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08)
밤에는 신중하게
심야.
메이호와 이야기를 끝낸 나는 중앙성으로 돌아왔다.
습관대로 집무실에 돌아온 나는 멈칫했다.
책상 옆에 서 있는 은발의 다크엘프.
“라그리즈.”
이셀렌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성으로 부르자, 이셀렌은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태연한 척, 집무실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보고할 거라도 있어?”
“제안할 게 있어서.”
“술 마시고 들어야 하는 이야기인가?”
내가 장난스럽게 물어도 이셀렌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심하다가 말했다.
“오르카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 관계를 조사했어.”
“……음.”
나는 이마를 누르고 멋쩍게 웃었다.
“오르카 문제는 내가 알아보겠다니까. 그새를 못 참았네?”
“여자는 여자가 봐야 알아. 그리고 시릭, 너는 너무 사람을 좋게만 생각하고.”
“……뭐 그럼 나보다 잘 알겠네? 오르카가 마음에 둔 여자가 다크엘프라고?”
“그래.”
이셀렌이 차갑게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동기야. 간략하게 설명하면…… 나는 훗날 오르카가 다크엘프들을 이끌 수 있게 사람을 붙여 놨어. 그중 하나가…… 배신한 거지.”
“…….”
와, 스산하다.
이셀렌은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 토막 낼 기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어붙겠지만 나는 여유롭게 대했다.
“배신은 좀 과한 표현인데? 그냥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건 내 말이 맞아. 나는 다크엘프의 여왕이고 오르카는 내 아들이야.”
“…….”
여긴 자기 영역이라고, 어머니이자 여왕으로서 두고 볼 수 없다고 선을 긋네.
이셀렌은 한숨을 섞어 가면서 말했다.
“……미안, 당신에게 화내는 게 아니야. 그저 너무 불쾌해서 어쩔 수가 없어.”
“믿어 본 적도 없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 버려서?”
“그래, 이미 알겠지만 다크엘프의 왕권은 대대로 여자에게만 이어져. 그 자식 중에 남자가 태어난 경우는 거의 없고. 문제는 내게 자식은 오르카 하나라는 거고, 오르카의 결혼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야.”
“…….”
음, 그렇지?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까지 염두에 두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리라.
“……물론 오르카도 언젠가 결혼하게 될 테고, 또 정보를 다루는 건 사람을 다루는 것과 같으니 여자를 대하는 것도 익숙해져야지. 그래서 주변에, 선을 넘지 않을 거라 믿을 수 있는 여자를 골라서 배치했는데 그것이…….”
“…….”
이셀렌은 말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떠는데 정말 치를 떨고 있었다.
음, 나도 슬슬 무서워지려고 한다.
이셀렌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혼잣말까지 했다.
“영민한 아이라서 오르카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믿었는데 감히 꼬리를 쳐? 주제도 모르고!”
“진정해, 그러다 탈 난다.”
“…….”
내가 보기에는 애들끼리 서로 좋아하는 것 같구만.
하지만 이럴 때는 아내 편을 들어 줘야지.
내 말에 이셀렌은 이마를 살짝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호흡을 정리했다.
사실 이셀렌이 치를 떨 만도 했다.
이셀렌은 전생의 내가 사망한 뒤에 재혼은 생각지도 않았다.
정보 통신을 이어받을 수도 없는 오르카를 자기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었고.
그러니 오르카가 어린 시절부터 최대한 문제가 없게 온갖 방책을 생각했을 것이다.
강남의 극성맞은 어머니를 한 다스 데려와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고심해서 키운 오르카는 내가 봐도 훌륭하게 잘 컸는데…….
이셀렌의 계산이 어긋난 부분.
아들이 사랑에 빠지는 일이었다.
“라그리즈, 믿고 맡긴 고양이가 생선 물고 부뚜막에 올라가서 열 받는 거야 이해하는데. 그래도 오르카가 좋아하면 좀 봐줘야지.”
“……당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년을 없애 버렸을걸.”
