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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04화 (204/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04)

자식 농사가 풍년이네

황도의 거리.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본래 황도는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고.

연임식 이후, 유동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러면 치안이 걱정되는데…….”

“걱정 마세요. 누님은 원거리 호위 중이니까요.”

내 아이들, 황자와 황녀들에게는 요원들이 붙어 다녔다.

칠죄신이 사멸했다고 한들, 모든 위험과 불안이 사라지는 게 아니지.

좀 마음을 놓은 나는 앞을 살폈다.

“저기 녹색 드레스가 리세라지?”

“예, 청력을 줄이고 계실 테니까 우리가 대화해도 별문제 없을 거예요.”

엘프는 청력이 비상하지만, 온갖 소리들이 날아다니는 도시에서는 일부러 줄이고 산다.

안 그러면 공황 장애 오기 딱이라서.

“……지나치게 붙어 다니는군요.”

내 옆의 세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바로 투시력을 발휘했다.

투시력의 다양한 활용, 인파도 투과해서 볼 수 있었다.

리세라와 상대 남자는 주먹 하나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러네? 저거 진짜 안 되겠네?”

“아, 뭐가요. 그냥 같이 걸어가고 계시잖아요.”

“너무 가까워! 외간 남자는 5미터 이상 거리를 둬야지!”

“……호들갑 떨지 마시고요.”

오르카가 묘하게 말끝을 흐리면서 내 팔을 가볍게 붙들었다.

왜 이러나 싶던 나는 멈칫했다.

상대 남자.

빙긋 웃는 리세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떠오른 무료한 표정.

엘프 남자.

나도 아는 놈이다.

……멜리우스였다.

모든 상황을 깨달은 나는 우뚝 멈춰 섰다.

“혀, 형! 아버지 말려!”

“아버지?”

“……아, 괜찮다. 놔라.”

양쪽에서 두 아들이 팔을 붙들고 매달리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열이 받았지만.

나는 최대한 이성을 유지했다.

“그래, 멜리우스는 일단 엘프고 잘생겼지. 거기다가 나름대로 강하고, 칠죄신을 토벌하는데 군공을 세우기도 했지. 거기다가 이전부터 나를 따라서 많은 고락을 같이하기도…… 저 새끼가 어디서 저러고 있어! 내 딸 말하고 있는데 지루한 얼굴을 해!!”

가슴에 불덩이가 올라오는 기분이다.

딸에게 저딴 놈이 붙은 것도 용서가 안 되지만, 지루해하는 건 더욱 용서가 안 돼!

“아버지! 진정하시라니까요! 형!”

“아버지, 여기 거리입니다. 진정하세요.”

두 아들이 필사적으로 나를 붙들고는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빡 돌았던 나는 아들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 들어갔다.

“후우우우…….”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오자 나는 벽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눈을 감고 명상.

마력을 몸으로 돌리면서 정신력을 점검한다.

전생부터 멘탈이 깨질 온갖 상황을 겪어 온 내가 심화를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3분 동안 마음을 다스린 나는 옆에서 노심초사하던 아들에게 물었다.

“……오르카, 그러니까 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내 딸을 넘본다 이거냐?”

“멜리우스 경은 이전부터 많은 공을 세워서 작위까지 수여받았잖아요…….”

“하하하하, 그래, 멜리우스 남작이시지!!!”

내가 시릭 카라카스라는 걸 모르면서도 오래 도와온 공, 거기다가 칠죄신과의 전쟁에 참가했으니 당연히 공을 기려야지.

그래서 멜리우스도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제까지 이종족들에게는 작위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지만, 내가 직접 내렸다는 건 무게가 달라진다.

“……그래, 완전히 탄탄대로겠네? 환생한 나를 초기 시절부터 도운 데다가 공까지 세워서 작위까지 받고, 이제 사위까지 되면 멜리우스는 엘프 중에서 가장 잘나가겠어? 그렇게 놔 둘 순 없지. 내가 저놈 머리부터 싹 밀어 주마.”

“……아버지, 좀 진정하시라니까요.”

오르카가 나를 걱정하면서 달랬다.

“실망하시고 괴로운 건 알겠지만…….”

“아니, 왜 괴롭…….”

