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09)
자는 것도 일이다
황실의 후궁.
결혼을 7번, 아니 8번 하게 된 나는 황제로서 각각 부인들에게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옛날, 제국을 건국한 직후에는 낮에는 쉬지 않고 일하고 밤에는 황후들의 후궁을 찾았고.
이제 막 자란 자식도 보고, 또 아내와 사랑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이었지.
더구나 오늘은 딸아이를 재우는 시간, 어찌 기쁘지 않을까?
침실 옆방에서 나를 맞이한 렌시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 이셀렌, 무슨 일이죠?”
“시릭하고 하던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이게 예의가 아닌 건 알 텐데요?”
“너야말로…….”
두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자 나는 미리엘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같이 걸어오는 내내 미리엘은 졸린 얼굴이었다.
애를 침대에 눕힌 나는 옆에 누워서는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외출복을 벗기니 바로 잠옷이다.
“무척 졸린가 보구나. 책은 내일 읽고 아빠랑 같이 자자.”
“잠깐만 더요.”
미리엘은 몹시 졸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졸리지만 아직 잠들기 싫다는 표정, 나는 아이의 이마를 어루만지고는 속삭였다.
“괜찮아, 내일 미리엘이 일어날 때까지 아빠가 옆에 있을게요. 우리 황녀님은 그냥 안심하고 주무세요?”
“……정말요?”
“정말이지.”
나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어르고 달랬다.
미리엘은 눈을 감았다.
천족의 날개를 곱게 접은 미리엘의 숨소리가 골라진다.
금방 잠들었다.
옆으로 누운 나는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좋다.
진짜로 좋다.
매일 공무를 처리하느라 피곤하고, 어제오늘 사이에 개인적인 일들도 쏟아졌지만.
돌아와서 아이의 잠든 모습을 보니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다.
“아, 음.”
계속 보다 보니 나도 좀 졸린대.
이렇게 아침까지 자 버릴까?
생각한 내가 옷을 벗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미리엘이 작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꼭 잡고 있어서 벗는 게 여의찮다.
애를 깨울 순 없으니 이대로 자야겠군.
내가 눈을 감으려는데 문이 열리고 기세등등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옆에 선 다크엘프 이셀렌, 천족 렌시엘이 내려다보았다.
“시릭.”
“일어나세요, 폐하.”
“중요한 일 아니면 내일 말해.”
내가 눈을 감고 넘어가려도 해도 대답이 없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기척들.
나는 결국 눈을 뜨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렌시엘의 하얀 뺨이 붉어져 있고, 이셀렌도 눈가에 격정이 감돌고 있었다.
둘 다 얼굴을 붉히면서 싸웠다는 건데?
“니들은 뭐 보기만 하면 싸우냐? 애 잔다?”
내가 최대한 목소리를 죽여서 일렀다.
천년제국을 구성하는 각 종족들은 서로 사이가 나쁜 경우가 많았고, 황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경우가 아닙니다, 폐하.”
“내가 할 소리야. 이런 유치한 수작은 못 봐주겠는데?”
“애 잔다니까.”
내가 진지하게 이르자 두 여자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풀릴 기세가 아니다.
별수 없이 상반신만 일으킨 나는 한숨을 쉬었다.
“왜 싸우는데? 또 뭐 때문에 이러는데?”
“……폐하 탓이잖습니까?”
렌시엘이 한스럽게 말했다.
이셀렌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아이를 내세워서 시릭을 꾀는 일은 하지 말자고 서로 협정을 맺지 않았었나?”
“그럴 마음으로 한 게 아닙니다. 미리엘이 폐하를 뵙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만. 왜 그렇게 넘겨짚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급하군요.”
“그럼 내가 따라온 것에도 그렇게 화낼 필요가 없잖아? 오히려 네 결백함을 증명할 기회가 될 텐데?”
“당신은 그렇게 모든 일을 칼 자르듯이 대합니까? 그저 간만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보금자리에 남이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야밤에 쳐들어온다면 달갑겠습니까?”
“그건 네가 진실을 말할 때 이야기지. 난 그냥 이야기만 하고 말 생각이었다는 주장을 전혀 못 믿겠는데?”
