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05)
뜻밖의 과제
리세라의 물음에 나는 결국 포기하고는 돌아섰다.
내 품에 안긴 라온은 리세라를 향해서 양팔을 붕붕 흔들어 보였다.
“아하하! 세라다! 세라야! 세라다!”
“……예, 언니.”
리세라는 다소곳하게 말하면서 내게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비전을 풀어 버렸다.
무슨 일인지 가게 안에는 리세라와 멜리우스뿐, 점원도 없으니 별문제 없다.
“헉? 황제 폐하 아니십니까?”
그러자 리세라 옆에 있던 멜리우스가 정색하고는 부복해 보였다.
이놈이 이렇게 빠릿하게 예의 차리는 건 참 보기 힘든데…….
나는 멜리우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면서 쏘아붙였다.
“내가 니 폐하가 맞긴 하냐? 응? 무릎만 꿇으면 만사가 해결되는 줄 알아? 확 다리 아래를 잘라 버릴까 보다.”
“왼쪽으로 할까요? 오른쪽으로 할까요?”
“당연히 양쪽 다지. 잘라. 오늘 안으로 잘라서 가져와.”
멜리우스가 한없이 진지하게 말하자 나는 이를 드러냈다.
그러자 리세라도 정색했다.
“아버지, 왜 갑자기 멜리우스 경에게 무례하게 구세요?”
“…….”
아, 가슴이 찢어진다.
물론 내가 동네 깡패처럼 으르렁거렸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집에 인사하러 놈과 처음 만나면 아빠도 이래저래 속이 복잡하거든!
하지만 리세라는 나를 단호한 시선으로 나무랐다.
견디다 못한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음. 으음.”
말은 안 나오는데 코끝이 시큰거리기고.
리세라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빠 맘도 몰라주고 멜리우스 편을 드는 리세라가 야속하기도 하고.
리세라는 그사이에 자리를 수습했다.
“멜리우스 경, 얼른 일어나세요. 어서요.”
“황제 폐하께서 노하셨다면 제 머리를 드려야 합니다.”
내 품에 안긴 라온이 심심한지 내 뺨을 잡아당기다가, 이어서 코까지 비틀었지만 차라리 고마웠다.
이러다 눈물이 쏟아지면 아파서 운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으니까!
딸랑.
그때 오르카와 세탄이 가게로 들어왔다.
리세라는 더 어이없이 우리 세 사람을 보는데…… 세탄이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세라야, 오해하지 마라.”
“……아, 형. 아니잖아. 아버지가 암행 나오셨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잖아.”
세탄과 오르카는 각각 나를 감싸 주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그리고 라온은 까르륵 웃었다.
“아빠는 계속 세라 뒤를 따라다녔어!! 나도 따라다녔어!”
“…….”
리세라는 집안의 세 남자를 한 번씩 보았다가 라온을 보고,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아버지.”
……영민한 리세라라면 내가 미행했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으리라.
결단한 나는 정색하고는 말했다.
“이셀렌이 알려 준 거다. 오르카는 관련 없다.”
“아버지, 그러면 저는 어머니에게 혼쭐이 나는데요? 아니, 혼쭐 정도가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문책당할걸요?”
“내가 처리할게.”
아무튼 애들끼리 우애는 지켜야지.
오르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한걸음 나서면서 말했다.
“누님, 죄송합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보고했습니다.”
“오르카, 내가 각별히 부탁하지 않았나요? 아버지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요.”
“죄송합니다.”
오르카는 면목이 없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리세라를 아끼는 오르카로서는 정말 좌불안석일 것이다.
그러자 세탄이 나서서 오르카를 두둔했다.
“그만해라, 오르카. 그리고 리세라, 너도 가족들에게 괜한 걱정 끼치지 말고. 너 같은 애가 어디 만날 놈이 없어서 그런 시정잡배 같은 건달에게 눈을 주는 거냐? 너와 맞지 않으니 지금 당장 헤어져라.”
“…….”
내가 차마 못 했던 말을 다 해 버리네!
역시 아들이 최고다!
리세라와 멜리우스가 세탄을 묘하게 보았다.
기묘한 분위기.
이어서 리세라가 다시 나를 보았다.
“아버지, 그렇게 생각하셔서 따라오신 거예요?”
“……아니, 아빠도 너만 좋다면 어지간하면 응원해 주고 싶다만. 그래도 세라야. 넌 아직 어리잖니? 너무 서두를 필요도 없고. 세상에 신랑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좀 더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무수한 생사고락으로 멘탈이 극한까지 단련된 나지만 겁이 난다.
애가 화라도 내면 다행이지. 울면 어쩌지?
내가 전전긍긍하는데 리세라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으음, 그래.”
판결의 시간이다.
내가 침을 꼴깍 삼키는데 멜리우스가 불쑥 말했다.
“오해입니다, 아버님.”
