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4)
자청하는 방어전
이셀렌은 한참 침묵하다가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없는 애네.”
“그래, 나도 황당하다. 되게 깡 좋은 애인데?”
하긴 그러니까 오르카와 좋아하는 사이가 됐겠지.
이셀렌이 나하고 있을 때는 풀어지고, 부드러운 여자로만 보이지만 그녀는 카라카스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여자라는 평이 따라 다닌다.
그런 이셀렌을 시어머니로 모시려면 정말 보통 깡으로는 안 되지.
“그래서, 죽이지 말라고?”
“말해도 못 하잖아? 아들에게 뭔 원망을 받으려고.”
“…….”
이셀렌도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자기 아들인 오르카를 무척 아끼고 있었다.
평소에 늘 엄하게 대하고 있지만 그녀 나름의 교육 방침이고.
나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했다.
“오히려 루이사가 다치거나 죽는 일이 없게, 네가 최선을 다해서 보호해 줘야 할걸? 행여나 불상사라도 일어나면 오르카에게 괜한 오해나 살 테니까.”
“……시릭.”
이셀렌이 원망스럽게 부르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왜 자꾸 불러, 내 사랑.”
“……얼버무리려고 하지 마.”
“얼굴 빨개지는 걸 보니 내 사랑 맞네?”
내가 능글맞게 굴자 이셀렌은 진짜로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화난 눈초리를 감추지 못하다가 이마를 짚는다.
“……진짜 황당해. 앞으로 저거랑 계속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해?”
“오르카 생각해서 져 줘야지. 며늘아기야, 국이 너무 짜지만 그냥 내가 참고 마시마?”
“…….”
이셀렌은 진짜로 약이 올라서, 지금 당장이라도 루이사를 요절내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원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곱게 보기 어려운 법이지.
그런데 다크엘프의 여왕인 그녀의 명을 어기고, 자기 아들을 아니꼽게 꾄 여우 같은 여자라니.
“……당신은 저게 마음에 들어? 아주 만족스러운 눈치네?”
이셀렌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결국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들에게 가서 따질 수도 없고, 며느리를 조질 수도 없으면 남편에게 하소연해야지.
“원래 깡다구 좋은 애는 마음에 들어. 그리고 너 모시고 살려면 진짜 여간한 깡으로는 안 되지.”
“…….”
“그리고 오르카 생각도 좀 해. 애가 지금 얼마나 멘탈이 깨지겠어. 자기 여친이 자기 엄마 무서워서 입대하겠다니. 뭐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다 있냐?”
내가 느닷없이 찌르자 이셀렌은 화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흐려진 표정.
그녀의 악명(惡名) 때문에 아들의 혼삿길이 막히다니.
이 냉혹 무비한 암살여왕도 그건 상상도 안 해 봤으리라.
“루이사는 오르카에게 상담도 않고 멋대로 하려던 거고, 당연히 오르카도 엄청 마음 상했겠지? 한동안 삐걱거릴 테니 그냥 좀 놔 두고 모른 척 눈감아 줘. 애들이 서로 좋아한다는 데 굳이 반대해야겠어?”
“……오르카에게는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배우자 후보가 있었어.”
“자기 아들은 좀 더 참하고, 집안 좋은 여자와 맺어져야 한다고? 부모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이셀렌은 간절함과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자기편을 들어 달라고.
달래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말 나온 김에 제대로 정리는 해 둬야겠다.
“둘이 좋다면 그냥 하게 놔 둬야지. 애가 좀 깡이 지나친 부분이 있긴 한데 그건 천천히 교정하면 되고. 그리고 라그리즈.”
“응?”
“오르카에게 차대를 물려주려는 건 관둬라.”
내 말에 이셀렌이 눈을 크게 떴다.
멍한 얼굴.
상상도 못 한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 도살장에 끌려온 강아지가 주인님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나는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아, 이상한 오해하지 마. 내가 설마 오르카가 부족하거나 미워서 그러겠어?”
“그, 그럼? 대체 왜?”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은 계속 유지해야 하잖아.”
다크엘프의 왕권, 그건 여성 혈통으로만 이어진다.