낮은 목소리로 서로 치고받는 분위기가 살벌하다.
듣고 있던 나는 손을 흔들어서 논쟁을 끊어 버렸다.
“아, 잠깐. 뭔 소리야. 협정은 또 뭐고?”
“…….”
씨근거리면서 다투던 두 여자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감정이 올라서 정보를 너무 내비쳤다고 낭패한 기색, 나한테도 숨긴 정보인가?
나는 오간 대화를 복기하면서 상황을 유추해 보았다.
“황후들끼리 서로 밀약이 있었다고? 자기 자식을 내세워서 후궁으로 날 불러들이는 일이 없게 하자고?”
“…….”
“필요한 조치였어.”
렌시엘은 침묵했고, 이셀렌은 항변했다.
나는 잠깐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자식이 날 보고 싶다면 구만리라도 달려가고 싶은 게 아버지 마음이지.
지금 잠든 미리엘이 내일도 재워 달라고 하면, 나는 물론 그럴 거다.
“뭐 그래, 총애 다툼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까 서로 제어 장치를 마련해 둔 거지? 잘했다.”
“…….”
두 여자는 복잡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일부다처제가 쉬운 일도 아니고, 그게 황실이면 더하다.
지구의 역사, 왕조들을 살펴보면 부인 중 하나만 총애해서 사달이 난 경우가 숱하게 많지 않던가?
하물며 내가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서로 반목하던 종족들을 대표하는 황후들이다.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애 자는데 정신 사나워.”
“…….”
내가 권하자 두 여자는 마지못해서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몸을 돌리고 나를 살피는 두 미녀, 나는 가볍게 말했다.
“내가 대충 사는 것처럼 보여도 황제고, 너희들은 황후들이지.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넘치지. 실제로 내가 그렇게 써먹어서 일을 풀어 나간 경우도 많고.”
“…….”
“하지만 나는 너희, 자식들을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은 없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우리의 결합이 정치적 목적이 반영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의미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한 가족으로 뭉쳤고.
“……그래.”
“예.”
“그래, 바로 대답할 정도로 잘 아는 분들이 뭐 새삼 싸워? 둘이 좀 사이좋게 지내라.”
내가 말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사실 내가 뭐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황후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바로 내가 해 주는 말, 내가 이해하고 달래 주는 제스처가 필요했다.
……음, 이거 내 아래 애들이 서로 치고받을 때마다 써먹는 수법이긴 한데.
“그럼 둘이 얼른 어색하게 사과해 봐.”
“……뭐?”
“폐하.”
두 여자가 난감해했지만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나한테 괜한 일거리를 안겨 주었으면 이 여자들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내가 몇 마디 말 좀 했다고 니들끼리 진짜로 사이좋아지겠냐? 없던 우정이 무럭무럭 자라겠어?”
“그건…….”
“아, 물론 앞으로 두 번 다시 싸우지 말란 소리는 안 한다. 내가 그런 기대는 진즉 접었거든?”
황제하다 보면 나 따르는 애들이 서로 치고받는 거 지겹게 보게 된다.
말리고 어르고 때려도 소용없다.
아르센하고 레릭도 여전히 투닥거리잖아?
서로 으르렁거리는 녀석들도 내 눈치를 살피고 내 말을 듣는 거지.
결국 내가 교통정리 해 줘야 한다.
아내들도 결국 다를 게 없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종족 있을 것 같지만 조금은 자제하리라는 믿음을 줘야지. 그러니까 얼른 어색하게 화해해. 아주 두드러기가 나서 창피해서 얼굴 못 들고 살겠다 싶을 정도로.”
“…….”
내가 벌칙을 내리자 렌시엘은 이해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고르고는 이셀렌을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이셀렌, 나도 좀 너무 급하게 굴…… 꺄아악?!”
쪽.
그 순간 이셀렌이 렌시엘의 뺨에 키스했다.
렌시엘은 기겁하고 진저리를 쳤고, 한 이셀렌도 굳어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사약이라도 한 사발 드링킹한 비장미였다.
“……이, 이셀렌. 다, 당신 미쳤습니까!”
