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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03화 (20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03)

Nobody

나와 하시아 사이의 딸아이, 아직 이름도 지어지지 않은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기 위해서는 특별한 정신력을 모아야 한다.

거기에 따른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아버지, 진짜 괜찮으세요?”

정오.

마주 앉은 다크엘프, 둘째 아들 오르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윤곽은 잡아 놨으니까 괜찮다. 그리고 한나절쯤은 내가 없단 걸 감출 수 있을 거다.”

나는 지금 황성을 빠져나와, 황도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밀실, 또 비전을 사용해서 변장도 했다.

옆에서 봐도 내가 황제라는 걸 모를 것이다.

오르카의 옆, 장남 세탄이 물었다.

“혹시 각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야 그런데…….”

나는 잠깐 생각하고는 내 팔에 찬 팔찌를 보았다.

하시아와 관계하면서 정신력이 스며드는 느낌은 들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하시아가 두루뭉술하게 설명했지만, 요점은 내가 주변 사람들과 우호를 다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의 정신력을 흡수해서 초능력을 강화하던 것처럼.

즉, 내 가족과 전우를 자주 보는 게 좋다.

오늘은 그 실증을 위해서 두 아들과 비밀리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자, 그럼 오르카. 얼른 이야기해라.”

……아버지로서 절대 묵과할 수 없는 화제도 있었다.

넷째 딸, 리세라에게 남자가 생겼다니!

연임식 이후, 내가 공적인 업무 처리에 허리가 휘면서도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

오르카가 입을 다물고 망설이자 세탄이 돌아보았다.

“오르카, 무슨 일이지? 아버지가 굉장히 화나신 얼굴인데. 혹시 메이호 때문에…….”

“아, 그거 아니야. 형 그리고 그거 말하면 메이호 누나에게 머리 쥐어뜯기니까 조용히 해.”

“메이호가 뭐?”

리세라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 찼던 내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오르카는 급히 말했다.

“아, 아니에요!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그쪽은 아니니까요! 좀 민감한 문제니까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뭔데? 그냥 말해.”

“말하면 제가 메이호 누나에게 죽어요.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말씀드릴게요. 예?”

오르카가 간곡하게 말하자 나는 표정을 풀었다.

아들이 위축될 정도로 너무 감정적이 되었나 싶어서.

너무 얼었다고? 포효를 쓰는 내가 화를 내기 시작하면 면전에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간청하는 오르카의 용기와 담력이 대단하다고 높이 사야지.

암, 역시 내 아들이야!

오르카가 겨우 한숨을 돌리자 세탄이 의아하게 보았다.

“그럼 뭡니까? 아버지가 우리 둘을 불러서 긴밀하게 논의하실 일이라면 가족 문제 같은데요.”

“그래, 리세라에게 어떤 빌어먹을 놈이 추파를 던진단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즉답한 세탄이 오르카를 돌아보았다.

“유배 보내면 되겠지. 오르카, 그놈이 누구냐?”

“형?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참수는 좀 심하지 않냐? 유배 정도면 리세라도 기뻐하겠지.”

“남친 유배 보내는 게 무슨 가족 선물이야?”

오르카가 기가 막혀서 세탄을 흘겨보았다.

세탄은 시종일관 진지하게 말했다.

“설마 오르카, 한 번만 봐주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럼 못 쓴다.”

“세탄 말이 맞다. 겁도 없이 나대는 놈을 콱 죽여 버려야 딴 놈들이 정신을 차리고 내 딸에게 얼씬도 안 하지.”

“당신들이나 정신 차려요! 이걸 누님이 알면 어떻게 되겠어!”

내가 흐뭇하게 세탄을 지지하자 오르카가 버럭 소리쳤다.

세탄이 의아하게 말했다.

“당연히 리세라 모르게 해야지. 알면 안 되지.”

“그래, 오르카. 가족끼리도 이런 건 알아서 배려해 주는 거다. 넌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아.”

“……미치겠네.”

나와 세탄이 주고받자 오르카는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나랑 포즈가 똑같은 게 진짜 내 아들이네!

나는 흐뭇해져서는 아들을 달랬다.

“자, 오르카. 솔직하게 털어놓고 편해져라. 이런 건 집안의 남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해결해야지.”

“……자꾸 말도 안 되는 말씀만 하시면 리세라 누님에게 콱 일러바쳐요?”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오르카를 바라보았다.

아니, 세상에.

아들이 반항기인가?

