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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12화 (212/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2)

이런 상견례가 어딨냐

벨의 문제는 일단 바라메에게 맡겨 두고.

당장 이셀렌과 오르카의 문제가 코앞에 닥쳤다.

오르카가 자기가 마음에 둔 여자를 황성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연인을 가족에게 소개하는 상견례.

이셀렌의 시퍼런 칼날(?) 앞에서 며느리 후보를 살려 내는 게 오늘 내가 할 일이다.

남성(南城).

귀빈을 맞이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곳.

나는 의상실에서 시종에게 몸단장을 맡기고 있었다.

원래 대충 입고 다니지만 오늘은 오르카의 아버지로서 참석하는 자리지.

격식을 차려야지.

시종이 머리 빗겨 주는 가운데 올해 농사 현황 보고를 살펴보는데…… 갑자기 전언이 들어왔다.

“폐하, 막내 황녀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 벨이? 들어오라고 해.”

나는 얼른 서류를 밀어 버리고는 말했다.

바라메에게 부탁한 게 효력을 발휘했나?

들어온 벨은 정중하게 예를 올려 보였다.

“존엄하게 재림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으음, 일어나라. 그리고 너무 격식 차리지 말고.”

나는 내 어깨 장식을 달던 시종을 밀어 내고는 고갯짓했다.

딸아이는 긴한 이야기로 찾아왔으리라.

시종들이 썰물처럼 물러가자 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름이 없었는데도 청할 것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으음.”

막내가 딱딱하게 구네.

공식 석상에서야 가족들도 격의를 갖추지만, 서로만 있는 자리에서는 다소 풀어진다.

자식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게 싫어서 어린 시절부터 많이 신경을 썼는데…….

“벨. 저기.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폐하를 대하는 게 낯섭니다. 그러니 괜한 말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벨은 딱 부러지게 말하고는 나를 똑바로 보았다.

“물론 폐하의 영혼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절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그저, 100년 전의 폐하에 대한 기억이 희끄무레한지라 아버지라는 존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 불찰이니 윤허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으으음.”

내가 신음을 흘리면서 말을 고르는데 벨이 불쑥 말했다.

“말씀드리는데 폐하의 마음을 제대로 읽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도 못 믿지?”

나는 무심코 말했다.

벨이 순간 동요하는데 나는 잔잔하게 일렀다.

“네가 초능력자라는 사실은 이미 들었다. 그리고 초능력자가 말로 결백을 증명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말해주고 싶구나.”

초능력, 정신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초능력의 사용 여부를 상대에게 입증하는 건 무척 어렵다.

나는 손바닥을 보란 듯이 펼쳐 보였다.

“가령, 나는 투시력을 평소에는 안 쓰지만 상대가 그걸 어떻게 믿어 줄까? 틈만 나면 사람 알몸을 훔쳐보고 다니는 변태라고 의심하는 녀석도 있겠지.”

“…….”

벨은 살짝 수긍하는 눈빛을 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그런 소리 하면 나는 당당하게 반박할 거다. 내가 원하면 어떤 녀석이건 바로 알몸 만들고 브레이크 댄스까지 추게 할 수 있는데 왜 귀찮게 초능력을 써? 몰래 훔쳐보느니 그냥 대놓고 벗기고 만다.”

“…….”

“왜? 기가 막히니? 하지만 쉽게 논파할 수 없을 텐데?”

“……황제 폐하라서 하실 수 있는 주장이로군요.”

벨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나는 좀 안도했다.

예상대로 벨은 전혀 소통이 안 되는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

마녀답게, 감정 하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옆에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주전자를 염동력을 이용해서 끌어왔다.

벨의 손에 찻잔을 쥐여 주고 찻주전자로 차를 따른다.

일련의 과정에 벨은 꽤 감탄한 기색이었다.

“염동력을 능란하게 쓰시는군요.”

“너도 할 줄 알잖니? 잘 안 되니?”

“예, 저는 움직이는 건 서투릅니다. 이렇게…….”

벨이 찻주전자를 노려본다 싶은 순간.

꾸지지직.

주전자가 구겨져 버렸다.

“힘을 증감할 줄 모르는 건가? 아니, 음. 이건 하시아에게 좀 물어봐야 하나?”

“싫습니다. 비밀로 해 주세요.”

벨은 바로 정색했다.

자기가 초능력을 통제할 수 없단 걸 감추고 싶은 거지.

“알았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텔레파시가 제어가 안 된다고?”

“…….”

끄덕.

벨은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아버지로 여기는 의식은 희미하지만, 같은 초능력자로서 도움을 청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로서는 바로 도와줄 수 없었다.

나도 텔레파시를 쓰지만 남의 마음은 읽을 줄 모른다.

하시아도 마찬가지고.

“다른 능력들은 그래도 조절이 되지? 텔레파시만 안 되니?”

