니다. 재상이라는 중책을 맡았으니 더욱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좀 그만하고 사이 좀 좋게 지내. 너도 어차피 이제 재상 관둬야 하잖아.”
관료들의 정년 은퇴, 오드벨도 포함이니 이제 이놈도 재상에서 머지않아 물러난다.
지금 후임을 물색 중이고.
오드벨은 앉은 자세를 고치더니 테이블 위에 서류 더미를 올렸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폐하. 재상으로서 마지막 정책을 상주하고 싶습니다.”
“허락도 안 받고 내밀고 보네. 후임 찾으라고 시간 주니까 뭘 또 꾸미고 있었어?”
나는 반사적으로 오드벨을 노려보았다.
이놈은 멀쩡하게 생기고 머리도 좋지만, 나한테 충성하겠답시고 황당한 짓을 저지르는 놈이다.
주로 나를 엿 먹이고.
오드벨이 묵묵히 보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나중에 볼 테니까 정리해서 올려놔.”
“지금 보셔야 합니다.”
“…….”
뭐지.
더 불안해지는데?
보통 이런 상주는 공적인 자리에서 하는 게 보통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한다면 독대가 보통이고.
하필 황후인 나비린이 보는 앞에서 굳이 이런다고?
내 시선에 나비린 역시 의아한 얼굴이었다.
즉, 오드벨의 독단이다.
오드벨이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가 요즘 정책을 추진하시는데 국고가 부족해서 난감해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수입니다!”
“음, 진짜냐?”
이러면 결국 넘어갈 수밖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서류를 끌어당겼다.
팔락.
바로 튀어나오는 첫 문장.
황제 폐하의 연속 결혼식.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장이네? 뱀 새끼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욕한 거야! 미친놈아!”
나는 서류를 집어 던져서 오드벨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빡!
염동력까지 동원한 타격음이 찰지다.
나는 되돌아온 서류를 손에 말아 쥐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 뱀 새끼는 이제 은퇴해서 편하게 살라니까 끝까지 내 발목을 깨무네? 나 그렇게 죽는 꼴 보고 싶어? 아니, 내가 널 죽여 버려야 속이 편하겠다!”
“폐하! 신이 죽더라도 꼭 결혼 하셔야 하옵니다!”
“오냐! 일단 죽이고 보마!”
빡!
나는 오드벨을 한 대 더 때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속 결혼, 보통 사람은 생전 접할 길이 없는 단어에 순간 기겁했지만.
오드벨이 좀 또라이지만 지혜롭고 충성스럽기는 하다.
나는 혀를 차고는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황후들하고 다시 결혼식을 올리라고? 나는 이미 시릭 카라카스라고 공언했고, 법적으로도 조치가 끝났을 텐데?”
“연임식도 하셨으니 연혼식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남 일이라고 자꾸…….”
말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중반부부터는 경제 효과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가 황제로서 연임한다는 의식, 연임식과 비교해서 기대되는 경제 효과.
굉장히 매력적인 숫자다.
“……연혼식을 치르면 각 종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바칠 거다? 축의금 명목으로?”
“폐하가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많은 혼란과 다툼, 갈등이 있었습니다. 폐하의 연임식으로 제국의 민심은 안정되었습니다만. 이어서 각 종족 내부의 불안감을 달랠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와 황후들의 결혼에는 정략성이 있었으니까.
“뭔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애당초 환생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게 초유의 상황이다.
하지만 연임식은 분명히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면 나와 황후들의 재결합, 연혼식도 그에 준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지다.
나는 내심 수긍하면서도 말해 보았다.
“나와 황후들은 이제 예전처럼 지내는데?”
“폐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공식적으로 보여 주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 이는 정사(政事)입니다.”
“연임식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세간의 시선이 있습니다.”
오드벨의 지적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에두르고 있지만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다.
“그래, 내가 황후들을 멀리했던 게 사실이지. 거기다가 하시아가 돌아왔으니 정리도 해야 하고.”
“…….”
그래서 황제의 급사가 황후들의 음모라는 설도 돌았고.
많은 이들이 황후들을 불신하고 멀리하기도 했다.
내 부재에 제국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던 게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걸 완전히 수습하고 봉합하는 예식이라. 하지만 이거 전례가 없을 텐데?”
보통 결혼식만 치르지.
재결합한다고 잔치는 안 하잖아?
오드벨은 힘주어서 말했다.
“폐하가 일단 수락하시면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각 종족들로서는 폐하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황이기도 합니다.”
“…….”
말인즉슨 옳다.
오드벨다운 황당한 발상이었지만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시종일관 나를 괴롭히는 자금 문제가 해결된다는 게 매력적이고.
내심 혹한 나는 다시 기획안을 검토하면서 헤아렸다.
“그래, 이거 하면 애들도 좋아하겠지. 황후들도 보다 마음 놓을 테고. 백성들도 황실이 안정되었다 생각할 테고. 하나도 나쁠 게 없긴 한데…….”
이놈이 왜 하필 이 자리에서 말했지?
그냥 나한테 찾아와서 긴밀하게 전달했으면 술술 풀렸을 텐데.
내가 의아해하는데 오드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폐하에게 다시 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드물지. 뭔데, 또?”
반쯤 넘어간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운 놈이지만 나와 제국에게 필요한 일을 딱 짚어서 가져오는 솜씨가 참…….
“기존의 황후 분들 말고 새로운 황후 분들을 배필로 맞이하십시오!!”
지는 미혼인 놈이 유부남에게 왜 또 결혼을 하라고 해.
참…… 한결같은 뱀 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