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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202화 (외전) (202/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외전 (202)

가화만사성

겨울이 다시 왔다.

연임식 이후 2달이 지났다.

정말 쉴 틈 없이 일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나, 시릭 카라카스가 없는 동안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정부 단체들의 연결 망을 회복하는 것만 해도 눈 돌아가는데.

거기다가 정부의 중신들 정년 퇴임, 인수인계까지 겹치고.

100년 묵은 업무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전쟁 이후의 피해 복구, 국정 수습.

그리고 내 연임에 따른 혼란 최소화.

진짜 자는 시간만 빼놓고 일했다.

“아, 죽겠다.”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

나는 어깨까지 담그고는 멍하니 한숨을 쉬었다.

황성 집무실의 옆, 샤워실 겸 욕실이다.

목욕 시중 들겠다는 녀석들은 일해야 한다고 다 쫓아냈다.

핑계가 아니다.

욕조 주변 그리고 내 머리 위에는 각종 서류와 보고서들이 둥둥 떠 있었다.

염동력으로 띄워 두고 읽고 펜으로 쓰고, 서명한다.

요즘은 먹으면서 일하고, 씻을 때도 일한다.

“애들, 애들 보고 싶은데…….”

물론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자식들의 문안 인사를 받고 대화를 꼭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0년 동안 못 해 준 만큼 더 해 주고 싶으니까.

“애들하고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아냐, 예산안 다시 좀 봐야지. 아, 역시 서부에서 너무 많이 소모되었네.”

칠죄신과의 전쟁은 인류의 승리로 끝났으니 해피엔드?

정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황제인 내 업무는 산더미고, 앞으로도 더 많아질 예정이지.

나는 염동력으로 띄운 주판으로-내가 개발한 거다-계산하다가 이마를 짚었다.

“아, 결국 돈이 부족하네. 뭘 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

황제 부재의 제국 재정은 렌시엘이 맡았다.

렌시엘은 거둔 세금을 알뜰하게 관리하기는 했으나…… 정작 세금 자체가 잘 걷히지 않았다.

당시 황후들에 대한 반발 여론이 너무 컸으니까.

공공연한 세금 체납과 탈세가 벌어졌고, 강제 징수를 하기에는 렌시엘의 권력이 너무 약했다.

“내가 돌아왔으니 내년부터야 재정이 회복되겠지만…… 당장 올해 돈이 없잖아. 전쟁 치르는 바람에 나갈 돈은 부지기수인데 탈세 조사에도 시간이 걸리고. 그렇다고 당장 새로운 세금을 내라고 할 수도 없고.”

100년 만에 돌아온 황제, 나에게 민중의 기대감이 드높았다.

내가 기적을 보여 줄 거라고 믿는데 거기에 세금도 내라고 할 순 없지.

막 정권 잡은 이들이 괜히 사면령을 내리는 게 아니다.

정치의 첫 단추, 분위기는 중요하니까.

“마족에게 돈을 더 뜯어낼까. 음, 엔라에게 보석금을 걸어? 아냐, 아무리 그래도 대역죄를 그리 다뤄서는 안 되지. 그러면 마족에게 돈을 뜯어내되 다른 명분이 필요한데. 마족은 기꺼이 내고 나는 즐겁게 받아 주면서도, 엔라의 감형을 위한 게 아니라고 눈 가리고 아옹할 수 있는 정치적 술수. 으으음…….”

머리가 안 돌아간다.

“아, 역시 황후를 하나 더 들일까? 엔라를 갈음하는 대신에 결혼을 1번 더…… 아니, 내가 미쳤나. 돈이 너무 없어서 결혼이라니. 돈을 찍어 내? 아니, 그러면 자승자박이고. 이거 어디 금맥이라도 안 나오나?”

두 달 내내 일만 하니 사고가 마비됐다.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쏘아붙였다.

“아, 누구야. 나 일하는데 어딜 들어와?”

“남자는 보통 들어오고 싶어 하지? 더 정확히는 들락날락하고 싶어 하고.”

