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213화 (21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3)

황제이자 아버지로서

루이사와 이셀렌의 시선 교환.

이셀렌은 싸늘하게 웃었다.

“루이사 과장, 제법 재기 발랄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자리가 우습나? 나는 차치하고라도 제국의 황제 폐하가 함께하시는 자리이다. 네 알량한 혓바닥으로 이 자리를 모면하려고 하면 그 혀와 목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음, 그래서 말인데요.”

루이사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게 내밀어 보였다.

내가 반사적으로 받으려고 하자 이셀렌이 정색했다.

“황제 폐하!”

어찌 이 요망한 년의 장단에 맞춰 주려고 하시는 겁니까?

평소에 격의 없고, 허물없이 구신다고 하더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아니죠.

그리고 내가 이렇게 화났는데 꼭 그렇게 초를 쳐야 해? 내 편을 들어 줘야지!

이셀렌은 이 많은 감정을 단 한마디로 녹여 내고 있었다.

나도 그걸 알았지만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음, 아니. 이거 그거라서.”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입대 원서잖아.”

“…….”

이셀렌은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저 종이의 특수 코팅, 제국군의 인장은 입대 원서가 확실하다.

“제국군의 총수인 내가 직접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거든. 준다니 받아야지.”

다들 기막혀하는데-심지어 벨도 이건 몰랐는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나는 루이사가 바치는 입대 원서를 받았다.

나는 좌우를 둘러보며 가볍게 말했다.

“다크엘프에서 과장했으면 제국군 입대할 충분한 자격이 되겠지? 물론 테스트를 거치긴 하겠지만 어지간하면 합격할 테고.”

“지금 무슨…….”

기막혀하던 이셀렌은 정색하고는 루이사를 노려보았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

다크엘프들은 전체 주의자들, 전체를 위한 전체로서 살아간다.

이 행동 강령에서 무단이탈하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몇몇 특수한 경우만 예외다.

가령, 상대에게 자기 성을 알려 주고 그 사람에게 영혼을 바치기로 한 경우, 다크엘프 상부에서 판별하고 생사를 정한다.

하인켈이 이 경우였고.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제국의 공직에 종사하는 다크엘프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왜? 안 그러면 다크엘프는 쓸 수 없으니까.”

“예.”

정부 관리, 경찰과 군인이 나라가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면?

나라가 유지가 안 되지.

이셀렌은 다크엘프의 여왕이라고는 하나, 제국에서는 황후 중 하나다.

나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인류가 제국으로 통합되는 이상, 다크엘프들도 그 정부에 자기 종족을 밀어 넣어서 발언권을 확보해야지. 하지만 여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다크엘프를 믿고 중용할 수 없다. 그러니 제국의 공직에 진출하는 다크엘프들은 성을 밝힌 다크엘프들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다.”

“…….”

이건 나와 이셀렌이 오래전에 협의한 것이다.

나는 입대 원서를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제국군에 입대 원서를 낸 너를 이셀렌이 감히 해칠 수는 없다. 그건 나로서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니까.”

“…….”

으드득.

이셀렌은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분해하고 있었다.

그 말대로, 제국군에도 많은 다크엘프들이 종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셀렌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당연히 필요한 조치였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다크엘프들이 공직에 진출하려면, 이셀렌의 측근인 3대장의 재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거 재가 안 받았지?”

“말씀대로입니다.”

“…….”

직소.

오르카가 마음에 품은 여자, 루이사는 제국군 총수인 나와 만나는 자리에서 직접 입대 원서를 내려고 작정한 것이다.

다크엘프 내부 규율을 몇 개나 어겼는지 모르겠네.

“…….”

이셀렌은 진짜 놀라운 정신력으로 참고 있었다.

보통 조직이라는 게 보고에도 절차가 있는데, 루이사는 그걸 깡그리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셀렌은 이젠 여왕으로서의 체면도 구겨지고, 종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수치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걸 내가 보는 앞에서 폭로당했다는 것까지.