이셀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의 엄명을 무시하고 자기 아들을 홀렸다면 이셀렌은 절대 묵과할 수 없었다.
감정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나는 이해하면서도 안도했다.
“……그래, 아무튼 나도 있고. 너무 화내지 말고. 좀 눈감아 줘라. 다른 애들도 응원하는 것 같고.”
“현장에서 사고사로 위장하는 방법도 있지만 참았어.”
“그래, 잘 참았어. 잘 참았어.”
내가 애 다루는 것처럼 어르자 이셀렌은 좀 진정한 눈치였다.
믿었던 수하(여왕인 이셀렌에게는 모든 다크엘프가 자기 수하다)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을 건드렸다면 눈 돌아가지.
“황도로 올라오라고 했어, 검증하려고.”
“……어, 루이사를?”
“그래, 그년.”
이셀렌은 눈앞에 있으면 당장 갈아 마실 기세였다.
내가 이름을 아는 거야, 메이호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려고?”
“보고 아니다 싶으면 없애야지.”
“……농담이면 좋겠는데?”
“당신도 그 자리에 참석해. 내 독단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잖아.”
이셀렌은 냉정하게 말했다.
말인즉슨, 며느리 후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죽이고 싶은데 나도 협력하란 소리잖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오르카가 화낼걸? 애가 그 문제는 굉장히 섬세하게 접근하던데.”
“너무 물러. 설마 나한테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어? 몰래 할 거라면 300년은 감출 각오를 해야지. 들켜 놓고 내가 모른 척 눈감아 주길 바라는 것도 어리광이고. 이건 다크엘프의 여왕으로서도 허락할 수도 없고, 어머니로서도 실망이야.”
“…….”
이셀렌이 마디마디 분하게 말하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언행은 감정적이지만 무작정 반박할 순 없었다.
그러면…….
“알았어, 그럼 같이 자리 마련해서 보자. 그러면 되겠지?”
“아직 오르카는 몰라. 그러니까…….”
이셀렌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가 그 아이에게 말해 줘.”
“…….”
나는 쓴웃음을 지어 버렸다.
요는 며느리 후보(너무 앞서 나간다 싶지만)를 검증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물론 이러면 오르카가 너무 급하다고 화를 낼 것이다.
그러니 나보고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어머니인 자기가 말하면 아들이 반발할 테니까 아버지인 내가 애를 달래 달라고.
내가 대답을 바로 안 하자, 이셀렌은 흘끔 눈치를 보았다.
“……안 돼?”
“나보고 아들에게 싫은 소리 대신 들어 달라고?”
“…….”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이셀렌은 풀이 죽어 버렸다.
시종일관 냉철하게 피를 뿌리는 여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아이는 나를 너무 어려워해. 물론 나도 그만큼 엄하게 키우기는 했지만.”
“음.”
하긴 둘이 서로 딱딱한 관계지.
그럼 이번 기회에 분위기를 좀 풀어 둘까?
나는 계산하면서 일렀다.
“아버지인 내가 한 일이라고 처리하마. 대신 하나 약속하자. 그 자리에서 너무 성질내지 말고 내 뜻을 우선해라.”
“……알아.”
“시무룩해하지 말고.”
이셀렌이 이렇게, 극도로 분노하고 신경질을 부리고 침울해지는 다양한 감정을 보여 주는 건 오로지 나하고만 있을 때다.
그녀는 남들 앞에서는 시종일관 차갑고 냉철하게 구니까.
내가 자식들 앞에서 풀어지는 것처럼, 이셀렌은 나하고 있으면 풀어지는 것이다.
약체인 다크엘프의 명운을 걸고 온갖 고비를 넘겨 오던 암살 여왕은 남편 앞에서만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어리광도 부린다.
나는 웃으면서 책상을 짚고 있는 이셀렌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간질, 간질.
“…….”
계속 반복하자 이셀렌이 새치름하게 눈을 흘겼다.
무슨 어린아이 같은 장난이냐고.
눈치를 주면서도 손을 빼지는 않고, 싫어하는 얼굴도 아니다.
