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1)
아빠도 힘낸다
사이코패스.
흔히 이 단어를 들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를 연상하지만 그건 대중 매체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건 아주 드문 일이 아니다.
억대 연봉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가 판자촌에서 사는 이들의 삶을 헤아릴 수 있나?
정신을 다루는 초능력자로서 말하건대, 보통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 어둡다.
바라메가 말했다.
“마녀 자매를 아내로 맞았으니 그대는 마녀의 감정적 결여에 대하여 잘 알지?”
“마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감정이 하나 빠져 있지만 살다가 각성할 수 있지.”
하시아는 슬픔을 모르고, 유하는 공포를 몰랐다.
두 사람 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그 감정이 뭔지 체득하게 되었고.
내가 시선으로 묻자 바라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벨 역시도 감정이 하나 없다. 벨이 모르는 감정은 바로…… 음, 잠깐만. 사실 이건 유하도 모른다.”
“친어머니인 유하도 모른다고?”
“벨은 아주 영리한 아이거든. 또 마녀들은 혈연관계 사이에도 이 감정 결여에 대해서는 비밀주의인 경우가 잦아서 특이한 일도 아니라고 하더군. 전부 벨이 이 몸에게 협력을 요청하면서 설명했다.”
“알았어, 벨에게는 모른 척할게. 그래서?”
내가 전생에 죽은 이후에 오간 말일 것이다.
막내딸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이야기일 거고.
바라메가 한숨을 흘렸다.
“벨이 모르는 감정은 바로 사랑이다.”
“하필 그거라고?”
옛날에 하시아에게 듣기로는 마녀들 중에서도 사랑을 모르는 이는 대단히 드물다고 들었다.
바라메가 설명했다.
“그대도 아나 보지만 대단히 희귀한 케이스로군. 더욱이 선천적인 초능력자는 카라카스 역사에서 처음이고.”
“…….”
사실 처음이 아니다.
나와 하시아의 아이, 지금 카라카스가 아닌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아이도 선천적인 초능력자다.
하지만 그건 우리 둘 다 초능력자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벨이 초능력자라는 건 완전히 예상외다.
“초능력이 부계로 유전되는 거였나? 다른 아이들은 그런 낌새가 없었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초능력자고 어머니가 마녀라면 나타나는 현상인가?”
“그대의 판단 속도는 여전히 놀랍군. 그래, 벨도 오래 고민하다가 그리 추론하더군. 본래 초능력은 대대로 마녀들에게만 전승된 비술, 시릭 카라카스는 매우 특별한 사례지.”
나는 전후 사정을 검토해 보고는 동의했다.
“……그래, 남자 초능력자가 마녀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은 사례가 없었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 기존 사례가 없지.”
“더 문제인 건…… 벨이 특화한 초능력이 텔레파시라는 거고 그것도 굉장히 강력하다는 거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에 다다를 수준으로.”
“……그거 삐뚤어지기 십상 아니냐?”
“찰스 자비에 수준의 초인이 아니라면 그렇지? 더욱이 벨은 능력의 조절이 안 돼. 항상 오픈된 상태라고 하더군.”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울음 한 번 터트리지 않았던 거군.
내가 마른침을 삼키는데 바라메가 나직하게 일렀다.
“자책할 거 없어. 이건 유하도 모르거든.”
“…….”
“유하만이 아니라 다른 황후들, 아이들도 모른다. 벨과 이 몸만이 알던 비밀이지. 이제 그대도 알게 되었고.”
“정말 용케 숨겼군…….”
나야 벨이 너무 어린 시절에 보고 끝이라지만, 어머니까지 모르게 하다니.
하기는 가능할 것이다.
벨이 독심술을 쓸 줄 알고 또 남다르게 영민하다면야.
그리고 벨은 스스로도 이레귤러라는 걸 알고, 자기 사정을 철저하게 비밀리에 감췄는데…….
“…….”
그런 이유?
속마음을 고스란히 읽히는 게 즐겁겠는가?
초능력자는 경계 대상이다.
내가 염동력을 이용해서 싸우는 건 사실 부차적이지.
투시하고, 마음에 말을 거는 초능력자는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괴물이라 오해받기 쉽다.
그런 반응에 상처받은 초능력자는 진짜 괴물이 되기 십상이고.
하시아가 나에게 초능력을 물려주면서 신신당부했다.
내가 쓰는 게 초능력이라는 걸 공표하지 않은 이유고.
“…….”
나는 텔레파시는 쓸 수 있지만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순 없다.
하지만 이걸 남에게 믿게 하기 어려운 법이지.
결국 벨은 친모인 유하도, 또 다른 가족들에게도 쉽게 마음을 터놓고 의논할 수 없었다.
“……벨이 굉장히 힘들었겠군.”
“그래, 남이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해결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벨은 겉과 속이 똑같은 라온과 함께 지내고 싶어 했다.”
바라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라온도 요즘 슬슬 달라졌지. 몰래 간식 먹고 아닌 척 거짓말도 하고.”
“……그래, 그런 거였군.”
그래서 벨은 라온과 함께 지내면서, 일종의 사회성을 익히려고 한 것이다.
그 옛날, 하시아가 슬픔을 배워 보겠다면서, 나와 함께 지내던 것처럼.
전후 사정이 파악된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애가 아파서 병원에 데려가니 불치병이라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지치나?”
바라메는 다가와서는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참…… 막막하네.”
“그대여, 이 몸이 하나를 일러 주지. 이것은 용의 진언(眞言), 명백한 진리이나 받아들이기는 그대 나름일세.”
1만 년을 살아온 용공주, 바라메는 아주 진지하게…….
“원래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네.”
“…….”
흔해 빠진 소리를 말했다.
허탈하고 어이없어서 째려보았지만 바라메는 내 이마를 누르면서 웃었다.