아버지에게 맞서려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뿌듯하고 대견하지만 그래도 이 사안에서는 물러날 수 없다.

세탄이 침착하게 말했다.

“염려 놓으시죠, 아버지. 리세라에게 들킬 경우에는 전부 제가 주도한 일이라고 둘러대겠습니다.”

“고맙다. 세탄, 역시 아들밖에 없다.”

“나도 아들이거든요? 아들이 말리고 있거든요!”

오르카가 버럭버럭 소리치자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면 어쩌자는 거냐? 리세라에게 접근하는 놈을 봐주자는 거냐?”

“오르카, 이건 가볍게 논할 문제가 아니다.”

세탄은 새삼 목소리를 고치고는 오르카를 설득했다.

“우리 천년제국의 황실은 이름만 황실이지 권위가 그리 높지 않다. 고작 100년밖에 안 되는 제국, 근본도 없다는 평이 각 종족 안에서 돌고 있지. 물론 우리 제국과 황실을 사랑하고 숭상하는 이들도 많으나 업신여기고 능멸하는 이들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

“그놈이 누군지 몰라도 리세라를 우습게 여겨서 수작을 부리려고 접근한 가능성도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아버지이자 오빠이고 동생인 우리들이 미리 처리해 줘야 하지 않겠냐? 리세라가 상처받기 전에.”

오르카는 입을 다물었다.

세탄의 말이 맞다.

제국의 신하, 각 종족은 나, 시릭 카라카스를 따르고 숭배하기는 하나 그 마음이 내 배우자와 자식들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황제 모욕죄는 존재해도 황실 모욕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종족의 입장에서는 경쟁 상대,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일도 많았다.

“미안하다, 세탄. 내가 사실 권위에 별 관심이 없고 또 내 사람에게 칼 뿌리는 일을 자제하다 보니 일이 번거로워졌구나.”

“아닙니다, 아버님. 아버님의 관대한 도량이 있었기에 제국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겁니다. 다만 우리 집안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소의 엄정함이 필요한 것도 사실, 제가 그 역할을 맡고자 합니다.”

“혹시…….”

“예, 미리엘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세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엘, 내 셋째 딸은 12가문의 하나에게 모욕을 당했다.

“제가 황도에 있었더라면, 아니 몸이 어디에 있건 황실의 권위가 바로 세워졌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널리 내다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

세탄이 정말로 머리까지 숙여 보이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장남이 저리 말하니 흐뭇했다.

오르카는 앓는 신음을 흘렸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단, 내 의견도 참고해 주세요. 절대 무작정 죽이려고 하지 말고!”

“오르카, 다시 말하지만 유배 보낼 거다.”

“그래, 유배 가다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지. 하하하.”

“아, 그렇게 처리할까요?”

“아니, 처리라니. 그냥 원래 유배 가다가 죽는 사고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잖냐? 하하하하, 섬으로 귀양 가다가 배가 침몰하기도 하는 거고.”

“그렇군요. 요즘 해난사고가 잦죠?”

나와 세탄이 웃으면서 주고받자 오르카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정색하고는 말했다.

“자, 길었다. 이셀렌이 알아차릴까 봐, 그 어떤 정보 수집도 하지 않았다. 대관절 상대가 누구냐?”

“……지금 이 카페에 있어요.”

내가 새삼 주변을 둘러보자 오르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처럼 다른 방음실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세요. 누님도 계신다고요.”

“……지금 리세라와 그 새끼가 밀회하고 있다고?”

“진정 좀 하세요. 한낮의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는 거 말고 뭘 하겠어요?”

“…….”

많은 걸 할 수 있지.

하지만 내 아내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자식에게 차마 할 순 없었다.

내가 이를 악물자 세탄이 말했다.

“아버지, 종업원을 시켜서 상황을 염탐할까요?”

“……아니, 이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나서는 거고.”

나야 제국의 황제고, 내 자식들도 황자다.

이런저런 일을 맡길 사람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집안일, 집안 내부에서 처리하기로 작심하고 우리 세 부자가 직접 모인 거다.

“리세라는 똑똑한 아이야. 괜히 움직였다가는 들킬지도 모른다.”

“카페 밖에 애 붙여 놨어요. 리세라 누님이 나가시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오르카가 내 마음을 알고 말했다.

역시 정보 요원, 역시 내 아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를 불러온 것이다.

“고맙다, 오르카.”

“……아버지가 저 볼 때마다 닦달하셔서 그래요. 야근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 분이 틈만 나면 누님 일을 걱정하시잖아요.”

