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06)
어리광이 어때서
모든 일이 그렇지만 전후 사정 파악이 우선이다.
황성 남성의 응접실.
내가 들어가니 2황후 랑에이와 8황후 유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내가 들어가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릭.”
“오셨어요, 폐하.”
나는 대충 받아 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가족 사이의 일, 우리 세 사람밖에 없다.
“일이 생각보다 커진 모양이네?”
보통 집안 문제가 생기면 여간하면 안에서 해결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물며 천년제국의 황실, 사정이 더 복잡하다.
나도 전생에 부인들과 크게 관계가 틀어졌어도, 그냥 얼굴 안 보는 정도로 끝내지 않았는가?
랑에이가 울적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시릭, 내가 딸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
“그건 아니지.”
의례적인 말에 나는 딱 잘라서 부정했다.
“메이호는 충분히 생각이 깊고 자기 동생들을 걱정할 줄 아는 아이다. 그런 애가 무작정 화낼 것 같진 않고. 또 너도 2황후로서 두루두루 주변을 살필 줄 아는데. 왜 두 사람이 그리 싸웠는데?”
“으으음…….”
사실 메이호는 오해도 잘하고 외골수 기질도 있었다.
내 죽음에 자기 어머니, 랑에이 탓을 하고 서로 사이가 벌어져서는 100년 동안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을 정도였고.
나는 턱을 괴고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메이호가 화내면 말릴 사람이…… 음, 진짜 나밖에 없네?”
“…….”
메이호는 차녀, 장남인 세탄과는 연배가 같다.
장녀인 라온은 아직 어린애고.
뿔나면 자기 어머니인 랑에이에게도 으르렁거리는데, 다른 황후들이 제어할 수 없지.
정말 메이호가 빡 돌면 달랠 사람이 나밖에 없네?
애가 내 말은 잘 들으니까.
랑에이가 더욱 풀이 죽어서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면목이 없다.”
“아니, 자꾸 그러지 말라니까. 엄마가 못 말려서 아빠인 내가 나서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래?”
“…….”
황실이라는 이름표 떼고 생각하면 그냥 흔한 일이다.
내가 거듭 말하자 랑에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를 푼 내가 정리했다.
“두 사람이 뭐 때문에 그렇게 다퉜는지 모르겠네. 일단 내가 애하고 천천히 이야기해 볼게. 그리고 유하는 무슨 일이야?”
“아, 지금 막내 딸아이가 지금 메이호 황녀님과 같이 있습니다.”
“벨이?”
막내딸, 벨.
유하의 딸로 정신 연령이 어린 라온과 함께 다니면서 돌봐 주었다.
내 전생 시절에는 갓난아이였는데.
오늘에야 황성에 들어올 거라고 들었고.
“그래, 알겠다. 아무튼 랑에이, 일단 네 입장도 좀 들어 보자. 면목 없다고만 하지 말고. 사정을 말해 봐.”
“……메이호가 일하고 싶다고 해서.”
“응? 그럼 당연히 하게 해야지. 애도 이제 성인이고.”
“공무가 아니다.”
랑에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옷 만드는 일을 하고 싶으니까 허락해 달라고 하더군. 하지만 시릭, 모두 알다시피 메이호는 황녀다. 그것도 2황녀, 세탄과 더불어서 황실을 지탱해야 할 중추다. 그런 아이가 마음대로 구는 건 황실, 나아가서 제국의 기강이 서질 않아.”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랑에이를 빤히 보았다.
“……왜 그렇게 보지?”
“좀 놀라서, 너 보통 그런 거 생각 안 하잖아.”
“공사는 구별해야지, 그 정도는 알고 있고.”
랑에이는 차분하게 말했다.
“전선에 내가 나서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지던 것처럼, 메이호가 민중에 모습을 지속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면 제국이 더욱 튼튼해진다.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더 확실해진 일이고.”
“…….”
내가 전선에서 싸울 때, 메이호는 다른 딸아이들과 함께 후방의 민심 수습에 주력했다.
실제로 효과를 많이 보았고.
“의류 공방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허비하는 건 허락할 수 없다. 그건 나라의 녹을 먹는 황녀가 할 일은 아니니까. 그렇지 않나, 시릭?”
“……으으음.”