“최대한 출력을 낮추고 있는데도 안 됩니다. 엘프들이 청력을 줄인다고 해서 귀머거리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벨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였다.

“사람이 말하거나, 생각에 잠길 때 이 부근에서 뭔가 흘러나오면서 제 안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

초능력을 강화하는 방법 중 하나는, 상대의 정신력을 흡수하는 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신 오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이런저런 안전 장치를 걸어두는 게 보통이었다.

헌데 내 딸아이, 벨은 그게 안 돼서 무작정 받아들이고 있단 거다.

상황을 파악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음, 혹시 갈수록 능력이 강해지고?”

“예, 최대한 신경 안 쓰려고 하는데…… 속삭이는 소리들이 커집니다. 귀를 자르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더군요.”

“…….”

내 얼굴을 살피던 벨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지금도 내 생각을 읽었고?”

“죄송합니다. 그래도 폐하는 많이 읽을 수 없습니다. 아니, 능력을 제대로 쓰면 더 읽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하면 거의…….”

“그러면 표층 심리만 읽는다는 거네. 나는 정신 오염에는 어느 정도 내성이 있으니까.”

나는 턱을 괴고는 말했다.

“지금 말하다 만 건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이지? 초능력자가 자기 능력을 안 쓴다고 남에게 믿게 하는 거 어렵다는 거.”

“…….”

“그렇게 놀란 얼굴 하지 마라. 난 텔레파시로 남의 마음 못 읽는다. 그냥 너 생각하는 게 그럴 것 같아서 짚어 본 거야.”

정신을 다루는 초능력자들은 원래 눈치가 좋다.

하시아도 눈치는 좋은 편이다. 반응이 이상해서 문제지.

“일단 알았다. 앞으로 해결 방법을 마련하마. 가령 예를 들어서…… 정말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네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게 너무 싫어서 혼자서 평생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조치해 주겠다.”

“……어떻게요?”

“너 살고 싶은 곳에 집 지어 주고, 거길 네 영지로 만들어 주면 되지? 먹을 것 및 생필품은 멀리서 놔 두고 가고. 또 기타 원하는 게 있으면 카탈로그로 만들어서 보낼 테니 원하는 거 있으면 골라.”

벨은 멍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씩 웃었다.

“아빠가 황제다. 되는대로 말하는 아저씨 같지만 황제야. 하고 싶으면 뭔 일을 못 해?”

보통 집에서야 아이가 이렇게 되면 굉장히 골치가 아프겠지?

하지만 나는 작정하면 벨이 홀로, 평생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이러려고 황제 하지.

벨이 머뭇거리자 나는 빠르게 말했다.

“물론 이건 아주 극단적인 선택지다. 네가 그걸 정 원할 때 이야기고, 나도 어지간하면 우리 사랑스러운 막내딸을 매일 보고 지내고 싶다. 그래도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봤을 때, 정 안 되면 이래 줄 수도 있으니까 좀 안심하란 거다. 알겠냐?”

“……예.”

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해졌던 뺨에 서서히 혈기가 돌기 시작한다.

안도하는 반응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이제 서로 방법을 찾아봐야지? 너도 앞으로 생각해 보고. 그리고 나로서는…… 하시아에게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고 싶은데?”

“그건 좀…….”

“음, 하시아가 가볍고 엉뚱해 보여도 이쪽으로는 철두철미하다. 나에게 초능력을 전수해 줄 때도 세심했고. 물론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불안해지겠다만.”

벨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 바로 결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하시아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으리라.

결국 벨을 위해서는 마지막 아이, 다른 차원에 있는 그 아이를 여기로 데려와야 한다.

독심의 경지에 이른 초능력자가 서로 머리를 맞대면 방법이 나오겠지.

내가 머리를 정리하는데 벨이 말했다.

“그래서 폐하, 지금 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뭐든 말하렴.”

그게 뭐가 됐건 딸이 원하면 들어줘야지.

하지만 벨이 말하는 건 정말 예상외였다.

“오늘, 오르카 오빠의 여자 친구 검증 자리에 저도 참석하고 싶어요.”

“생각처럼 화기애애한 자리가 아닐 텐데?”

“장난으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지해요.”

벨은 이유를 설명했다.

“바라메 황후 전하에게 이미 들으셨죠? 저는 아직 사랑을 몰라요. 거기다가 남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읽고 있고요. 그래서 사람 상대할 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얽히면 머리가 매우 복잡하게 꼬여 버려요.”

“그래서 오르카 하는 걸 보고 어깨너머로 배우고 싶다고?”

“예, 그걸 청 드리려고 찾아온 거예요.”

벨이 진지하게 말하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좀 놀라운 제안이었지만 어차피 가족끼리 보는 자리다.

이셀렌이 독을 품은 만큼, 이레귤러 하나 넣어 두는 게 좋겠지.

“최대한 입 다물고 조용하게 있을게요. 그래도 안 될까요?”

“당연히 되지.”