이셀렌이 이리 화내는 건 나도 처음 본다.

“…….”

반면 오르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루이사가 너무 막 나가는 일을 했으니까.

나는 입대 원서를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머리 좋네? 나하고 이셀렌은 싸움을 붙이려고 하고 있네. 갈라 치기를 하고 있어.”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거짓말하면 이거 찢고 너도 던져 버린다?”

내가 웃으면서 입대 원서를 들어 보였다.

“이셀렌보다 내가 만만해 보이냐? 내가 사람 좋단 소리 많이 듣지만 이간질을 웃으면서 참아 주진 않거든?”

“…….”

“사적인 자리를 가지려고 했는데 공적인 자리로 만들어 줬잖아? 그래서 나도 공적으로 응대하는 거다.”

며느리 후보라면 좋은 소리만 하겠지만, 수작질을 부리면 이야기가 다르지.

또 이건 이셀렌을 달래는 말이기도 했다.

황제인 내가 화내면 이셀렌도 일단 참을 수밖에 없다.

일사부재리니까.

루이사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제국군은 오는 자를 막지 않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너무 병력이 부족해서 면책, 면죄까지 남발하면서 구성해야 했으니까. 도피처로 제국군을 선택한 이들도 많지.”

그리고 제국군은 밖에서 사고 치고 온 놈이라고 해도 동료로 받아 주었다.

같이 칠죄신과 싸워 주기만 하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었으니까.

“원칙적으로 말하면 원서를 내고 그걸 입영 처에서 수락해야지 너도 제국군이 되거든? 지금 이 경우에는 내가 허락해야 하고. 내가 이거 반려하면…….”

“전 오래 못 살겠죠.”

이셀렌의 심기를 이리도 화끈하게 긁었으니까.

거기다가 황제인 내 비위도 꽤 건드렸고.

다 떼어 놓고…… 지금 오르카 마음이 얼마나 박살 났을지 상상이 안 간다.

루이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 처음 뵙는 자리에서 당돌하고 무례하게 군 죄, 원하신다면 목숨이라도 바쳐서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요? 제가 곱게 보이시진 않겠지만 상황이 좋아지진 않을 텐데요.”

“입대로 퉁 칠 거라면 서로 얼굴 보기 전에, 처리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입영 처로 제가 찾아가면 다크엘프 군인들에게 반려당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짐작하신 대로 절차를 좀 어겼지만 이게 가장 확실했습니다.”

상견례 자리를 파투 낸 것도 모자라서 입대하겠다는 며느리라니.

온갖 사건을 겪은 나도 이건 처음이네.

루이사는 오르카를 흘끗 눈짓하고는 말했다.

“제가 죽으면 다크엘프 내부에서 골이 생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장담 못 하겠습니다. 가장 좋은 건 평화롭게 판이 깨지는 거죠.”

“그래, 결혼 안 하고 입대한다니 판이 제대로 깨졌지.”

“…….”

이셀렌은 겨우 평소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한마디도 안 하는 게 속으로 이를 박박 갈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 아가씨가 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황제인 내가 으름장을 놓아도 긴장은 하되 결국 말은 한다.

대담하고 뚝심이 있잖는가?

나는 가볍게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이 널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는데? 얼굴 보자마자 바로 판을 깨려고 하네.”

“오르카 님의 옆자리는 제게 너무 과합니다. 청컨대 입대로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

따지고 보면 이치에 맞다.

이셀렌은 겁도 없이 기어오른 부하를 축출했다는 모양새, 루이사가 제국군이라서 살려 준다는 명분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문제 되는 건…… 오르카의 마음이지.

정작 오르카는 굳은 얼굴로 한마디 말도 안 하고 있었다.

나는 아들을 넌지시 보며 이야기를 건넸다.

“오르카, 너는 할 말 없냐?”