“닥쳐, 우리 집에 너 같은 자식 놈은 없다.”
“저도 폐하와 보다 친밀해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오해입니다. 하지만 그걸 정 원하시면 제 한 몸 바쳐서 황녀님과 사귀겠습니다!”
멜리우스가 진지하게 말하자 나도 진지하게 빡이 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세탄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는 걸 보고는 나는 얼른 만류했다.
“야, 세탄. 참아라.”
“……제 일탈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제국군이 불명예스럽게 굴래?”
나도 열 받긴 해도 장남이 나서니 오히려 좀 침착해지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리세라가 불쑥 말했다.
“아버지, 착각하셨어요.”
“……음?”
“저와 멜리우스 씨는 남녀 교제를 목적으로 만나는 게 아닙니다.”
리세라가 정색하고는 말해도 나는 바로 믿지 않았다.
황제인 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자식의 말이라면 다 믿어 주고 싶지만.
내 딸아이가 이 자리를 모면하고자 꾀부리는 거 아닐까?
물론 그걸 힐난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나와 세탄이 지나치게 유난을 떤다는 자각은 있었으니까.
“……안 믿으시네요?”
“으, 으음. 아니. 믿어. 믿으마.”
표정에 생각이 드러났는지 리세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가 애써 웃는데 품에 안겨 있던 라온이 내 입술을 쭉쭉 잡아당겼다.
자기가 잘 모르는 이야기가 계속 날아다니고 분위기가 묘해지자 지루한가 보다.
오르카가 리세라에게 확인했다.
“하지만 저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단둘이 만나시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눈을 피하려 하신 거면 그런 목적 말고 없지 않나요?”
“오르카, 믿고 털어놓은 건데 냉큼 일러바쳤네요.”
“아, 아니 그게.”
“고자질쟁이.”
리세라가 짐짓 쌀쌀맞게 굴자 오르카가 식겁했다.
결국 누나의 간곡한 부탁을 어기고 밀고(?)한 셈이니까.
하지만 나는 좀 안도한 게 리세라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지금 장난치는 거다.
“죄, 죄송합니다. 누님.”
“아니에요. 좀 당황했지만 괜찮습니다. 그리고 멜리우스 씨도 좀 일어나세요.”
“폐하의 앞 아닙니까. 어찌 그런 불경을.”
“멜리우스 씨는 제 일을 도와주셨으니까요. 일어날 자격이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리서 눈으로만 볼 때야 몰랐는데……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둘 사이에 남녀의 기류가 없었다.
그럼 대체 둘이 숨어서 뭘 하던 거지?
“라온 언니, 세탄 오빠랑 놀아 주실래요?”
“응!”
내게 안겨 있던 라온은 냉큼 세탄의 목을 향해서 뛰고는 매달렸다.
애가 무슨 나무 타는 원숭이처럼 이동하네.
그리고 리세라는 거울 옆에 있던 옷을 들고는 내게 내밀었다.
“아버지, 이거 한 번 입어 보세요.”
“응? 이걸 왜?”
“……아.”
그때 오르카가 뒤에서 신음을 흘렸다.
내가 돌아보자 오르카는 당황하며 설명했다.
“으음, 그러니까 엘프의 풍습입니다. 그게 저기…….”
“장성한 자식은 키워 준 부모에게 옷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폐하. 키워 준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일어난 멜리우스가 정중하게 설명했다.
얼결에 받은 코트를 내려다보던 나는 리세라, 멜리우스를 번갈아 보았다.
엘프식 예법에 대해서 아는 나도 언뜻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담아서 천부터 세심하게 골라서 옷을 자아내서 바친다고.
리세라가 차분하게 말했다.
“정령수로 짠 옷이에요. 날이 추워졌으니 코트로 했어요. 저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멜리우스 님에게 많은 조언을 들었어요.”
“그리고 전 리브라타 영지 시절부터 폐하와 가깝게 지냈으니까요. 폐하의 취향이라면 전부 다 알고 있다고 황녀 전하께서 믿어 주셨습니다.”
멜리우스가 당당하게 말하자 나는 기가 막혀서 따졌다.
“너 리브라타 영지 시절에 나랑 친하게 지낸 적도 없잖아. 별채에 혼자 10년 동안 박혀 있었잖아?”
“그 정도면 근거리죠.”
“너랑 이야기하면 속 터지니까 조용히 해.”
멜리우스는 내가 시릭이라는 걸 안 다음에는 나름대로 극진하게 굴지만, 여전히 엉뚱했다.
……아니, 황제 빠돌이라는 놈들은 다들 이런 식이던 것 같은데.
하여튼 리세라가 짰다는 감색 코트를 나는 멍하니 어루만졌다.
정령계에 걸쳐져 있는 정령수로 만든 옷, 감촉은 부드러운데 안은 상당히 단단하다.
리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색깔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 아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좀…….”
“아, 아빠 운다? 아빠, 울어?”