내가 반사적으로 말하자 벨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래. 같이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가볍게 말했다.

뭐 이게 어려운 일이라고.

남성의 회의실.

직각 식탁에는 이셀렌과 그 아들인 오르카가 마주 앉아 있었다.

딱딱한 분위기다.

“폐하, 오셨습니까.”

이셀렌은 불편한 얼굴이면서도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했다.

벨을 살피는 시선, 의아해하면서도 입을 다문다.

내가 데려왔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오셨어요?”

반면 오르카는 멍한 얼굴이었다.

자포자기에 해탈해 버린 표정.

나는 얼른 손을 저었다.

“오르카, 말해 두는데 내가 어머니에게 고자질한 거 아니다. 그게…….”

“그래, 나에게도 비밀로 했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이셀렌.

……사실을 말하는데 굉장히 삐져 있다?

이셀렌은 차디차게 오르카를 노려보았다.

“오르카 부장, 내가 설마 계속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안이하군. 이는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 텐데?”

“야, 무슨 소리를…….”

“지금 다크엘프들의 서열 정리 중이야, 황명이라면 마땅히 따르겠지만.”

이셀렌이 정색하고는 일렀다.

애를 너무 잡는다 싶지만…… 어머니가 자식 교육하겠다는데 무작정 뜯어말리는 것도 좀 그렇지?

내가 지켜보자 이셀렌은 오르카에게 계속 쏘아붙였다.

“우리가 사적으로는 혈연관계지만 공적으로는 여왕과 신하다. 더욱이 너는 차대를 이을 몸, 이런 검증 자리를 마련하기 전에 알아서 조치했어야지. 내가 무작정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차차대를 논할 거라면 당연히 치러야 할 형식이 있는데 그걸 보고도 없이 몰래 숨어서 하다니,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간주할 수도 있다.”

“…….”

“황제 폐하의 어진 말씀이 있었기에 해명 자리를 마련한 것이지, 본래라면 더 엄히 다스렸을 거다. 알겠나?”

부모 자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차디찬 대화.

입맛이 썼지만…… 동시에 이셀렌이 왜 딱딱하게 구는지 이해했다.

이셀렌이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절대 군림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나는 정말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내가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제국법 위에서 군림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셀렌은 대대로 이어진 여왕, 절대 권력자로 보이지만 선대의 규범과 예법에 따르고 있었다.

“…….”

이셀렌은 오르카에게 자기 뒤를 잇게 할 생각이지만, 그건 다크엘프 내부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대대로 여왕으로 이어지던 자리에 남자가 오르다니?

예법에 어긋난다고 온갖 말들이 있을 텐데 더욱이 오르카는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 능력을 계승하지 못 한다.

오르카는 여러모로 약점이 많은 후계자다.

그러니 이셀렌이 이리 엄하게 구는 거다.

최고위 권력자인 그녀가 엄히 굴수록, 다른 다크엘프들이 오르카를 공박할 수 없게 되니까.

일사부재리의 수법, 이셀렌은 오르카를 공적으로 엄히 대하여서 자기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

나는 권력을 다루는 황제라서 단숨에 이해했고…… 오르카도 어느 정도는 알아차린 눈치였다.

이셀렌도 그걸 알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오늘 이 자리를 주관하셨으니 마무리를 짓기로 하고. 한데…….”

“안 왔어?”

오르카가 마음에 뒀다는 여자, 루이사가 도착하지 않았다.

물론 아직 약속 시간이 남아 있긴 한데.

“…….”

이셀렌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황제인 나를 감히 기다리게 한다고?

가뜩이나 곱게 안 보일 며느릿감이 시작부터 지각이라니, 빡칠 만하다.

나는 되도록 가벼운 투로 말했다.

“어디 길이 막히나 보지. 아마 근처까지 왔을 텐데. 사람 불러서 알아보는…….”

달칵.

그때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푸른 머리카락의 다크엘프 여성,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야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큼성큼.

거침없이 테이블로 다가온 여자는 오르카의 옆에 서서는 우리를 향해서 머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다크엘프 북부지부 3과장을 맡은 루이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제 폐하.”

척 봐도 밝고 따사로운 미소.

몸에서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여자였다.

순간 살벌하던 실내 분위기가 확 밝아진 착각이 들 정도로.

“…….”

그러거나 말거나 이셀렌은 루이사를 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지만 필요해서 억지로 채용한 신입 사원이 오후 출근한 걸 본 사장님 같네.

지금 당장 눈에서 빔이라도 쏠 것 같아.

이셀렌은 찬바람이 풀풀 흘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사 과장, 자질구레한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그렇게 할까요? 예, 결혼 안 하겠습니다.”

“…….”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고…… 그리고 무서워졌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이셀렌의 숨소리가 딱 멈췄으니까.

호흡마저도 멈춘 암살여왕이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자기 아들을 퇴짜 놓았다고.

……내 아내지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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