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5)
이제야 옛날처럼
밤.
3후궁전.
시종들을 앞세운 나는 이셀렌의 침실을 찾았다.
“황제 폐하, 편한 밤 되소서.”
탁.
시종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문이 닫혔다.
어두컴컴한 침실에서 램프가 은은한 빛을 뿌린다.
이셀렌은 창가에 서 있었다.
요염한 라인을 은근히 드러내는 하얀 네글리제.
“…….”
나는 바로 다가가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밤의 정적 속에 아름다운 미녀를 하염없이 보고 있자니.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대로 밤새 내내 지켜만 보고 있어도 좋으리라.
“시릭.”
그때 창문을 짚고 있던 이셀렌의 나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끌어안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간 나는 멈칫했다.
창가에 비친 이셀렌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생각했던 거야?”
“안 물어보는 게 나을 텐데…….”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이셀렌은 제국의 정보를 다루는 여왕이다.
정보를 다루려면 상황 판단력이 좋아야 하고, 그 진위 여부를 판별한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아까야 우리 둘 다 서로 부끄러워하는 어색한 분위기라서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셀렌도 내가 정치적 계산을 깔고 이런다는 걸 눈치채고 남지.
100년의 시간을 넘어서 돌아온 황제가 드디어 공개적으로 황후의 후궁을 찾기 시작했다.
그 첫 발걸음이 1황후 하시아, 2황후 랑에이도 아니라 이셀렌이라는 것.
그게 정치적으로 어떤 구구절절한 해석이 달라붙을지.
이셀렌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이런 건 모른 척해야 사랑받는 여자겠지.”
파고들어 봐야 답이 없고 끝이 없을 화제.
부부 간에는 피하는 게 낫다.
밤의 정원이 비치는 유리창을 짚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싫어. 바보인 척 눈 감고 입 다무는 게 낫다는 건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표현이 여전히 극단적이네.”
나는 뒤에서 이셀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셀렌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무리할 필요 없어, 장단이 필요하면 맞춰 줄 테니까.”
“…….”
“나는 당신의 동반자가 되고 싶은 거지 부담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당신이 억지로 어울려 줘야 하는 아내가 되느니 충실한 조력자로 살겠어.”
이셀렌은 차디차게 말했다.
“랑에이나 하시아는 이걸 못 해. 아니, 나 말고는 아무도 못 해. 그렇지?”
“그건 그렇지.”
내 아내들의 성격은 가지각색이지만.
여차하면 철두철미하게 굴 수 있는 건 이셀렌이었다.
다크엘프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게 편하고 즐거울까?
전혀 아니다.
순간의 선택이 종족의 앞날을 좌우한다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
내가 제국의 황제로서 업무에 시달린다면, 이셀렌도 여왕으로서 책무에 짓눌려 살았다.
이셀렌은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행복을 줬어.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내 모든 걸 바쳐서…… 꺄아악?! 시, 시릭?!”
“듣고 있어. 계속 말해.”
“지, 지금…….”
“왜? 가슴 만지고 있는데?”
“…….”
침묵.
창가에 비친 이셀렌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음, 100년 만에 만져도 좋다. 좋은 건 변하지 않지.”
“……시, 시릭.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아니. 잠깐.”
“왜? 관두고 다른 여자 가슴 만지러 갈까?”
내가 말하면서 팔을 풀자 이셀렌은 급하게 내 팔을 붙들었다.
“아, 아니. 싫, 싫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지루한 연설을 할 거라면 젖가슴이라도 서비스로 제공해 줘야지. 이 집 서비스가 풍만하네.”
“…….”
“왜? 계속 말해.”
내가 이셀렌의 어깨에 턱을 얹고는 말하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말하지 말란 거야?”
“구태의연한 소리 계속하고 싶어? 내가 쇼윈도 부부 놀음할 놈으로 보이냐?”
나는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사이가 틀어진 다음에 아예 황후들의 얼굴도 안 볼 정도로.
