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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10화 (210/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10)

자고 싶어?

날이 밝았다.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아침이었다.

동침한 건 두 아내와 딸아이.

새삼 확인한 나는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를 깨우지 않았다.

대신 여러 가지로 아슬아슬했지.

“후우.”

한숨을 쉬는 내 왼편, 이셀렌이 엎드려서 잠들어 있었다.

아주 행복한 얼굴로.

그리고 내 오른편에는 렌시엘이 미리엘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하얀 날개를 펼쳐서는 내 몸을 덮어 준 상태다.

이건 천족들이 배우자나 자식에게만 해 주는 친애 행위였다.

하얀 날개를 이불 삼고 잠들면 다음 날에는 피로가 깔끔하게 풀린다.

“음.”

간밤의 일을 유추하고, 아슬아슬하던 순간을 반추하던 나는 멈칫했다.

내 팔의 팔찌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건 하시아가 내게 준 팔찌, 다른 차원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 딸아이를 찾으러 가기 위한 준비품이다.

초능력을 강화하는 것처럼, 정신력을 모은다고 했는데…… 색이 변했네?

아마 마력처럼 변하는 것 같은데.

“원리가 뭐지?”

나는 팔찌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리세라가 내 옷을 짜던 걸 알고, 행복에 젖어서는 색이 바뀌기는 했다.

그리고 간밤, 두 여자를 달래 주는 동안 색이 확 바뀌어 버렸다.

“대상 숫자가 늘어날수록 효과가 좋아지는 건가? 아니, 음…….”

타인의 정신력을 받아들이면서, 능력을 강화하는 초능력자가 이런 원리를 구구절절하게 생각하는 건 금물이다.

누가 나에게 더 마음을 열어 주었다, 누가 나를 더 생각해 주었다. 차등을 짓는 자체가 위험하다.

이걸 일일이 따지면, 사소한 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다가 심화에 빠진다.

초능력자가 파멸하는 대표적인 경우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애써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랑에이와 메이호의 문제도 갈무리했고 이제 오르카의 연애 문제랑…….

벨, 내 막내딸이 마음에 걸린다.

자식 중에서 나랑 가장 접점이 없는 아이인데, 모처럼 만났는데도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긴 나도 애가 정말 어린 시절에 죽었으니 서먹서먹할 만은 한데…….

꾸욱.

뺨이 꼬집히자 나는 멈칫했다.

자고 있던 이셀렌이 손을 불쑥 뻗어서는 나를 꼬집고 있었다.

은발의 다크엘프가 눈을 반쯤 뜨고는 웃어 보인다.

나도 실없이 웃어 보였다.

“안녕?”

“……꿈 아니네. 그래, 믿어 줄게.”

“그래, 만족하셨어? 남편의 생식 능력에 새삼 의심을 품다니.”

나는 간밤에 오갔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투덜거렸다.

물론 가벼운 농담이다.

하지만 이셀렌은 뺨을 붉히면서 말했다.

“……아직 못 믿겠는데?”

“…….”

하시아는 예언자인가?

출산은 계획적으로! 그 소리 하고 싶어졌거든.

“벗어서 5분간 보여 줄까?”

“……응.”

농담으로 넘기려고 하는데 진담으로 받네.

내가 어이없어서 보자 이셀렌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더 침대에 파묻어서 감춰 버린다.

그러면서도 흘끔거리는 시선, 나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순간을 무척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

옛날보다 더 사랑스러워졌다.

은발의 다크엘프, 암살 여왕이라고 불리면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는 냉혹한 여자인데.

나와 함께 침대에 있으면 달콤한 말을 던지고, 애정 가득한 눈으로 그윽하게 바라볼 뿐이다.

자기가 유혹하고는 내가 보면 부끄러워하고.

“아.”

나는 무심코 생각하다가 탄식했다.

갑자기 가슴에 올라오는 감정, 아내에 대한 애정에 가슴이 무척 뜨거워졌다.

나는 환생한 다음에도 아내에 대해서는 감정이 매우 복잡했다.

끔찍하게 배신당했다 여겨서 실망했고 그냥 얼굴 보기 싫었다.