“…….”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둘이면 끔찍하니까.

1황후, 하시아는 다가와서 욕조를 짚고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희고도 푸른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내 뺨을 간질거린다.

“아닌가? 너는 넣을 듯 말 듯 살살 약 올리는 걸 좋아했지?”

“……그 화제로 계속 대화하는 거였어요?”

“벗고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소리니까.”

하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보통 사람이 하면 농담이지만 이 사람은 나름 진지하지.

쪽.

하시아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그리고 기왕 서큐버스가 되어 버린 거, 좀 더 직업 정신을 가져 보려고.”

“제정신부터 챙겨요, 좀. 옷 입고 나갈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요.”

“보기 좋아서 나가기 싫은데?”

하시아는 내 뺨을 문지르면서 속삭였다.

“환생한 시릭의 몸은 보면 야들야들하고 만지면 보들보들하네.”

“……아, 거, 진짜. 이 여자가.”

“왜? 꼬집으니까 기분 좋아?”

하시아가 물 아래, 구체적으로는 내 하반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나는 염동력으로 욕조의 물을 가볍게 찰랑거려서 훼방을 놓았다.

하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나에게는 투시력이 있지. 열려라 참깨!”

“열리긴 뭐가 열려! 이 음란한 마녀야!”

“내 허벅지 잡고 벌리면서 말했잖아? 이것도 시릭이 한 말.”

“…….”

예, 전생의 제가 그랬습니다.

“……대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기억해요?”

“네가 한 말들은 거의 다 기억해. 잊을 수도 없지.”

별 영양가 없지만 즐거운 대화.

과다한 업무에 혹사당하다가 모처럼 쉬는 시간이다.

또 상대가 하시아다.

아름다우면서도 나사 빠진 여자, 내가 사랑하는 여자이자 나의 스승.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와 함께 한다는 현실이 새삼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도 젖은 손으로 하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하시아는 내 손등을 잡고 누르면서 속삭였다.

“뺨만 말고 다른 데도 만져 주면 더 기뻐지겠지.”

“문장이 왜 수동태인데요?”

“다들 나보고 먼저 하라고 성화라서.”

“…….”

내가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하시아는 한숨을 섞어 가면서 말했다.

“시릭, 환생한 이후 오늘까지 아내들과 잠자리를 갖지 않았지? 그럼 못 써. 대체 언제까지 미루려고?”

“일하느라 정신없었을 뿐입니다.”

하시아가 흘겨보자 나는 어영부영 말했다.

“황후들 불만이 많다고요? 그럼 나한테 직접 말하면 되지 왜 공을 빙빙 돌려요? 그리고 나도 싫어서 미룬 게 아니라…….”

“아내들은 여전히 널 어려워하고 있어. 말로 하는 대화는 서로 충분하니 다시 몸으로 대화할 때가 왔고.”

“…….”

사람 쉬는데 갑자기 의무 방어전을 뛰라네.

넘어가면 안 되지.

내가 허공에 떠다니는 서류들을 가리켜 보이자 하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 핑계 대지 말고.”

“진짜로 바쁜…….”

꾸우욱.

하시아는 양손으로 내 뺨을 꽉 눌러서 말을 못 하게 만들었다.

어린애 다루는 장난이지만 그래서 즐겁다.

나도 하시아의 뺨을 잡아당겼다.

황제와 황후가 하기에는 너무나 시시껄렁한 장난.

사랑하는 사람끼리 할 수 있는 장난.

“다들 내 눈치를 너무 봐. 내가 돌아왔으니 1황후도 시키고. 너와 잠자리도 가지라고 야단이지.”

“1황후는 맞잖아요, 신원 복원은 됐으니까.”

랑에이를 비롯한 다른 황후들이 하시아에게 나 좀 유혹하라고 권한다는 거겠지?

대충 머릿속으로 광경이 그려진다.

하시아는 이젠 뺨을 좌우로 당기는데 가운데 나는 정리했다.

“일 좀 단락 짓고 할 거예요. 잠자리는 눈치 보고 계산적으로 하고 싶지 않고.”