“저는 이미 말씀 다 드렸습니다.”

“이셀렌은?”

“……폐하의 처분에 맡길 따름입니다.”

내가 루이사의 입대를 허락하면, 이셀렌은 그냥 눈 감아야 한다.

사감을 떠나서, 루이사에게 더 지분거리는 건 제국군에 대한 영역 간섭이고 황제인 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니까.

며느리 상견례 자리를 단숨에 정치 논리가 지배하네.

나는 혀를 찼다.

“음, 머리도 좋은 아가씨가 좀 너무 과하네.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 이셀렌이 가차 없는 여자라고 하더라도, 자기 아들과 오간 게 있는 여자를 대뜸 해치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서로 얼굴이나 보고 이야기나 나누자고 이렇게 부른 거고.”

“저로서는 감히…….”

“나도 지금 시아버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황제로서 말하는 거다. 네가 여기에 정치 논리를 가져왔으면 나도 같은 식으로 받아칠 수밖에.”

나는 턱을 괴고는 자리의 면면을 한 번씩 살폈다.

이셀렌은 감정을 억누르는 중, 오르카도 입을 다물고 침묵 중이다.

벨은 뭔가 알아차린 눈치고.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오르카가 다크엘프의 차대를 잇는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되어서 이러나? 그래서 떠나겠다고?”

“…….”

오르카는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 능력을 계승하지 못 한다.

이건 오르카 본인도 모르는 사실, 다른 다크엘프들도 모르리라.

하지만 전통은 힘을 발휘한다.

대대로 여성이 계승해온 다크엘프의 지도자 자리, 그걸 남자인 오르카가 차지한다?

내부에서 많은 반발이 있을 것이다.

나는 루이사를 바라보면서 옆의 이셀렌에게 물었다.

“이셀렌, 내 짐작이 맞냐?”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맞단 소리네. 그리고 루이사 아가씨는 지금 그걸 감당할 수 없어서 떠나려는 거고. 그렇지?”

이대로라면 오르카에게는 앞으로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겠지.

황제이자 아버지인 나도 쉽게 거들어 주지 못할, 다크엘프의 내부 문제.

그러면 힘이 되는 건 배우자, 결혼일 것이다.

“내가 제국을 세우는데 결혼을 거듭해서 각 종족의 지지를 받아 냈던 것처럼. 오르카에게도 그런 수순이 필요하고 루이사 아가씨는 그럴 깜냥이 아니다, 이거네. 맞아?”

“…….”

이셀렌, 오르카, 루이사 셋 다 어색하게 침묵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모처럼 기대하고 온 상견례 자리를 정치판으로 만들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맞아, 아니야?”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정리되네.

나는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오르카.”

“예, 아버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라, 나머지는 조용히 하고.”

침묵.

나는 오르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의 복잡한 생각은 밀어 버리고 솔직하게 털어놔.”

“……그냥 어이가 없네요.”

내가 거듭 말하자 오르카는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하지만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다.

루이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원망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

루이사는 그 눈길을 받다가 외면해 버렸고.

루이사의 제국군 입대, 오르카와 사전에 논의한 게 아니었다.

부모와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은 셈이니 어찌 가슴이 찢어지지 않으랴.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와요. 아버지, 나중에…… 술이나 마시죠.”

오르카는 많은 걸 참는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인 이셀렌을 탓할 수도 없었고, 연인인 루이사를 무작정 원망할 수도 없었다.

오르카 본인도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갔는지, 대충 다 이해해 버렸으니까.

그냥 다 놔 버리고 체념해 버릴 수밖에.

“알았다. 그럼 판결하마.”

나는 받았던 입대 원서를 루이사를 향해서 밀었다.

“입대는 거절한다.”

“……예?”

“시릭.”

루이사가 깜짝 놀라고, 이셀렌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이 경우에는 내가 루이사의 입대를 무조건 받아 줘야 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제국군의 이념도 있지만.