“나도 죽고 싶으니까 조용히 해. 하지만 이러면 시릭이 흥분한다고.”
“예? 예? 예?”
“…….”
아니, 저 여자가 뭔 모함이야.
이셀렌이 렌시엘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여자들의 수군거림.
렌시엘의 뺨이 천천히 붉어졌다.
“……예? 나, 나비린하고 그랬습니까? 그랬다고요? 그, 그렇게나?”
“…….”
뭐야.
저 여자들 뭔 소리 하는 거야?
렌시엘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이셀렌을 보고는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셨습니까, 전하?”
“아니, 내가 뭘 그랬는데? 왜 없는 말 지어내는데?”
“나비린도 불러와서 대질할까?”
“…….”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기억나 버리네.
결혼하기 전, 젊은 날의 치기라는 거지.
불타는 청춘이 이젠 아저씨가 된 나를 불태우게 생겼다.
“……음, 아무튼 둘이 화해했으니까 됐다. 이제 자자.”
“…….”
“그렇게 말없이 보지 마라. 애 잔다.”
나는 말하면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이셀렌과 렌시엘, 두 여자는 나를 빤히 보았다.
“100년이 넘게 기다렸으니까.”
“애도 자니까요.”
스노우 볼링 하게 놔 두니까 아예 눈사태를 만들려고 하네.
하지만 무작정 무시하다간 일이 더 커진다.
“알았다. 둘 다 잠깐 가까이 와라.”
“…….”
두 사람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오자 나는 양팔로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렌시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셀렌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움찔.
렌시엘이 놀라서 몸을 흠칫 떠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서 이셀렌에게 입을 맞췄다.
쪽, 가볍게 입술이 떨어지고는 이번에는 렌시엘에게 입을 맞춘다.
“…….”
내가 단숨에 정리하자 두 여자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나는 후련하게 말했다.
“자, 이제 됐지? ……야, 잡지 마.”
굿나잇 키스를 해 줬는데, 내 옷자락이 두 여자에게 붙들려 있었다.
렌시엘이 몽롱하게 말했다.
“폐하, 이렇게 옷을 입고 주무시면 안 되죠. 벗으세요.”
“……맞아, 더러운 옷으로 애 옆에서 자면 안 되지.”
“…….”
갑자기 죽이 딱딱 맞아서는 나를 벗기려고 드네?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해치웠다.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미리엘의 손?
렌시엘이 대신 잡아 주니 해결되었다.
오히려 애가 더 편하게 자는 것 같아서 조금 슬퍼졌다.
렌시엘은 한 손으로는 미리엘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옷을 벗겨 버렸다.
이셀렌하고 합심해서.
순식간에 속옷만 남은 나는 애써 말했다.
“야, 추워. 옷 줘.”
“잘 자라는 인사가 부족하잖아.”
“예, 부족합니다.”
“……야, 애 잔다니까?”
왠지 내가 사정하는 투가 되었다.
왤까.
왜 갑자기 동물의 왕국, 구슬픈 수컷 사자가 생각나는 걸까.
초원의 왕, 백수의 왕도 움츠러드는 순간이 있다.
그게 바로 지금 같거든.
은발의 다크엘프, 백금발의 천족은 고운 손으로 내 허벅지를 누르면서 넌지시 바라보았다.
“우리도 재워 줘야지.”
“예, 100년 동안 기다렸으니까요.”
“그렇지, 적어도 그 이상으로.”
“……내가 잘못했다. 그냥 서로 싸우고 살아라.”
내가 애써 웃음으로 넘기려고 해도 두 여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빤히 본다.
홍조로 달아오른 얼굴로 넌지시.
빤히.
나는 견디지 못하고 협상안을 내놓았다.
“아, 진짜. 애 깨우면 안 된다? 한 번씩만 더 해 주고 끝이다?”
“서로 10번씩만 더.”
“예, 그 정도만.”
“…….”
진짜인가.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이셀렌이 고혹적으로 웃었다.
“시릭이 참을 수 있으면 조용히 끝나.”
“……옆방은 비었는데요.”
“…….”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왜 울까?
난 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