오해를 풀고, 함께하기로 한 다음에도 바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

이건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오해로 인한 별거였다고 해도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중간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지금 막 그 중간 과정을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를 순수하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전처럼.

“……시릭?”

“으음.”

당혹한 나는 입가를 문지르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옆얼굴을 빤히 보던 이셀렌이 시선을 슬쩍 내렸다.

좀 놀란 기색.

“……하고 싶어졌어?”

부끄러운지 목소리는 낮아지는데, 더 달짝지근해진다.

그러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아무튼 옆에서 내 딸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피곤해서 그냥 더 자고 싶습니다.”

“……나랑 자고 싶어?”

“…….”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유혹하지 마라.

내가 모른 척하는데 이셀렌이 불쑥 내 배에 손을 올리고는 살살 문질렀다.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이셀렌이 온화하면서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

남자를 못 참게 만드는 시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 침대가 출렁거렸다.

“하으음.”

렌시엘이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셀렌은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 버렸다.

어제야 분위기에 취했다지만, 보통 자기가 풀어진 모습을 다른 황후들에게도 보여 주기 싫어하니까.

침대에 앉아서 눈을 반쯤 뜬 렌시엘은 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고개를 숙인다.

“폐하, 일어나세요. 아침입니다.”

쪽.

렌시엘은 부드럽게 내게 입을 맞추더니만 따사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많은 앙금이 풀린 것처럼 후련하게.

내가 올려다보자 렌시엘은 수줍게 웃었다.

“아이 참, 폐하. 또 어리광을 부리시는군요. 알겠습니다.”

“…….”

황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나는 한마디도 안 했다.

하지만 렌시엘은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옆머리를 살며시 넘기면서 다시 나를 향해서 고개를 기울이는데…….

퍽!

자는 척하던 이셀렌이 손바닥으로 렌시엘의 얼굴을 밀어 버렸다.

기습당한 렌시엘은 비틀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셀렌? 대뜸 아침부터 이 무슨 경박한 놀음이죠?”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침이고 애가 자는 옆에서?”

“아침 인사입니다. 이 정도는 아주 당연한데요?”

또 둘이 으르렁거리자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둘 사실 사이좋지 않았냐?”

전생의 내가 죽은 직후, 서로 종족의 비밀을 교환하고 의지할 정도로 황후들 사이에서는 각별한 관계 아니었나?

내 지적에 두 사람은 움찔하고는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랬나?”

“그 당시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따름입니다.”

“어제 누가 더 오래 키스했냐고 싸울 때는 사이좋아 보이던데?”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둘 다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어미에게 조르는 아기 새처럼 굴던 간밤의 일을 아침에 생각해 보면 좀 많이 부끄러워지는 법이지.

나는 상반신을 일으키면서 이야기를 돌렸다.

“자, 이제 슬슬 일어나고 아침 먹고 준비하자. 아, 그리고 이셀렌. 그거 준비되면 바로 말해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오르카의 연애 문제, 며느리 면접을 준비해 놔야지.

나는 그리 생각하면서 아직도 세상모르고 잠든 미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음, 진짜 일어나기 싫다.

애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일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하루 종일 애만 보고 싶다만.

“……으응.”

미리엘이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자 나는 얼른 손을 떼었다.

더 푹 자게 놔둬야지.

나는 흐뭇하게 딸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벨에 대해서 뭐 아냐?”

“응?”

“막내 말인가요?”

두 아내는 내 질문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말수가 적은 아이지, 딱 부러지고.”

“예의 바른 아이입니다만. 좀 차갑더군요.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아, 이건 흉보는 게 아닙니다. 폐하.”

“웃음이 없는 게 왜 흉이 되지? 냉철한 건 높은 평가를 줘야지.”

“…….”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어나자.”

정오의 집무실.

나는 다시 일 처리를 시작하고, 예산을 짰다.

한창 일하는 중에 큰 안건이 올라왔다.

4황후, 엔라의 재판이 곧 열린다는 이야기다.

“……으음.”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반쯤 처리한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제국해방군의 총수, 엔라는 대역죄인이다.

황제인 내가 친국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 제국의 비상시를 생각하면 엔라를 죽여서는 안 되고.

하지만 무작정 용서해 줄 수도 없는 일, 벌을 내리기는 해야지.