“아빠가 자식들 걱정하는 건 당연하지.”

이건 누구에게도 양보 못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리했다.

“아무튼 리세라와 상대가 나서면 우리가 미행하자. 상대 확인하고 둘의 분위기부터 보고 내가 결정하마.”

내 결론에 두 아들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간이 좀 비는군.

모처럼 아들들과 함께하는 자리, 나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오르카, 너도 마음에 둔 아가씨 있다며?”

“……예? 예?”

“이셀렌이 신경 쓰더라. 누구냐?”

“아, 아버지가 모르는 여자인데요.”

당연히 모르지.

하지만 내내 침착하던 오르카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첫사랑이 발각되어서 부끄러워하는 소년처럼.

세탄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

“형,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는 게 낫지 않겠냐?”

세탄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저렇게 보여도 많은 결혼 경험이 있으신 분이다. 도움이 될 거다.”

“도움 필요 없거든!”

“음, 오르카. 나도 사실 나서고 싶진 않은데…… 이셀렌이 알고 있다니까?”

내가 설명하자 오르카는 신음만 흘렸다.

다크엘프의 수장, 암살여왕 이셀렌.

오르카의 어머니, 모자 관계이지만 오르카는 상당히 어려워했다.

“이셀렌이 나서겠다는 걸 내가 말리는 중이다. 이러다가 상견례 하게 될 것 같은데…… 그전에 내가 나서는 게 낫지 않겠냐?”

“……아버지가 나서서 어떻게 하시게요?”

“그야 네가 마음에 둔다는 아가씨도 슬쩍 만나 보고, 좋은 이야기도 나누고, 돌아가서 이셀렌에게 참한 아가씨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오르카는 기가 막힌 얼굴로 날 보았다.

“아버지 황제거든요?”

아.

지금 카페의 밀실에서 쑥덕거리고 있지만 나는 황제고 내 아들들은 황자다.

나는 바로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어, 그거 혹시. 아가씨가 황제의 아들은 싫다고 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

내가 넘겨짚자 오르카는 감정을 감춘 투로 말했다.

하지만 정곡이었다.

소설에서야 황자는 1등 신랑감이지만, 현실은 다른 법이다.

일단 부담감부터 느끼지?

거기다가 오르카의 어머니는 암살여왕이라고 불리는 이셀렌이다.

세상에서 시어머니로 두기 싫은 여자 1위일 거다.

“그래도 내가 한 번 만나서 잘 설득하면…….”

“아버지.”

오르카는 한숨을 쉬었다.

“돌아오신 시릭 카라카스 폐하께서 자기 아들하고 결혼하라고 말하면 거역할 여자가 있겠어요? 싫다고 말하면 황명을 거역한 대역죄인인데?”

“아니, 그거야…….”

“알아요,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닌 거.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요. 감히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거절했다고 괄시당한다고요. 아니, 괄시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죠. 커리어 완전 끝날걸요?”

그러네.

나야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얼굴 보는 일이라도, 세간에서는 황제의 압력 행사로 받아들여진다.

오르카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이리 마음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억지로 밀어붙이고 싶지 않아요. 아니, 그냥…….”

“음, 알았다. 일단 이셀렌은 내가 최대한 막아 보마.”

“……죄송합니다.”

의미를 알아들은 내가 말하자 오르카는 머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세탄이 나에게 넌지시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눈짓으로 말렸다.

보아하니 오르카는 굉장히 새콤달콤한 연애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지.

딸인 리세라에게는 주제도 모르는 놈이 접근해서 문제고, 아들인 오르카는 황자라서 문제인가.

“하나, 하나 해결해야지.”

“예?”

“아니, 이셀렌 달래는 건 맡겨 달라고. 걱정하지 마라.”

“그러고 보니 아버지, 아…….”

오르카는 말하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세라 누님과 상대가 카페를 나섰답니다. 따라가죠.”

“……그래.”

오늘 본때를 보여 주마.

내가 반사적으로 이를 뿌득 갈면서 일어나는데 오르카가 말했다.

“……이제 말씀드리는데 남자는 아버지도 아시는 분이에요.”

“뭐?”

감히 내 딸에게 치근덕거리는 놈이 나도 아는 놈이라고?

나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곧 결연하게 대꾸했다.

“그런다고 안 살려 둔다.”

“……아, 죽이면 안 된다니까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날 배신한 놈도 용서해 주고 다시 부하로 받아 주었다.

하지만 딸 문제는 예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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