이셀렌은 이전까지는 그 정보 통신을 포기하면서, 오르카에게 자리를 물려줄 각오였다.
물론 그런 날이 닥치면…… 제국에 어마어마한 혼란이 일어나겠지.
제국군이나 각종 정부 단체에서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이 쓰이고 있으니까.
이셀렌은 당황해서는 말까지 더듬었다.
“아, 아니. 오르카가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 아직 한참 미래의 일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날은 와. 그리고 이건 다크엘프의 적통에만 계승되어서 다른 후보도 없는데…….”
“아, 방법 있잖아. 알면서 뭘 그래.”
겸연쩍어진 내가 앞만 보면서 말해도 이셀렌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간절하게 바라보자 나는 마지못해서 말했다.
“……아, 거. 우리 둘이 딸 하나 더 낳으면 되지.”
“…….”
아내들과 다시 더불어 살기로 하면서, 이걸 언젠가 이셀렌에게 말해야 한다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와 이셀렌이 딸을 하나 더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오르카의 어깨의 짐도 덜어지고, 제국에 찾아올 혼란도 방지할 수 있었다.
“…….”
출산은 계획적으로!
……하시아가 스승은 스승이야.
긴 침묵이 이어지자 나는 견디지 못하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
이셀렌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 으. 으. 시릭. 그건…….”
“……그렇게 당황하면 나도 좀 부끄럽다. 며느리 죽이네 살리네 하던 암살여왕 씨.”
나도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아, 왜 이러지.
사실 이미 서로 다 아는 사이고, 애도 하나 있는데.
애 하나 더 낳자는 소리를 하는 게 왜 이렇게 만감이 교차하지.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 달콤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은은한 기류가 우리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
나만의 착각이 아니다.
이셀렌도 부끄러워하면서, 어깨를 움츠리고는 나를 흘끗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 어려울 것 같은데. 오르카도 어렵게 봤잖아.”
“……그럼 이전보다 시행 횟수를 늘리면 되지.”
“…….”
이셀렌은 목까지 붉어져서는 흘끔흘끔 나를 살폈다.
더 뜨뜻해지는 실내 공기.
꼼지락거리는 손.
이셀렌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그, 그럼 기다릴게…….”
“으음. 그래.”
할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셀렌과 아주 어색하게 헤어진 나는 겨우 집무실로 돌아와서 한숨을 돌렸다.
끼익.
쉴 새도 없이 벨이 들어왔다.
미리 기다리던 눈치.
나는 이마를 누르면서 말했다.
“그래, 직접 보니 좀 어때? 사랑이 뭔지 좀 알겠어?”
“여전히 모르겠지만…… 오간 이야기 중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뭐 대부분 감정은 합리적이지 못하고, 애정은 더 그렇지.”
나는 깍지를 끼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벨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래, 맞다. 이셀렌을 어르고 달랜 건 양동 작전이었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내가 말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좀 들어 줘라.”
물론 둘러대는 소리다.
본래라면 말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 하지만 벨은 텔레파시 능력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마저도 읽어 버린다.
초능력자인 나는 덜 읽히는 편이지만.
그러니 아버지인 나로서는 벨에게 숨길 게 없다고, 너와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게 꺼릴 게 없다는 스탠스를 취해야 했다.
다소 민망하고 어두운 화제라고 해도.
“정치적으로 봤을 때 나와 이셀렌 사이에 자식이 하나 더 태어나야 해. 그것도 딸아이로. 하지만 그걸 어떤 상황에서, 어떤 국면으로 전달하는 게 가장 문제였지. 그 여파도 생각해야 하고.”
“…….”
“총애는 갈등을 부른다. 내가 이셀렌의 침실을 자주 찾으면 다른 황후들도 신경 쓰고 내심 마음이 상하겠지. 예전이라면 몰라도 우리들은 한 번 갈라졌던 사이, 아직은 서로 낯설어하고 있으니까.”
나는 자식에게 하기 민망한 이야기마저도 숨김없이 말했다.
어차피 벨에게는 읽히는 걸 각오해야 한다.