보통 부모가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또 그 기대가 어긋나면 서로 다툼이 벌어지는 것도 흔한 일이고.
하지만 우리 집안은 황실, 정치적인 고려를 끼워 넣으면 더 복잡해진다.
랑에이의 말은 일견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딸아이가 정치를 도와주면 고맙지만 나로선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는데? 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시킬 생각은 더욱 없어.”
“시릭, 강요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황실의 일원이라면 민중을 이끌고 또 모범이 되어야지.”
랑에이는 보기 드물게 강경했다.
“시릭, 나는 물론이고 다른 황후들의 아이들도 황실의 일원으로서 자각을 가져야 해. 이 나라를 지탱하고 번영시키는 데 더욱 힘을 써야지.”
“음, 그렇게 생각해?”
나는 랑에이의 기색을 살폈다.
랑에이답지 않게 단호한 얼굴.
호랑이 수인이 가정을 꾸릴 때 원칙이리라.
하나로 모인 무리는 우두머리 수컷이 하는 일을 합심해서 따라야 한다.
또 새끼를 교육하는 건 여자가 할 일, 그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여자인 그녀가 엄히 자식을 다스리고 가르쳐야 한다고.
랑에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시릭, 기왕 이렇게 된 거 메이호의 일은 나에게 맡겨 줬으면 한다. 다시는 문제가 되지 않게 처결하겠다.”
“그럼 나는 메이호를 편들어 주지 말라고?”
“그 아이는 너에게 매달릴 것이다. 들어 주면 안 돼. 본이 안 선다. 그리고 메이호가 마음대로 굴면 동생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거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했다.
사실 랑에이의 말은 그렇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릭, 이건 정말 만약의 이야기지만 국가적 비상사태가 닥치기라도 한다면 메이호가 대통을 이어야 할 수도 있다. 그 아이도 어깨너머로 네 일을 배워 둬야지.”
“야, 너…….”
“라, 랑에이 전하?”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고, 유하도 당황했다.
정작 랑에이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지금 랑에이는 내가 또 비명횡사하면 메이호가 뒤를 이을 수도 있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가 외부로 흘러나갔다가는, 랑에이가 정치적 야욕을 품었다고 많은 이들이 오해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황권에 대한 도전이라 해석되어서 정말 크게 일이 번질 수도 있었다.
“……내가 실수했나?”
랑에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손을 저었다.
“어디 가서 그 말은 하지 마라. 그리고 너랑 진짜 안 어울리니까 앞으로 정치적인 생각하지 마.”
“으음, 알겠다.”
원래 어디서나 권력의 승계는 민감한 화두, 다음 대통을 누가 잇느냐는 정말 민감한 문제였다.
자칫하면 피를 부를 정도로.
정작 랑에이는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는 여자다.
“아무튼 시릭, 메이호의 일은 나에게 맡겨 주겠나? 너는 그저 모른 척 눈감아 줬으면 한다.”
“그러다가 애가 또 가출이라도 하면?”
“그런 일이 없게 해야지.”
“…….”
랑에이의 주장은 무작정 반대할 성질이 아니었다.
또 자식 교육에는 어머니의 의견이 앞서는 게 보통이지?
나는 유하를 돌아보았다.
“유하, 너나 다른 황후들의 의견은 어때? 다들 동의하냐?”
“시릭, 그건 물어볼 게 아니다.”
랑에이가 드물게 나에게 반박했다.
이런 자식 교육은 여자의 일, 또 여자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렌시엘은 반대할 것 같은데?”
“…….”
랑에이는 신음만 흘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메이호는 자기 친자식이니까 다른 여자가 간섭할 게 아니라고 하겠지.
하지만 랑에이는 다른 아이들도 자기 자식처럼 여긴다.
반대로 다른 황후들도 메이호에게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호랑이, 도량이 넓다.
“음, 그게…… 바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눈치를 보던 유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랑에이 전하, 좀 더 차근차근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게 어때요?”
“나는 랑에이에게 찬성이야.”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돌아보니 은발의 다크엘프, 이셀렌이 들어오고 있었다.
“랑에이, 밖으로 이야기가 흘러나가지 않게 조치했어. 다만 라온이 빠져나가는 건 막지 못했지만.”
이셀렌이 나를 은근히 보는 시선.
본래 황후들은 이걸 나에게 알리지 않고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럼 나한테 라온을 보낸 건 메이호겠지.