“그대는 스스로가 슈퍼맨이라고 종종 생각하곤 해. 신민들은 그대를 그리 우러러보고 아내와 자식들도 그리 착각하곤 하지. 하지만 그대는 외로움도 타고, 오해하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이일세.”
“…….”
“배신에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낙담하기도 하였지. 그리고 그대도 자식 앞에서는 그저 부모일세.”
바라메는 웃으면서 자기 가슴을 눌렀다.
“이 몸도 그저 부모에 불과한 것처럼.”
“……그럼 어떻게 하자고?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자고?”
“아이 스스로가 생각하고 행동할 때 부모는 한발 물러나는 거지. 다가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때로는 한발 물러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임을 그대도 잘 알 터.”
바라메가 하는 말 하나, 하나가 정곡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라고 해도, 결국 스스로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
때로는 넘어지고 울음을 터트린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얼른 일으켜 주고 싶어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으으음.”
하지만 괴롭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한다는 자체가 힘들지.
이제까지 이걸 몰라줬다는 자책, 그리고 앞으로도 눈감아야 한다는 미래에 정말 속이 까맣게 타 버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신음만 흘리자 바라메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 끙끙 앓을 필요는 없을 텐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간단하지. 그대와 하시아가 없던 시절, 벨은 세상 유일의 초능력자였네.”
“아, 그건 그러네.”
하시아가 죽었다고 알려지고, 전생의 내가 죽은 순간 세상의 초능력이 대가 끊긴 셈이었다.
그래서 랑에이가 나, 리젠 리브라타를 보고는 시릭 카라카스가 비밀리에 남긴 전인이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고.
바라메가 설명했다.
“유일한 초능력자인 벨은 고민하던 끝에 차원의 정보를 다룬다는 용공주인 나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한 것이지. 그런데 초능력자인 그대와 하시아가 이제 돌아왔으니…… 벨이 털어놓고 물어볼 수 있는 상대가 둘이나 생기지 않았나?”
“하시아에겐 일단 비밀이다.”
나는 정색하고는 일렀다.
“그 여자에게 맡기면 애 망가진다. 일단 내가 전담하고 알리는 것도 내가 판단한다.”
“극성맞은 아버지로군.”
“하시아가 내 눈앞에 있어도 이렇게 말할 거다.”
하시아는 센스가 좀 이상해서…… 애 이상하게 물들이기 딱이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초능력으로 고민하는 딸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상담 상대는 내가 해야 한다.
나는 바라메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바라메, 내가 없는 사이에 막내딸을 잘 돌봐 주었다. 감사한다. 그러니까…….”
“벨에게 상담 상대로 그대를 추천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이 자기 친모인 유하에게도 숨길 정도라면, 정말 철두철미하게 감춰 왔단 이야기다.
반대로 이런 제반 사정을 밝힌 바라메는 굉장히 신뢰하고 있으리라.
즉, 벨에게 바라메의 조언은 굉장히 잘 먹힌다.
나는 지금 그걸 청탁하는 중이고.
“되도록 빨리 부탁한다.”
해결 방법이 생각났다.
벨은 타인의 마음을 읽는 걸 어려워하고 세상에 자기 혼자 그런 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하시아와 나의 딸, 아직 다른 차원에 있는 아이 역시도 타인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초능력자였다.
그 아이를 여기로 데려오고, 벨과 이야기를 나누게 하면 일이 좀 풀릴 것이다.
한데 바라메는 의뭉스럽게 웃어 보였다.
“용에게 부탁하면서 하는 게 고작 말뿐인가? 마땅히 합당한 제물을 바쳐라.”
“아, 뭔데. 뭐가 필요한데?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1만 년을 살아온 이 몸이 이제서 재물과 권세를 탐할까?”
그건 그렇다.
바라메는 세속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먼 여자, 협상 조건으로 보통 요구를 할 리가 없었다.
바라메는 몸을 기울이는가 싶더니만…… 내 허벅지를 무릎으로 누르면서 올라탔다.
신비로운 미녀가 내 어깨를 누르면서 웃어 보인다.
“……어, 설마 산 제물을 바치라고?”
“걱정하지 마라, 다 뜯어먹어도 내일 아침이면 돋아나 있을 테니까.”
“잠깐만, 왜 이러세요. 원래 이런 분 아니셨잖아요. 왜 갑자기 육욕을 앞세우세요?”
“가끔은 고기 반찬도 먹고 싶어지는 법이지? 그리고 원래 용은 육식이다.”
바라메는 웃으면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바라메는 허무와 정열, 양쪽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용인데 지금은 후자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교섭을 걸었다.
“자식 이야기에 이런 교환 조건을 거는 건 좀 지나치지 않아?”
“그대를 믿고 오랜 비밀을 알려 주었고 자식에게 미움받을 각오까지 한 어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게 지나칠 텐데?”
“…….”
할 말이 없네.
내가 없던 사이, 벨을 잘 케어해 준 바라메가 굉장히 고맙긴 하니까.
……아니, 사실 바라메는 탑에서 혼자 놀고먹고 라온이 다한 것 같긴 한데.
아무튼.
내가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인데 바라메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 이 몸도 싫어하는 수컷을 억지로 탐하는 흥취는 없음이다.”
“……할게.”
“응? 뭐라고? 1만 년을 살아서 그런지 잘 안 들리는데?”
“…….”
바라메가 귓가에 손을 대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일단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는 여자, 나는 애써 말했다.
“……한다고, 한다니까. 약속이나 지켜.”
“뭐를 하겠다고? 100년 전 이야기라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 목을 양팔로 끌어안은 바라메가 농염하게 웃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바라메를 양팔로 안으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씻으러 가자고!”
세상 모든 유부남이여.
나에게 힘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