뒤에서 라온이 불쑥 말하자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끝이 따가워지는 감각, 진짜 눈물 나오겠다.
리세라는 재차 권했다.
“한 번 입어 보세요.”
“으음, 그래.”
나는 얼른 윗옷을 벗고는 딸아이가 만든 코트를 걸쳤다.
미리 조사했는지 치수도 딱 맞다.
내 취향에 맞게 별다른 장식이 없고 안쪽에 주머니가 달린 게 기능적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내가 감상에 젖어 있는데 멜리우스가 나서서 설명했다.
“정령의 가호를 담아서 방검과 타격을 줄이는 효과도 있습니다. 무딘 칼이라면 날도 안 들어갈 겁니다.”
“……넌 좀 조용히 해 줄래?”
“알아 두셔야 할 것 같아서요.”
딸의 선물을 받고 감동하는 아버지에게 카탈로그 들이대지 말라고.
오르카가 리세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코트예요? 엘프들은 보통 셔츠나 겉옷 만들지 않아요?”
“아버지는 지나치게 단출하게 입고 다니셔서 겨울에 코트도 잘 안 챙기시니까.”
“……아, 그렇죠. 툭하면 갑갑하다고 코트고 뭐고 다 벗고 다니시니까.”
“이건 안 벗는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딸아이가 이렇게 열심히 만들어 준 걸 어떻게 함부로 다룰까?
“이거 그냥 진열장 안에 곱게 전시하고 평생 간직하고 싶은데.”
“입어 주세요. 해지면 한 벌 더 해 드릴게요.”
“……으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거울 안의 내 모습, 옆에 선 딸아이를 보고 있자니 진짜 눈 끝이 아려 온다.
눈물이 핑 돈다.
그러자 리세라가 내 손을 잡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아버지.”
“으음, 아니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그렇게 제가 걱정되어서 몰래 따라오셨어요?”
“……으음, 그야 언제나 걱정하지.”
내가 말하자 리세라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코트만이 아니라 옷 한 벌 제대로 해 드릴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시간이 걸리고 또 아버지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멜리우스 씨에게 예법과 제작 과정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고, 메이호 언니에게 디자인도 도움받고, 또 오르카에게 따로 부탁을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오르카도 널 걱정해서 이런 거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나무라지 마라.”
“참,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에요.”
리세라는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벌써부터 이렇게 극성맞게 구시면 나중에 어떻게 하시려고요.”
“……으으음, 참아 보마.”
“농담이에요. 겨우 아버지랑 같이 지내게 된걸요. 당분간은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건 아니지. 네가 마음에 둔 놈이 있다면 내가…….”
“가서 잡아 오시게요?”
리세라가 장난스럽게 묻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름답게 자란 딸이 짠 옷을 입고 대화하고 있자니 온갖 감정이 올라왔다.
“……그래, 뭐 네가 좋아하는 놈이라면 어떤 놈이건 잡아 오마.”
“농담이라니까요. 뭘 그렇게 정색하세요.”
“으음.”
나는 신음만 흘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걸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자 리세라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는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결국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칠 수밖에 없었다.
우웅.
그리고 팔찌가 묘하게 떨렸다.
젖은 눈으로 내려다보니 거무튀튀하던 팔찌에 붉은빛이 돌고 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과 교류하면서 팔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리라.
여하튼 시간이 지나고, 좀 진정한 내가 겨우 말문을 텄다.
“……으음, 고맙다, 세라야.”
“저야말로 고마운걸요. 이렇게 아버지에게 옷도 선물해 드릴 기회가 와서요.”
거울 속의 리세라는 빙긋 웃었다.
“처음에 날카롭게 반응해서 죄송해요. 화난 게 아니라…… 저도 좀 부끄러웠거든요. 제대로 윗옷하고 셔츠, 바지에 장갑까지 제작한 다음에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으음, 그래.”
“좀 시간이 걸릴 텐데 그래도 기다려 주시겠어요?”
리세라가 부탁하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행복할 때는 말도 잘 안 나오는 법이라서.
더 시간이 지난 다음.
내가 돌아보자 세탄의 품에 안긴 라온이 오르카의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야야. 누나, 아파요. 아프다니까요.”
“아하하, 오르카 머리카락 되게 예뻐! 신기해! 예뻐!”
가장 먼저 태어난 장녀지만 용족인 라온은 정신 연령이 아직 애라서, 남동생은 쩔쩔맬 수밖에.
자식들끼리 노는 광경이 보기 좋긴 한데…….
“아, 그런데 라온. 어쩌다가 너 혼자 왔니?”
라온은 아직 어려서 옆에 사람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혼자다.
라온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다. 큰일 났어. 아빠.”
“응? 뭔데?”
“엄마랑 동생이 싸워! 아빠밖에 말릴 사람이 없으니까 데려오래!”
……가장이 퇴근하면?
집안일이 기다리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