내가 안 받아 주면 이셀렌은 루이사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크엘프의 내부 규율을 무시하고 멋대로 한 행동, 중벌을 면하기는 힘들다.

“…….”

그리고 이셀렌도 루이사를 진짜로 죽일 마음까지는 없었다.

아무리 열 받아도 자기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무작정 없앨 순 없잖는가? 아들에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이셀렌이 더 말하려고 하자 나는 눈짓을 해서 막았다.

“어차피 제국군 꼭 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 입대는 됐고. 황실 친위대에 요즘 자리 비었으니 거기 지원해라.”

“……친위대요?”

“로열가드, 황족을 보호하는 엘리트 병사들이지. 공직이다. 꽤 빡세니까 열심히 해야 할 거다.”

“…….”

공직에 진출한 다크엘프는 자유, 이셀렌도 루이사를 처벌할 권한은 사라진다.

꼭 제국군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

루이사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왜…….”

“입대하면 서로 얼굴 못 볼 일이 많아질 테니까. 하지만 친위대는 자주 볼 수 있지.”

오르카도 황족이니까.

사실상 한 직장에서 일하는 셈이다.

이전보다 서로 접점이 많아지리라.

루이사는 표정을 풀고 오르카를 흘끔거리려다 움찔했다.

“…….”

이셀렌이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이셀렌의 심기를 설명했다.

“제국군에 입대하면 영원히 안 봐도 되지만 친위대면 이셀렌하고도 자주 보겠네?”

“…….”

이 맹랑한 년을 두고두고 봐야 한다고? 당장 대가리 깨고 싶은데?

이셀렌의 얼굴에 떠오른 말, 루이사 안색이 창백해졌다.

분노한 암살여왕의 근방에서 계속 기웃거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니까.

짝!

그 순간 내가 이셀렌의 허벅지를 때렸다.

루이사를 노려보던 이셀렌은 화들짝 놀라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만해, 좀. 애 잡겠다. 상견례 자리에서 계속 그럴 거야?”

“아, 아니…….”

이걸 어떻게 참으라고?

이셀렌은 그리 호소했지만 나는 윙크를 날리면서 말했다.

“애가 좀 어려서 세상 물정 모를 수도 있지. 좀 너그러워져라.”

“…….”

“저기 봐, 막내도 겁먹었다.”

벨이 움찔했다.

사람 마음을 읽는 벨은 이런 살기, 분노에 더욱 민감한 모양이다.

이셀렌도 정말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나중에 며느리 머리끄덩이 잡겠네.

“자, 그럼 이렇게 정리하기로 하고. 모처럼 봤으니까 밥이나 먹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지? 밥은 다음에 먹기로 하고, 오르카는 친위대 지원자에게 황성 좀 안내시켜 줘라.”

“예?”

“얼른.”

오르카도 루이사에게 할 말 많겠지.

자기 멋대로 받은 이별 통보, 갑자기 벌어진 일.

심경이 복잡하고 각오를 했는데 설마 내가 이렇게 결론을 낼 줄이야.

“…….”

나는 시선으로 의미를 전했다.

이제부터는 너 하기 나름이라고.

“……고맙습니다, 아버지.”

알아듣고 내게 예를 표한 오르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따라와라, 루이사 과장.”

“……예, 실례하겠습니다.”

루이사는 나를 향해서 면목이 없단 얼굴로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나는 벨을 향해서 말했다.

“벨, 잠깐…….”

“예, 저도 좀 쉴게요.”

벨도 우리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떠나갔다.

정적.

나는 차분하게 앞에 놓인 잔을 들고는 목을 축였다.

도수 낮은 알콜이 목으로 퍼져 나간다.

정리를 마친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이제 말해, 라그리즈.”

며느리가 괄시한다고 아내가 서러워하면 남편이 받아 줘야지.

황제라도 이건 못 피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