말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나도 아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불길하긴 했는데 이게 참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오래 함께해 온 동지에 대한 배신감?

한편으로는 딸아이, 리세라가 좋다면 눈감아 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으으음.”

애당초 멜리우스가 엘프들에게서 반쯤 추방당하다시피 한 것도, 리세라를 보호하려다가 실패해서고.

아버지로서 내 개인 감정을 떼어 놓고 생각해 보면, 멜리우스는 리세라에게는 한결같았다.

“……젠장.”

속이 확 끓어오르는데 무작정 반대하기 힘드네.

묵묵히 지켜보던 세탄이 말했다.

“제가 우연인 척하고 더 확인해 볼까요?”

“……어떻게?”

“둘이 사귀는 사이인지 물어보겠습니다. 맞다고 하면 허락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모르시는 일로 하시고, 제 선에서 잘라 내겠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간신히 가로저었다.

“아니, 멜리우스는 분위기 못 맞추는 이상한 놈이라는 거 빼곤 나름대로 괜찮은 남자지. 지루해하는 얼굴인 건 좀 용서가 안 되지만 그래도 무작정 반대할 수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납니다.”

“뭐?”

“제가 알기로는 저 남자는 200살이 넘었습니다. 엘프로서는 성인입니다만. 반면 리세라는 이제 100살이 넘었습니다.”

“…….”

인간의 관점이라면 아득한 나이지만 장수하는 이종족의 관점은 다르다.

세탄도 얼굴이 험악해져 있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웬 노총각이 껄떡거리는 걸 목격한 얼굴이다.

“오르카, 다크엘프의 관점으로 말해 봐라. 리세라와 멜리우스의 나이 차이는?”

“……인간으로 치면 띠동갑이라고 생각하시면 될걸요?”

“좋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겼군.”

나는 홀가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우스는 마냥 미워할 수 있는 놈이 아니라고? 나를 오래 따라왔다고?

나이에서 탈락! 오케이!

“나는 이 결혼 무조건 반대다. 너희도 그렇게 알아 둬라. 아, 다른 애들하고 어머니들도 설득해.”

“아버지, 뭐 벌써부터 결혼을…….”

“결혼할 각오도 없이 내 딸에게 들이대? 죽을라고?”

“……두 분 손도 안 잡았는데요.”

“그러니까 참고 있는 거다.”

나는 단호하게 끊었다.

결혼을 막으려면 나 혼자만의 반대가 아니라 집안 전체가 반대하는 게 효과가 좋다.

“알겠냐? 세탄, 오르카. 애들에게 다 알리고 처리해라.”

“알았어요. ……그럼 이제 어쩌시게요? 황성으로 돌아가시려고요?”

“…….”

내가 잠깐 생각하자 오르카가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리세라 누님은 저에게 멜리우스와 만난다는 걸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결국 아버지에게 알려 드렸고요. 이게 들통나면 저는 누님에게 굉장히 원망을 받게 되겠죠? 어쩌면 평생이요.”

“으음, 내가 이셀렌에게 들은 거로 해 두마.”

“양심에 찔린다고요. 기왕 오신 김에 두 분이서 어떻게 지내는지 좀 보고 가세요.”

“…….”

리세라가 멜리우스와 데이트를 하는 걸 지켜보라고?

오르카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나이만 앞세워서 무작정 반대하는 것보다는 계속 보면 뭔가 꼬투리라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래?”

물론 오르카가 정말 이렇게 생각해서 말하는 건 아니지.

오르카로서는 리세라가 각별하게 부탁했으니, 가능하면 성사시켜 주고 싶은 것이다.

나를 설득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건데…….

“알겠다. 아직 시간 있으니 미행 계속하자.”

나와 오르카, 세탄은 멜리우스와 리세라를 계속 미행했다.

오르카가 다크엘프의 통신망으로 보조하고, 나는 투시력을 계속 써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소리까지는 안 들려도 대충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이런저런 경험이 많은 나로서는 남녀의 거리감이야 훑어보기만 해도 유추할 수 있었다.

“…….”

둘은 서로 손을 잡아 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멜리우스는 무덤덤하지만, 놈답지 않게 의외로 정중했고.

리세라는 정갈하면서도 조곤조곤했다.

이제 막 사랑이 움트려고 하는 광경이랄까.