그러면 차라리 밝혀서 딸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그러니 며느리 문제로 심기가 상한 이셀렌을 달래 주고, 새로우면서도 매력적인 미래를 제시해 주는 한편, 그걸 다른 황후들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든 거다. 내가 이셀렌의 침실에 자주 가는 건, 오르카 문제로 상심한 그녀를 달래 주기 위해서라고.”
“…….”
“루이사는 친위대가 될 테고 오르카와 보다 가깝게 지내겠지. 황후들과 다른 많은 이목이 납득할 만한 이유다.”
나는 가볍게 정리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예측이고, 실제로는 반발이나 뒷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다른 황후들에게도 더 신경을 써야겠지? 편애라는 소리가 나오면 안 좋으니까.”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벨은 낯설어하면서 말했다.
벨은 사랑을 모르는 거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다.
지금 이게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화두라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폐하가 뭘 어쩌시건 다른 황후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할 거예요. 제 어머니를 포함해서요. 원래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욱, 이걸 잘 아시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벨이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번거롭게 빙 돌아가세요? 오르카 오빠와 이셀렌 어머니는 어차피 폐하의 말을 받들 텐데. 왜 굳이…….”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와 이셀렌 사이에 태어날 아이가 자기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태어났다고 오해하는 걸 막으려고.”
나는 담백하게 말했다.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이 이어지려면, 제국을 위해서라면 나와 이셀렌 사이에 딸이 하나 더 나와야 한다.
물론 황실의 후사 생산은 중요한 일이고.
황제인 나는 제국 정치의 핵심이기에, 정치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내 가족들에게도 결국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그런 뉘앙스를 배제하고 싶었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가, 자기가 정보 통신을 승계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는 부모가 서로 사랑해서 태어나는 게 가장 좋으니까.
“그래서 아들 문제로 속이 끓는 이셀렌을 내가 계속 달래 주다가 마음이 깊어져서 아이가 생겼다고 하고 싶었다.”
“……치장하려고 하신 거네요.”
“그래, 그 말이 맞다.”
벨은 내 생각을 읽어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가볍게 수긍했다.
“황제인 나는 모든 언행이 정치적인 행보가 되지만, 내 가족들은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물론 이건 이상론이고…… 너를 포함해서 내 자식들도 결국 정치적으로 얽매일 수밖에 없다.”
메이호가 자기 꿈을 향해서 무작정 달려 나갈 수 없는 것처럼.
황실의 일원에게 정치는 떼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가족 관계에 정치는 가급적 분간하고 싶다. 내가 너희를 끌어안고, 어깨를 두드리고 서로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데 일일이 정치성을 부여하고 싶지 않구나. 난 그러려고 황제 한 게 아니다. 아니,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황제를 하는 거지.”
“…….”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쓸데없는 행동을 어째서 하냐고? 그건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아빠는 온갖 모략을 부리고 머리를 데굴데굴 굴릴 수 있단다. 아빠는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해요. 알겠니?”
“……복잡하네요.”
벨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막내딸 웃는 얼굴은 처음 봤다.
내가 기쁨에 젖어 있는데 벨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우리들을 정말 많이 생각해 주시는 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종종 폐하의 옆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딸이 나 보고 싶다는데 환영이지.
“감사합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벨은 공손하게 예를 바치고 물러났다.
홀로 남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웃음을 보니 온갖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다.
“음, 그러면 오늘은 적당히 일하고…….”
나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돌아보았다.
다음 장관 후보들이 올린 정부 개혁안, 혹은 기획 제안서였다.
똘똘한 인재를 뽑으려면 전부 다 봐야 한다.
“…….”
사실 계속 일하고 싶지만.
이제부터는…… 이셀렌을 총애해야 한다.
“…….”
아, 부끄러워. 어색해.
아까의 그 어색한 분위기가 또 재현되는 건가?
아니, 차라리 그러면 낫지.
이셀렌은 정보를 다루는 만큼 영민해서…….
나는 생각을 뿌리치고는 서류를 집었다.
일에 몰두하면 다 해결되리라는 막연한 믿음에.
그리고 밤이 왔다.
오고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