“그 떡밥은 상했어.”

하시아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더니만 내 손목에 뭔가를 채웠다.

찰칵.

맞물리는 소리.

검은색의 팔찌였다.

“이건 뭡니까?”

“네게 앞으로 필요할 거야.”

쪽.

하시아는 내 앞머리를 헤치고 거듭 입을 맞췄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이는 촉감.

나는 눈을 감고는 말했다.

“선물할 거면 좀 예쁜 걸 주던가요.”

“예전에는 내가 주는 거라면 신발 속의 곰팡이라도 좋다면서?”

“됐어요. 스승님의 미적 감각을 기대하느니 내가 예술가 하지.”

“이건 나 혼자 만든 게 아니야.”

의아한 말.

내가 눈을 뜨려는데, 하시아가 내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하시아는 손을 내려서 내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우리 둘의 딸아이, 지금 계면 차원에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고 싶지?”

“그거 방법 만들어 두라고 했잖아요. 뭐가 필요해요?”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널 보내 줄 수 있어. 조건은 초능력자 2명 이상이니까. 문제는…….”

하시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간다고 무사히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거야.”

“위험한 곳이에요?”

“안락한 곳이라서 더 위험하지. 그곳의 시간 흐름과 카라카스는 완전히 달라.”

잠깐 생각.

“내가 애 데리러 갔다가 카라카스로 돌아오면 수십 년이 지날 수도 있다고요?”

“그래, 거기 가면 돌아오고 싶지 않게 돼. 너무나 아늑한 무릉도원, 정신적 요람이니까.”

“…….”

직접 경험한 하시아가 하는 이야기, 정말 보통 장소가 아닐 것이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아늑해서, 빠져나올 생각을 못 하게 돼. 나도 굉장히 어렵게 나온 거고.”

“으음.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데요?”

하시아의 손가락이 내 팔과 가슴을 자꾸 만지작거린다.

신경이 쏠리는 걸 모른 척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쪽.

그러자 하시아가 내 입술에 키스했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서 입을 맞췄다.

몸의 속삭임.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

하시아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되지?”

“키스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건 망상이고요. 할리우드 영화도 그거 유행 지났어.”

“하하하, 그건 그렇지?”

웃음을 터트린 하시아는 설명했다.

“이미 알겠지만 너는 재림 황제로서 카라카스에 강력하게 속박되어 있어. 계면 차원으로 나간다고 해도 결국 다시 돌아오긴 할 거야. 문제는 귀환 과정에서 시간이 얼마나 흐를지 모른다는 거지.”

이건 중요한 문제다.

하시아도 서큐버스로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나는 데 10년이 걸렸고, 원래대로 활동하는 데에는 100년이 걸렸다.

내가 계면 차원으로 갔다가는 그 이상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내 가족들의 수명이 다한 다음에 돌아올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하시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딸아이를 데려올 수 있게, 나름의 계획을 세웠지. 정신의 바다, 아늑한 망망대해로 떠밀리지 않게 항구에 닻을 달아서 붙들어 매는 거지.”

“이 팔찌가 내가 거기서 시간 낭비하지 않게 해 준다고요?”

“그래, 열반에 들어 봤으면 알잖아? 그런 정신 오염을 막아 주는 거지.”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반에 든 건 나로서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실제로 카라카스에서는 사흘이 지났다.

그런 시간 경과가 일어나지 않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가야 한다.

하시아가 속삭였다.

“그 팔찌에 정신력이 모일 거야. 네 정신력이 아니라 너를 생각하는 정신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림 황제가 아니라 인간 시릭 카라카스이자 리젠 리브라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가족과 벗의 마음을 모아야…… 꺅?!”

나는 설명을 듣는 척하다가 하시아의 목을 팔로 감고는 잡아당겼다.

하시아도 반사적으로 버티려고 했지만, 나는 그 순간 힘의 방향을 바꿔 버리면서 끌어당겼다.

첨벙!