오히려 들뜬 기색.
이셀렌이 몸을 기울이면서 우리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시릭.”
“그래.”
“돌아온 거 맞지?”
“뭘 새삼스럽게 물어.”
내가 환생했다는 걸 알고 온갖 일이 있었는데도.
어둠 속, 내 책상 위에 앉은 이셀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안하게.
“……휑하니 떠났으니까, 다시 그럴지 몰라서.”
“애들 있는데 안 그래.”
“…….”
꽉.
그 순간 이셀렌이 장난치던 내 손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애들이 없으면 가 버릴 거라고?”
“아닌 거 알면서 말꼬리 잡는다.”
“나도 말꼬리 잡는 게 아닌 거 알잖아.”
“…….”
이셀렌은 내 손을 주무르면서 속삭였다.
“계속, 계속 그리워했는데. 겨우 돌아와 줬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불안해져서. 당신이 아직도 자리에 있나 늘 확인하게 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도 간간이 불안해져.”
“…….”
정신과 상담을 받아 보라고 장난치면 안 되지?
내가 말을 삼키는데 이셀렌은 내 손등에 키스했다.
은발의 다크엘프가 보라색 눈으로 나를 빤히 보면서, 갈구하듯이 손가락에 키스한다.
뜨겁고, 정열적으로.
“……불안하지 않게 해 줘.”
“…….”
이셀렌의 적나라한 고백에 나도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폐하, 3황녀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어, 들어오라고 해.”
내가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이셀렌은 아쉬워하면서도 내 손을 놓고 책상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백금발의 천족 아이가 시종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내 셋째 딸, 미리엘이다.
가벼운 외출복 차림에 피곤한 얼굴, 무슨 일인지 손에는 베개를 들고 있었다.
“우리 공주…… 아니, 황녀님은 무슨 일로 오셨을까?”
“저기…….”
미리엘은 나를 보고 말하려다가 뒤늦게 이셀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셀렌 어머니.”
“……밤중입니다. 그리고 긴한 이야기라면 제가 물러나지요.”
이셀렌은 무표정한 와중에도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하지만 미리엘은 쭈뼛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이셀렌은 언제나 차가운 표정이라서, 아이들이 어려워했다.
나는 가볍게 내 무릎을 쳐서 미리엘의 주의를 끌었다.
“응, 그래. 미리엘. 이제 잘 시간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니?”
“……잠이 잘 안 와서요. 아빠랑 자도 돼요?”
“응, 물론이지.”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
예전에야 나, 리젠 리브라타가 곧 시릭 카라카스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서 망설였지만.
이젠 다 알잖아?
또 어린 딸이 잠이 잘 안 온다고 함께 있고 싶다는데 마다할 아빠가 어디 있을까?
“……시릭, 예법에 어긋나.”
그때 이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예법 바꿔. 딸이 잔다는데 방해되는 법은 필요 없다.”
“…….”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미리엘. 아빠랑 자러 가자? 책이라도 읽어 줄까?”
“읽을 줄 알아요.”
“그래도 읽어 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내 부탁에 미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 기쁘다.
오늘 하루 종일 정신없게 일한 걸 다 보상받는 기분이다.
내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미리엘을 따라온 시종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럼 폐하, 뫼시겠습니다.”
“그래, 가자.”
“……어디로?”
그때 지켜보던 이셀렌이 딱 잘라 말했다.
인간 시종이 멈칫하는데 이셀렌이 다시 다그쳤다.
“어디로 가려는 거지?”
“5황후 전하의 처소입니다, 3황후 전하.”
“……그럼 나도 간다. 시릭, 그래도 되지?”
이셀렌이 차디차게 말했다.
“아이 재우는데 나도 가도 되지?”
“응? 그래. 와라, 와.”
기쁨에 젖은 나는 대충 대답했다.
지금 내 옷자락을 붙잡은 딸이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데 뭐가 고민될까!
……고민했어야 했다.
이셀렌을 데리고 렌시엘의 방에 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