어떻게 모양새 좋게 끝낼까?

몇 가지 안은 만들어 놨지만.

“조만간 결정하기로 하고…….”

똑똑.

노크 소리.

기다리던 상대가 오자 나는 들어오라고 일렀다.

들어온 붉은 머리카락의 용족, 7황후 바라메가 의아하게 물었다.

“부르니 오긴 왔다만 무슨 일이지? 이 몸은 딱히 국정에 관여치 않는다만?”

“알긴 아네, 내가 찾아간 게 아니라 집무실로 부른 게 공적인 용건이라는 거.”

“……?”

“넌 보기보다 머리가 좋다는 거지. 아니, 오래 사는 용족은 지식이 깊어질 수밖에 없지. 오래 산다고 지혜롭고 현명해지는 건 아니지만 아는 건 많아지는 게 정상이지.”

바라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로군. 무슨 말을 하려고…….”

“내내 이상하던 게 좀 가닥이 잡혀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봐라.”

나는 그동안 흘려 넘겼던 질문을 던졌다.

“왜 라온과 벨을 붙어 다니게 했냐?”

바라메의 딸, 장녀 용족 라온.

유하의 딸, 막내 마녀 벨.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 두 아이는 내가 환생하고 온갖 일을 처리하는데 내내 보이지 않았지. 라온은 정신적으로 어려서, 또 벨은 막내라서 긴한 문제에서 떨어 놓으려는 줄 알았거든? 너희가 알아서 그렇게 잘 처리했구나 싶었는데…… 사실 그게 이상해.”

“뭐가 말이지?”

바라메가 의뭉을 떨었다.

나도 당시에야 온갖 일로 바빠서 그냥 넘기던 일이었지만.

“그저 두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었다면, 네가 허룡탑에서 돌봐 주면 되는 일이었어.”

“라온에게 세상 경험을 쌓게 할 마음도 있었다면?”

“태어난 지 200년도 안 된 용족 아이를 그냥 내보낸다고? 용족은 보통 손이 귀하고, 하물며 네 자식은 더 그렇지?”

“…….”

바라메는 용공주, 용족들 사이에서도 무척 특별한 혈통이었다.

바라메가 나와 함께하기로 결의한 덕에 용족들도 천년제국에 합류해서 칠죄신과 맞섰던 것이고.

“뭔가 마음에 걸려. 유하나 벨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너무 이른 것 같아서 너에게 물어보는 거다.”

“……하하.”

바라메는 웃음을 터트렸다.

허망하던 웃음소리가 이내 맑아진다.

한참 웃던 그녀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정말 탄복할 만하구나, 그대여. 나랏일을 처리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이의 일까지 그리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려고 하다니. 이 몸이 정말 반할 만한 사내로다.”

“그만 좀 반하고 말이나 해라. 대체 무슨 문제야?”

“전제가 틀렸다.”

바라메는 웃음을 그치고는 말했다.

“그대는 이 몸의 어린 딸, 라온을 돌보라고 벨을 붙였다고 생각했지? 반대다.”

“뭐?”

“강하면서도 약한 막내를 보살피라고 라온에게 부탁한 것이다.”

“…….”

똑 부러진 막내인 벨이 아직 어린 라온을 돌본 게 아니라 반대였다고?

내가 멈칫하는데 바라메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유하가 그리 부탁하였지. 그대도 알지 않느냐? 우리들의 막내는 태어날 때, 고고성(呱呱聲)도 터트리지 않았다는걸.”

“아, 그랬지. 그건 그런데…….”

보통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에 우는데.

벨은 똘망하게 우리를 볼 뿐이었다.

한 번도 울지 않는 아이.

나도 그게 신기해서 계속 신경 썼지만 벨이 무척 손이 안 가는 아이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벨은 네 아이고, 마녀다.”

내가 의아하게 보는데, 바라메가 불쑥 말했다.

“벨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잠깐.”

독심술?

그게 가능하다면…….

내 시선에 바라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들의 막내는 타고난 초능력자다. 그것도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마녀이면서도 무분별하게 타인의 마음을 읽어 버리는…….”

바라메가 한숨을 쉬었다.

“사이코패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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