하시아는 한 바퀴 회전하면서 욕조에 빠져 버렸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 앉아서 홀딱 젖은 하시아는 어이없어했다.

“……설명하는 중이었잖아?”

“발가벗은 남편 유두 만지작거리는 브리핑이 어디 있어?”

하시아의 로브, 몸에 딱 붙는 재질의 옷이 물에 흠뻑 젖어서는 아름다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짐짓 음흉하게 바라보자 하시아는 다정하게 말했다.

“고자라고 들었는데? 물론 나는 손가락만이라도 기쁘겠지만 무리하지 마.”

“……그딴 소리 그윽하게 하지 말아 줄래요? 누가 그런 모함을 해?”

“황후들이 네가 환생하면서 성적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냐고 의심하던데?”

“…….”

아내들이 모여서 그런 음모론을 생산했단 말인가?

하시아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투시력으로 보니까 해면체의 발기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했지. 하지만 발기 부전이라는 게 꼭 육체적인 문제만은 아니잖아? 심리적인 문제일 거라고 두둔했지.”

“그게 두둔이면 쿠데타도 구국의 결단이야.”

“괜찮아, 시릭. 원래 아무리 매력적인 상대라도 잠자리가 반복되면 흥이 식는 법이지. 이해해.”

하시아의 말을 무시한 나는 팔찌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이거 그냥 차고 다니면 돼요?”

“그래, 널 아끼고 사랑해 주는 아내, 자식, 벗들과 함께하다 보면 알아서 정신력을 흡수할 거야. 그 팔찌가 충만하게 빛나면 아이를 데리러 가면 돼.”

“…….”

설명은 길었지만 이해했다.

나는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당신답지 않게 다른 아내들과 어울려서 이야기한 것도, 또 나한테 고자의혹을 덧씌운 것도 이 팔찌에 정신력 쉽게 모으라고 설계한 거다?”

“내가 이래 보여도 스승님이었잖아? 판 정도는 깔아 줘야지.”

“남편을 엉덩이로 깔아뭉개려고 하고 있구만. 됐고 옷이나 벗어.”

“……어?”

내가 불쑥 손을 뻗자 하시아는 반사적으로 쳐 내고는 당황했다.

“아니, 잠. 앗?!”

내가 발끝으로 허벅지 안쪽을 누르자 하시아는 기겁하고는 몸을 틀었다.

하지만 1인용 욕조, 좁은지라 몸부림을 쳐도 도망갈 구석이 많지 않다.

“앗, 하하핫! 가, 간지러워!”

하시아가 쩔쩔매면서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요즘 뭘 하나 했더니만 내가 고자라는 음해나 퍼트리고 있었어? 애들이 알면 어쩌려고?”

“아하하핫! 이, 이해해 주겠지! 그러니까 그만, 그만!”

“지금부터 고자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겠습니다.”

나는 작심하고는 흠뻑 젖은 하시아를 붙들었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벗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아, 잠깐! 잠깐!”

속옷이 드러난 하시아가 정색하고는 검지만 치켜들었다.

“출산은 계획적으로!”

“…….”

내가 이런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니.

백 년 묵은 욕정도 승화되어 버리는데 하시아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아, 그, 그리고. 잊어버렸나 본데. 나 서큐버스가 되었잖아. 좀 달라질 수도 있는데…….”

“그래서?”

“……그, 좀 부끄러운데. 다음에 하면 안 될까?”

“좋아, 두 가지 맛으로 즐길 수 있겠군.”

나는 하시아의 제지를 무시하고는 마저 벗겼다.

허둥거리던 하시아가 욕조에서 일어나려다가 내게 붙들렸다.

나는 내친김에 하시아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누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 잠깐, 반말…….”

“원래 이러잖아.”

나는 하시아에게 평소에는 존대하지만 예외가 있다.

이 여자가 내 성질을 긁거나.

서로 남녀로 얽힐 때.

“읍, 잠…….”

입술이 맞닿고 몸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팔찌에 묘한 흐름이 쏠리는 것도.

이 팔찌에 정신력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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