사정을 파악한 나는 혀를 찼다.
“내 아이 문제인데 왜 나 모르게 덮어 버리려고 하는데?”
“시릭, 너는 아이들에게 너무 물러. 이 사안에 대해서는 나도 랑에이에게 찬성이야. 너무 어리광만 받아 주면 애가 못 쓰게 돼.”
“…….”
랑에이도 턱을 끄덕였다.
2황후와 3황후, 두 여자가 날을 세우자 유하도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셈해 보았다.
이러면 황후 중에서 남은 건, 5황후 렌시엘과 6황후 나비린 그리고 7황후 바라메다.
1황후 하시아는 일단 논외로 두고.
남은 황후들의 속은…….
헤아리던 나는 정색했다.
“아니지. 이건 집안 문제잖아. 서로 의견이 갈린다고 냅다 꺾어 버리면 그게 화목한 가정이냐? 전쟁터지.”
“…….”
“그렇잖아? 내가 지금 불호령 내려서 메이호 하고 싶은 대로 놔 두라고 하면 너희 둘도 결국 따르겠지.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된 일 처리는 아니잖아?”
내가 타이르자 이셀렌이 받았다.
“그래서 말하고 있잖아, 아이들 교육을 우리들에게 맡겨 달라고.”
“나도 애들 아버지야. 무작정 모른 척하라는 건 말이 안 되지. 너희 의견을 무작정 제쳐 두겠다는 게 아니라 숙고할 문제라는 거다.”
“…….”
내가 거듭 말하자 랑에이와 이셀렌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수긍한 건 아니지만.
황실이고 뭐고 자식 문제라면 둘 다 극성맞은 어머니다.
결국 내가 조율해야겠군.
“어리광 받아 주는 게 나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는 보란 듯이 한숨을 쉬고는 랑에이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슥, 스윽.
“으, 으으. 음?”
내가 손끝으로 턱을 쓰다듬자 랑에이는 움찔, 움찔거리더니만 몸에서 힘을 뺐다.
좌우로 흔들리는 호랑이 꼬리.
“으, 음, 시릭. 으음. 여기서 이러면…….”
방금 전까지 위엄 있는 척하던 황후 전하의 목소리가 달콤해진다.
랑에이는 주저하면서 내 무릎을 향해서 상반신을 기울였다.
내 허벅지에 고개를 묻은 랑에이는 눈을 감고 갸르릉, 소리를 냈다.
계속 턱을 만져 주라고.
내가 랑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턱을 계속 간질여 주자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면서 기분 좋은 한숨을 쉰다.
내가 이러면 랑에이는 말 그대로 사족을 못 쓴다.
“이러면 안 된다고? 앞으로 금지할까?”
“……경우가 달라.”
이셀렌은 나직하게 대꾸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내들도 나와 같이 있고, 어리광 부리고 싶어 하니까.
그 점을 지적한 나는 가볍게 정리했다.
“가족끼리 어리광 좀 부릴 수도 있지. 아빠는 그러려고 죽도록 일해. 내 자식이 자기 하고 싶은 일 하겠다면 이야기를 들어 주고 지지해 줘야지.”
“…….”
“물론 무조건 찬성이라는 건 아니고.”
나는 정리하고는 랑에이의 턱에서 손을 떼어 냈다.
“으으음.”
취한 목소리를 흘린 랑에이는 뺨을 내 허벅지에 문질렀다.
더 해 달라고.
“……랑에이, 그만해.”
“…….”
이셀렌의 말에 움찔한 랑에이는 비틀거리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이야기를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하, 지금 네 딸인 벨이 메이호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고?”
“예.”
“막내도 좀 길게 보고 싶으니까 같이 가자. 네가 중간에서 이야기도 좀 해 주고.”
이셀렌이 나를 복잡한 얼굴로 보자 나는 미끼를 던졌다.
“아, 이셀렌. 오르카 쪽은 대충 알아봤다.”
“……뭐?”
“그것도 조만간 해결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라. 가자, 유하.”
이러면 이셀렌도 얌전히 있겠지.
랑에이와 이셀렌을 봉쇄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정치 업무에 계속 시달려서 지치지 않았냐고?
이건 일이 아니다.
자식 보러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고, 발걸음부터 가벼워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