“100년 전에, 너희들과 화기애애한 척하는 게 내가 정치하기 편했거든? 근데 내가 그랬냐? 그냥 어렵게 정치하고 말았지.”
“…….”
“하기 싫어? 나 가서 딸치고 잔다?”
꽈아악.
이셀렌이 내 손등을 꼬집었다.
“……절대 안 돼.”
“왜? 내 아내 하기 싫다며? 충실한 조력자로 사시겠다니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지.”
“……내 마음 알면서 심술부리지 마.”
이셀렌은 얼굴을 풀고는 애원했다.
그녀가 괜한 각오로 이런 소리를 한 게 아니라고.
나는 혀를 차고는 이셀렌의 턱 끝을 어루만졌다.
움찔.
간지러운지 이셀렌은 손끝을 피하려다가 멈췄다.
내가 손을 떼 버릴까 두려워서.
나는 이셀렌의 턱에서 목덜미로 이어지는 선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너는 나한테 심술부려도 되고? 내가 이렇게 찾아왔는데 왜 비장한 결의나 비추고 있는데?”
“……나는 세 번째잖아.”
이셀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원칙적으로 황후들의 숫자는 나와 혼인을 맺은 순서에 불과하고, 황후들은 서로 평등한 관계다.
차등을 두면 종족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 실제로는 1황후 하시아가 가장 윗사람이었다.
제국이 세워진 다음에는 2황후 랑에이였다.
그리고 이셀렌은 3황후.
“숫자가 신경 쓰였어?”
나는 이셀렌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입김이 닿는 뾰족한 귀 끝이 떨린다.
내 손이 스칠 때마다 뺨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지고.
하지만 이셀렌은 떨면서도 소리 죽여 속삭였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
“당신의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지만 다른 여자들은 할 수 없는 걸 해 주고 싶어.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다크엘프의 여왕으로서.
내 정치적인 맹우가 되어 주겠다고.
사실 이건 이셀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황후들은 각 종족의 대표 격이기는 하나, 자기 종족을 정말 꽉 휘어잡고 좌우하는 건 이셀렌 뿐이니까.
나는 웃으면서 속삭였다.
“오늘 다른 여자들은 할 수 없는 기술을 보여 주겠다고? 대체 뭘까?”
“……시릭.”
“이해해 줘서 고맙다, 알아줘서 기쁘고.”
나는 장난을 관두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내가 시댁 재산을 총동원해서라도 도와주겠다는데 어떤 남편이 기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럴수록 남편은 허세 부리고 싶어지는 법이고…….
“알아, 그러니까 널 찾아온 거야.”
“뭐?”
“환생한 내가 어떤 황후의 거처를 가장 먼저 찾아가느냐, 그게 지금 정치적인 관심사지.”
내가 황후들을 냉대하던 걸 관두었다?
그러면 어디부터 실타래가 풀릴까.
아주 미묘한 눈치 보기였다.
황후들 본인들도 신경을 썼고.
나와 하시아가 서로 어울리기는 했으나 그건 비공식(?)이었고.
“너도 그래서 렌시엘의 후궁까지 따라왔던 거잖아. 예전이라면 그렇게 무리 안 했을 텐데.”
“……그래서만은 아니었어.”
이셀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정치적인 고려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내 대답도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 나가려면 네가 제격이야. 어떤 식이건 결국 이런저런 뒷말이 나올 테니까.”
당장 천족 쪽에서 말도 안 되는 억측이 나올 것이다.
이셀렌이 모종의 계략을 펼쳐서 렌시엘을 찾았던 나를 빼돌렸다고.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실제로 몇 번이고 그랬다.
황제는 잠자리 횟수조차도 정치적 화두가 될 수 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이기는 하나.
이셀렌이 은밀하게 손을 쓴다면 더 빠르고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쪽.
나는 이셀렌의 귀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내 이런 생각을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너지.”
“…….”