“보는 아버지의 마음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만. 아, 리세라. 왜 하필 많은 남자 중에서 멜리우스냐. 그놈은 안 된다. 나보다 약하잖아.”

“……아버지보다 강한 사람은 세상에 없는데요?”

“없어도 돼!”

오르카의 지적에 부르짖으면서도 나는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사실 뭐…… 아주 안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나, 시릭 카라카스가 급사한 이후 제국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었다.

그리고 리세라는 하프엘프이면서도 엘프들의 본거지, 정령수에서 살게 되었고.

하프엘프를 받아들이지 않는 엘프들이지만, 황녀라는 정치적인 특수성 때문에 예외로 받아들여진 건데.

이런저런 험난한 과정이 있었고, 결국 리세라는 수십 년 동안 시력까지 잃었다.

멜리우스는 그런 리세라를 도우려고 나름 최선을 다한 모양이고.

“…….”

내가 없는 사이에 내 딸을 도우려고 노력한 놈이라면 허락해야 하지 않나?

분노와 당혹감과 별개로 조금씩 이성적인 판단이 돌아온다.

나야 멜리우스가 눈에 차지 않지만, 리세라가 꼭 저놈이어야 한다면 아버지로서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으으음.”

“옷 가게로 들어갔는데요. 좀 더 다가가도 될 것 같아요.”

오르카는 말하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오르카는 내심 리세라를 도와주고 싶어서, 나에게 단계적으로 정보를 오픈하고 또 내 분노를 누그러트리려고 애쓴 것이다.

“…….”

나는 오르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누나의 사랑을 응원하려는 게 기특하다.

아들이 이리 애쓰면 속아 줘야지.

“세탄, 당분간, 당분간만 좀 두고 보자. 리세라와 저놈의 관계, 모른 척해라.”

“아버지가 정 그러시다면 저도 그러겠습니다.”

세탄도 감정을 억누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옷 가게로 다가갔다.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리세라와 멜리우스를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잠깐이라면 밖에서 봐도 들키진 않겠지.

유리 너머의 리세라는 옷을 보고는 멜리우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멜리우스는 자못 신중하게 듣고 있었고.

“저놈이…….”

내 사위가 된다고?

참…….

오만가지 감정이 들지만 딸이 정 좋다면야.

내가 씁쓸함을 곱씹으면서 돌아서려는데…….

“아하하하! 아빠!!”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

공이 통통 튀는 것 같은 달음박질.

단숨에 뛰어오른 물체가 내 목을 잡고는 가로로 붕 돌더니, 철봉 넘기처럼 수직 상승한다!

“으아아아?!”

경험으로 녹색 머리를 알아본 나는 기겁했다.

내 장녀, 라온이잖아!

용족인 라온은 생긴 것도 다섯 살이고, 실제로도 다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구는데…….

“으아아!!”

“아하하하!”

아무튼 애가 공중제비를 넘었다!

나는 허둥거리면서 떨어지는 애를 양손으로 받아 내려고 했는데…….

따아악!!

라온의 머리와 내 머리가 충돌했다.

라온이 앞뒤 가리지 않고 박치기를 해 버린 거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충격 속에서도 나는 일단 딸부터 붙잡았다.

차르르릉!

하지만 박치기의 충격에 몸이 멋대로 밀려난다.

라온은 내 품에 안겨서는 구김살 없이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신나! 또 해 줘요!”

“자, 잠깐만. 아빠 머리가…….”

어라.

옷 가게 입구에 서 있었는데 엉겁결에 안에 들어와 버렸네?

나는 급히 입을 다물고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남성복을 보던 리세라와 멜리우스가 등부터 가게로 들어온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

침착하자.

나는 지금 비전으로 변장한 상황, 외모만 보면 두 사람 다 나라는 걸 몰라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출입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리세라의 떨떠름한 목소리.

하지만 여기서 반응을 보이면 하수지.

“아버지?”

“…….”

이건 떠보는 거다.

유인성 볼에 낚이면 올해 포스트 시즌은 또 말아 먹는 거야!

내가 모른 척, 나가려는데 리세라가 한숨을 쉬었다.

“저 화내요?”

……그래, 가을 야구는 늘 말아 먹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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