다크엘프의 여왕으로서 개인감정과 통치 행위를 분별하거나 혹은 아우르기도 했으니까.
내가 이러는 게 정치적인 고려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 사이가 그것만이 전부라고 오해하지 않을 거라고.
잠깐의 침묵.
이셀렌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당신은 당해 낼 수가 없어. 단단히 대비해도 다 풀어 버리네.”
“원래 내가 벗기는 걸 좋아해.”
“……또 농담이나 하네, 말하면서 계속 만지고 있고.”
“사람 마음은 가슴 속에 있다는 게 사실인지 탐구 중이다.”
“…….”
“갈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진짜인가 보네?”
이셀렌은 내 양손을 잡고는 내리더니 돌아섰다.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은발의 다크엘프.
살짝 발돋움하면서 입술을 겹친다.
“……응, 당신이 만져 주니 기분 좋아.”
속삭이는 다크엘프의 입맞춤.
이셀렌은 양팔을 내 목에 감고는 매달리듯이 안겨 들었다.
“만지는 나만 기분 좋고 말 생각이었는데.”
“심술부리지 말고…… 계속해 줘.”
이셀렌은 내 손목을 잡고 유도하면서 애원했다.
완전히 녹아버린 목소리.
나는 마주 안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아내들을 대할 때 내가 주도하면서도, 각자 입장과 성격을 고려했다.
이셀렌은 황후들 중에서 자기 종족에 대한 지배력이 가장 강한 여자, 그러면서도 나와 함께 하기를 택한 이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런 이셀렌이 왜 둘째 아이를 생각하지도 않았을까?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을 유지하려면 그게 나을 텐데.
나에게 괜한 부담감을 주기 싫으니까.
또 그걸 핑계로 나를 침실로 불러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
내내 정치적으로 살아왔기에, 나와의 관계만큼은 순수하게 대하고 싶은 것이다.
암살여왕이 감정을 드러내고, 웃고 울음을 터트리는 건 나하고 단둘이 있을 때 뿐이니까.
이제야 우리 둘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
나는 안겨서 입술을 요구하는 이셀렌을 달래듯이 어루만졌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을 시작으로 목덜미와 어깨를 어루만질 때마다 몸이 움찔거리면서 반응한다.
서로 달아오르는 숨결.
어느새 나는 떠밀리면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음…….”
내가 반사적으로 입술을 떼고 틈을 두려는데, 이셀렌은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결국 나는 뒤로 떠밀려서 침대에 넘어지게 되었다.
쓱.
이셀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위에 올라탔다.
촉촉하게 젖어 든 보라색 눈동자.
“……시릭.”
“전 리젠인데요?”
아, 분위기 깨는 짓이지만 해 버렸다!
그래도 갑자기 이셀렌이 돌변한 게 심상치가 않아!
하지만 이셀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자기 입가로 가져왔다.
쓰으윽.
꽃의 향기를 맡아보듯이, 내 손가락 마디에 살짝살짝 스치는 입술.
이셀렌은 아주 조심스럽게, 귀한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내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차마 입술을 댈 수 없어서 망설이는 것처럼.
“……아, 그래. 시릭 맞아요.”
“…….”
끄덕.
이셀렌은 말없이 고갯짓만 하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원하면서도 망설이는 눈빛.
두려움이 섞인 표정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음, 그래.”
“돼?”
암살여왕이라 불리는 여자가 여기까지 와서 멈칫하고 새삼스럽게 눈치를 보는 이유.
100년 전, 내가 정색하고 밀어낸 일을 아직 잊지 못해서다.
오래 사는 다크엘프에게는 어제라고 해도 좋은 일.
이셀렌의 은밀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기대감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라그리즈.”
“응.”
이셀렌은 더는 못 참겠는지 상반신을 숙여서 입을 맞췄다.
왼손으로는 내 얼굴을 만지면서, 오른손으로는 내 옷을 벗긴다.
“……가만히 쉬고 있어도 돼.”
“…….”
무슨 의미인지는 곧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